인생의 마지막 심리학 #26

"자살의 문제: 모든 자살은 타살이다"

by 깨닫는마음씨




이제 우리는 말하기에 어렵고 조심스러운 주제를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네가 뭘 안다고 감히 자살에 대해 말해? 자살의 당사자나 그 유가족들의 심정에 대한 배려도 없이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건 악마나 할 짓 아니야?"


자살에 대해 말하려는 움직임은 많은 경우 이러한 말들에 의해 가로막힙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자살의 핵심일 것입니다.


즉, 자살이 말하기에 어렵고 조심스러운 주제인 이유는, 자살의 의도 자체가 '말을 막는 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가족 중에 자살자가 나오면, 가족들은 대내외적으로 그 사실에 대해 쉬쉬 하게 됩니다. 자살자에 대해 아예 언급을 안하게 되거나, 혹은 불가피하게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면 미화된 형태로만 자살자에 대한 기억을 남기려고 합니다.


이처럼, 자살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말이 막히는 이유는, 자살이 우리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살자 앞에서 우리가 잘못한 사람처럼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잘못한 사람으로 경험하게 되는 이 일이, 바로 자살자와 우리에게 똑같이 공유되고 있는 바로 그 일입니다. 자살자가 스스로를 비난하던 바로 그 방식으로, 우리 또한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자살이라는 사건을 경험했을 때,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을 경험합니다. 이 무력감은 뒤이어 우리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자극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옥죄이는 고통이 됩니다. 여기에서 무력감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력감을 경험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이러한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해결할 수 있는 자다."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는 당위를 가진 이만이 그 당위의 크기만큼, 현실에서는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조우하며 커다란 무력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살은 역설적으로 이 '할 수 없다'의 커다란 무력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행위입니다.


즉, 자신이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최후까지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최후만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며 그 최후를 선택하는 방식이 바로 자살입니다.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의 죽음으로 해결해보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최후만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존재였던 것처럼 스스로를 경험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의 문제는 곧 자아의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자아는, 아주 쉽게는 '남이 내 안에서 나인 척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해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나인 척 하고 있는 그 남의 정체는 바로 우리의 생존을 전적으로 조력하던 우리의 양육자입니다.


곧, 자아는 우리가 경험한 사회문화적 환경이 내포하던, 우리의 생존을 효과적으로 담보해주는 양육의 기능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 형성된 사회문화적 산물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 안에 생존의 기능으로 들어온 나의 부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기능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이 자아는 우리 안에서 나의 자리를 대신하여, 자기가 나인 것처럼 활동하며 우리의 생존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자아는 전적으로 개체를 지켜주는 부모와 같은 기능입니다. 때문에 자아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 발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아가 잘 발달된다는 것은, 자아경계가 선명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경계가 선명한 자아는, 어디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인지를 분명히 하게 됩니다. 그러나 덜 발달된 자아에게는 이 경계가 흐릿합니다. 때문에 눈에 보이는 지평선 전부가 자기가 관리해야 할 영토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아의 문제가 생겨납니다. 곧, 자아경계가 모호한 자아가 문제를 만들게 됩니다.


그 문제란 바로 분리의 어려움입니다.


자아가 이 모든 것을 자기의 영토라고 오해할 때, 자아는 그 영토에서 떠날 수 없게 됩니다. 다 자기의 책임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떠나지 못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경우, 부모는 자식이 열등하기 때문에 자신이 자식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부모로서 열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식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부모로서 자신을 못났다고 경험하는 이가, 그 못남을 극복하기 위해 자식에 대한 더 많은 부모의 책임감을 강조하며, 자식을 계속 자신의 곁에 계속 붙잡아두며 자식에게 좋은 부모로서 인정받기를 꿈꾸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자아중심성이라고도 표현합니다. 부모로서의 기능을 하는 자아가 모든 것을 자기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일, 그것이 바로 자아중심성입니다. 부모로서의 자아가 자신을 마치 신과 같은 입장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자아중심성이란, 부모가 자식에 대해, 자아라는 이름으로 자식의 안에서 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역설적이게, 자아중심성으로 움직이는 이가 가장 많이 하게 되는 말은 바로 책임감입니다. 부모로서의 열등감이 더욱더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채찍질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자아중심성은, 내 자식만을 위함으로써 부모로서의 내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이 '내 자식과 내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방향성'에, 책임감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타적인 것처럼 묘사해냅니다. 곧, 실제로 보이게 되는 이기성과, 가상으로 보여주기 위한 이타성이 분열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분열을 숨기기 위해, 자신은 늘 책임감 있는 부모인 것처럼 굴며, 외부의 다른 부모에 대해서는 그 이기성을 질책하게 됩니다.


그 핵심은 분명하게 "좋은 부모여야만 해."라는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좋은 자아여야만 해."라는 목소리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자기가 덜 발달되었다고, 곧 자기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자아의 열등감이 내는 목소리입니다.


자아는 지금 완벽하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부모, 곧 좋은 자아라는 이름으로 저 지평선 끝까지의 모든 왕국을 자기가 잘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이 자기를 열등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애초에 영토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착각하고 있는 자아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직하게 구분하기보다는, 무작정 말을 막으려고만 합니다. 영토에 대한 어떠한 말이든간에, 똑바로 못하고 있는 자기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영토의 재설정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왕국을 똑바로 경영하지 못한 자기의 실패를 인정하라는 이야기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아는 고집스러워집니다.


귀를 막고 불통이 됩니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라는 대의를 세우고, 책임감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뒤, 귀를 막고 "나는 좋은 부모야, 나는 좋은 자아야, 나는 해결할 수 있어, 내가 해결할 수 있어."만을 반복할 뿐입니다.


그렇게 계속 자아는 자기가 나인 것처럼 나의 자리에 대신 앉아, 소위 나의 문제라는 것을 끝없이 해결하고자 하게 됩니다. 아예 나라고 하는 것 자체를 문제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를 통해, 나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내적으로 '책임감으로 가득한' 자아에게 속박되는 현실은, 외적으로 '책임감 가득한' 부모에게 속박되는 현실과 정확하게 동일합니다. 그것은 동일한 독재의 현실입니다.


독재의 현실에서는 늘 죽음이 발생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의 독재에 의한 타살이 발생합니다.


자아가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가 죽이는 것, 그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자아는 자기에게 통제되지 않는 마음을, 곧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을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합니다. 마치 미숙한 부모가 자기에게 통제되지 않는 아이를 미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아는 그러한 마음이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남들이 볼 수 없게끔 꽁꽁 가두려고 합니다. 그 마음이 밖으로 표현되면, 그 마음을 통제할 수 없던 자아의 무능력함 또한 함께 노출되는 까닭입니다.


그렇게 자아는 마음의 표현인 말을 막으려고 합니다.


마음에 대한, 말에 대한 그 구속이 곧 자아가 해결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방식입니다. 마음이 표현되지 않게 하면, 곧 말이 나오지 않게 막으면, 자기가 효과적으로 마음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우리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 그것은 마음을 막는 일입니다. 마음은 그 자체가 생명인 까닭입니다.


마음은 아무리 구속하려 한다 해도, 반드시 새어 나옵니다. 끝없이 흘러 나와서 다른 이들과 연결되고자 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속성입니다. 삶의 속성입니다.


이렇듯 마음을 구속한다고 하는, 자기가 결코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미숙한 자아는 고집을 부립니다. 자기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모르는 자아는, 마음이 자기보다 더 큰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채, 자기가 마음보다 더 큰 마음의 부모와 같은 것이라고 혼자 착각하며, 어떻게든 자기의 생각대로 마음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애초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억지를 쓰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억지가 바로 마음을 죽이려는 의도입니다.


나아가 가장 큰 억지가 바로 자살이라는 형태로 표현되게 됩니다.


'책임감 가득한' 미숙한 자아는 자기 안에 마음을 결코 구속할 수 없는 현실에 끝내 직면하게 되면, 이제 자기가 마음을 가두고 있던 그 감옥을 폭파시키고자 하게 됩니다.


즉, 자아 자신이 죽으면 마음도 같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해결할 수 있다는 고집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는 자아가 최후로 "나는 할 수 있다."를 증거하려는 방식입니다. 임의대로 통제할 수 없는 자기의 소유물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잘못된 소유물'을 자기와 함께 없애는 식으로 자기가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똑바로 책임지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느끼며, 그 자식과 같이 동반자살을 택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책임감으로 가득한 부모가, 통제될 수 없는 자식을 죽음길에 함께 끌어들이려고 하는 이 일은 과연 자살일까요, 타살일까요?


이것을 타살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책임감으로 가득한 자아가, 통제될 수 없는 마음을 죽이려고 하는 이 자살이라고 하는 현상 또한 타살이라고 말해야 함이 정당합니다.


그래서 모든 자살은 타살입니다.


그것은 자아에 의한 마음의 타살입니다.


이 타살이 더욱이나 비극적인 것은, 자아와 마음의 관계는 애초에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애초에 자아가 마음을 자기의 권속처럼 보며 책임감을 주장할 수 있는 그 어떤 관계도 성립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은 자아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아는 나의 임시적인 대리물입니다. 곧, 자아는 내가 아닙니다. 나의 자리를 준비하며, 생물학적 그리고 사회적 생존을 지속시켜주는 조력의 기능물일 뿐입니다.


그리고 나는 바로 마음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마음이 바로 나를 키웁니다. 더 많은 마음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그 마음을 양분삼아 바로 내가 됩니다.


나의 진짜 부모는 그렇다면 마음인 셈입니다.


그러나 자아라고 하는, 경계를 모르고 나의 부모인 척 하는 것이, 이 마음이라고 하는 진짜 부모를 죽임으로써, 우리에게서 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강탈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미숙한 자아는 우리 모두에게서 그 기회를 거세시킵니다.


자살한 이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그 자살한 이와 동일한 상태입니다.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무력감과 자책감입니다. 과잉된 독재의 책임감으로 인한 수치심입니다. 잘못한 존재로서의 자기부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아가 "나는 할 수 있다."를 최후까지도 증명해보기 위해 선택한 자살이라고 하는 방식이 조금도 성공적이지 않았음을 증거하는 반증입니다. 자살한 이가 경험한 바로 그 마음의 상태는 결코 죽지 않고, 역으로 그 죽음에 의해 더욱 흘러나와 우리와 연결된 까닭입니다.


여기에서도 그 마음은 나를 출현시키는 양분입니다.


'할 수 없는 일' 앞에서 '할 수 없는 마음'이 알려집니다. 그리고 이 '할 수 없는 마음'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나'를 출현시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앞에 다른 이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나를 가능하게 합니다.


"제 편이 하나도 없어요. 죽을 것 같아요. 제발 저를 좀 도와주세요."


그러나 자아는 이러한 말을 가로막습니다. 남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자기의 부모로서의 능력이 의심받고 못나지게 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부모라며 남들이 비난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더욱 핵심적으로,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자아 자신의 존재가치가 사라지게 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미숙한 자아는 경계가 흐린 까닭에 자기를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가치가 사라지는 일에 더욱 큰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신인 자아 자신이 죽게 되면, 마치 그 신이 양육하던 인간도 죽게 될 것 같기에, 그러한 강박적 책임감에 의해 두려움이 커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것은 자아의 착각입니다.


자아가 죽게 되는 그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비유하자면, 작은 울타리 안에서 생존을 유지시켜주던 효과적인 하나의 수단이 그 울타리 밖의 숲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또 다른 수단을 창발적으로 탐구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자아는 잘 발달해야 합니다. 자아경계가 선명하게 잘 발달해야 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일, 이것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자아는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으로 고집을 부려야 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 지혜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정확한 경계의 끝까지 간 다음에는, 이제 지혜롭게 나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때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나에게 그 상황을 맡기고, 자신은 물러서야 합니다.


이것이 자아의 자살입니다. 바로 자아의 자기죽음입니다.


자아가 마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앞에서 자기를 죽임으로써 나를 태어나게 하는 일, 이것이 가장 건강한 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젓가락으로는 물을 마실 수 없는 명확한 경계를 확인하고, 젓가락 스스로가 빨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물러나는 단순한 일입니다. 자아는 기능인 까닭입니다.


단순하지만 멋진 일입니다.


인간이 젓가락도 쓰고 빨대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곧 인간을 돕기 위해 젓가락도 빨대도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멋진 일입니다.


그래서 가장 멋진 부모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는 신과 같은 책임감으로 가득한 부모가 아니라, 인간에게 마음의 자유를 맡길 수 있는 부모입니다. 곧, 인간의 말을 막지 않는 부모입니다.


흐르는 것은 죽지 않습니다. 말이 흐르면,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연결됩니다. 전해집니다. 그렇게 이어집니다. 할 수 없는 일 너머로 이어집니다.


자살은, 자아 자신이 할 수 없으면, 모든 것이 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일과도 같습니다. 즉, 내가 내 아이 똑바로 못키운다면, 아무도 이 아이 똑바로 키울 수 없다고 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톨스토이는 정말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집필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사람을 지킵니다. 그리고 나라고 하는 사람을 만듭니다.


자아를 굳이 비유하자면 우리 안에 있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보다 훨씬 큽니다. 부모보다 사람을 더 생각하는 것, 그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사랑은 부모의 마음, 곧 자아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우위를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독점과 우위의 주장은 오히려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도저히 행복하게 될 수 없는 나는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


이 자살이 남기는 이야기의 앞에 생략되어 있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그리고 다시 한 번 이렇습니다.


"자아의 힘으로"


자아가 어떻게 나를 부정하고 죽이게 되는가의 그 진술입니다. 즉, 자아가 조장하는 타살의 역사에 대한 그 증언입니다.


자살은 자아가 실패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자아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살자를 보며 속상해합니다.


자아의 실패를 속상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 자신이 신처럼 굴다가 그에 따라 예정된 운명으로 실패했으면서, 나까지 그 죽음으로 끌고 들어감으로써, 나를 펼치지 못하게 된 그 현실에 대해 속상해하는 것입니다.


못다 핀 꽃에 대한 그 속상함입니다.


정원사가 자신이 해고된 데에 대해, '책임감 가득한' 모습으로 정원의 꽃들을 가위로 무자비하게 난도질해놓은 모습을 보며 느끼는 그 가슴아픔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구원하겠다는 자아의 독재 아래 속절없이 떨어져버린 그 작은 꽃잎이 전하는 바로 그 눈물입니다.


"우리가 지켜주지 못했어."


여기에 대해 필요한 것은 이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자아의 말입니다. 자아만을 또 다시 강화하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나쁜 자아가 되지 말고, 누군가를 구원하는 좋은 자아가 되자는, 자아의 자기다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반성적으로 다짐함으로써, 자아가 아닌 다른 신성한 것처럼 자기를 은폐하려는 자아의 자기기만입니다.


타살된 이는 "누구도 죽지 않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세요."라고 메시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타살자의 다잉메시지는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범인은 자아다."


자살자들, 곧 자아에 의한 타살자들은 일관적으로 이 메시지를 남깁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아는 자기가 지목받으니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자기는 범인이 아닌 것처럼 또 다른 범인을 색출하는 데 모든 힘을 쏟게 합니다.


자아는 이와 같은 유능범입니다. 수사선상에서 은밀하게 잘 빠져 나갑니다. 범인인 자아가 오히려 형사가 되어 있으니, 이 완전범죄는 성립되지 않는 일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자살은 우리 안에 있는 남이 나를 죽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살은 타살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가면역장애와도 같습니다. 우리를 지켜주겠다고 우리의 안에서 우리가 되어 있는 세력이 실제의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모종의 '죽이는 힘'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기에, 그 힘이 끝내는 우리 자신을 죽이게 됩니다.


자아의 기능은 생존입니다. 생존은 원래 죽이는 힘입니다. 프로이트의 개념에서도, 좋게 말해 현실조절의 기능이지, 실제로는 남에 의해 형성된 초자아에서 분화되어 나와 그 권능으로 통제될 수 없는 원초아를 죽이려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자아입니다. 곧, 남이 내린 명령을 나의 의지로 생각하며 나를 스스로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 곧 자아입니다.


자아는 바로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통제될 수 없는 것을 죽여야만 이 개체의 생존이 더욱 담보될 수 있다고, 자아는 배운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는 바로 그러한 기계장치와도 같습니다. 통제될 수 없는 마음과, 그 마음이 만드는 내가 더는 억압할 수 없이 더욱 크게 드러나게 될라치면, 자아는 자동적으로 그 나를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토막내기 위해 작동하게 됩니다.


즉, 내가 자라남에 따라, 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자아는 자기파괴적으로 거세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이 말입니다.


"나는 살고 싶어요."


우리는 지켜주거나 지켜져야 하는, 자아나 자아의 권속물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고 싶은 존재입니다.


나로서 살고 싶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살자의 말에서, 자아가 죽이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자아는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며, 나라는 이름조차 은폐된 채 또 다시 자아를 강화시키는 자동적인 순환만을 이루게 하는 이 은밀한 연쇄타살의 작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것은,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아의 자책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잘 지켜주겠다는 더 좋은 자아를 위한 다짐이 아닙니다.


범인이 자책하며 더 좋은 범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이 악어의 눈물과 같은 일들에서, 우리가 정말로 들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결코 막을 수 없었던 말입니다. 결코 죽일 수 없었던 목소리입니다.


죽을 수 없었던 마음의 목소리입니다.


살고 싶었던 나의 외침입니다.


바로 그러한 나의 발견입니다.


그렇게 자살자가 너무나 소망했던 일인, 바로 나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자살이라는 이름의 타살의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연결되어, 우리가 이어받은 정말의 것입니다.


자살은 자아가 실패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자아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자아는 나를 가로막는 일에 반드시 실패합니다.


자살을 통해서도 자아는, 살고 싶었던 나를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전해졌고, 우리는 이어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로서 살 때, 우리는 타살된 그이와 함께 사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마지막에서조차 자아가 끝내 죽일 수 없었던, 그렇게 가장 마지막에서조차 자아를 필패시키며 최후의 승리를 거두어내었던 바로 그 나를, 바로 그이가 증명해낸 그 나의 역사를, 이제 우리의 역사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이와 우리가 함께 꿈꾸던 그 나로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경험한다는 것, 그것은 어느 타살자의 승리의 기록을 경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마음은, 마지막까지도 나를 향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가 그 성공적인 결과로서 우리에게 전하게 된 그 마음입니다. 나를 꿈꾸던 그 마음으로 살 때, 그래서 우리는 나로서 살게 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삶에 대한 전적인 모든 긍정의 시선을 묘사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살고 싶어요'입니다. "나는 살고 싶어요."는 "나는, 살고 싶어요."입니다.


오직 그 이름입니다.


자아도 이러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자아'는 '살아야만 해'입니다.


이것은 소망과 당위의 차이입니다.


이에 따라, 자아의 당위는 살 수 없는 것 앞에서는 자기가 살아야만 하니 살 수 없는 것을 죽이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소망은 살 수 없는 것 앞에서도 살 수 없는 그 모든 것과 함께 살고 싶어합니다.


그 소망으로 말미암아, 자아에게 살 수 없다고 가정되는 그 모든 것, 열등하고, 부족하고, 못난 그 모든 것으로도 나는 살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갑니다. 그렇게 자아가 할 수 없는 일을, 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 끝없는 지평선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자아에게는 자책의 이유인 것이 나에게는 자유의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삶의 마지막에서 우리가 이어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어받은 것은 삶의 소망입니다.


나라고 하는 그 살고 싶은 소망입니다.


단 1분을 살더라도, 나는 살고 싶은 나로서 살고 싶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나로서 살고 싶은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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