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존중: 남이라 말할 수 있는 자유"
사회적 동물로서 우리가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경계에 대한 존중입니다.
경계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경계를 존중하지 않으면, 경계를 존중받지 못하게 됩니다.
관계가 힘들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관계는 경계의 문제입니다. 획일적으로 융합되거나 완전히 무시되는 식으로, 경계가 모호해진 관계가 우리에게는 고통의 이유가 됩니다.
해안선이 늘 달라지듯이, 시공간적 조건에 따라 경계는 늘 변화되어 갑니다. 즉, 삶의 변화에 따라 경계 또한 변화됩니다. 그래서 경계를 존중한다고 할 때, 그것은 현재의 경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전에는 그러한 경계가 없었는데, 지금은 섭섭하게 남처럼 왜 그러냐. 옛날에 좋았던 시절대로 하자."
이것은 마치 부모가 다 큰 자식에게, 자식이 어릴 때처럼 같이 목욕하기를 종용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처럼 이미 생겨나 있는 현재의 사실적인 경계를 무시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임의적인 경계를 주장할 때, 바로 이것이 폭력이 됩니다.
아주 쉽게, 경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곧 폭력입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이 경계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정(情)'이라는 이름으로 곧잘 미화되곤 합니다. 서빙되는 라면국물에 담긴 주방이모의 손가락도 구수하다고 말하는 식입니다. 그게 또 사람 사는 멋이라고 풍류처럼 예찬되곤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워도 인간은 죽습니다.
경계를 존중하지 않는 폭력을 그 어떤 아름다운 언어로 수식하든 간에, 폭력은 인간을 죽일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합니다.
이를테면, 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북한의 경우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북한을 존중해야 합니다.
남으로서.
동포가 아닙니다. 남입니다.
북한을 남으로서 정확하게 이해해야 우리는 폭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남과의 사이에서 폭력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남이가? 다 한 식구 아이가?"라고 하는 조폭 두목의 말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정말로 속상해집니다.
더불어 "한 식구끼리 일어난 일인데 조금만 더 이해하고 참아봐야지. 설마 한 식구끼리 미워서 그랬겠나."라고 하는 가족주의와 민족주의가 낳은 착각 때문에, 이 모든 것은 무너져내립니다.
경계에 대한 존중이 만드는 가장 귀한 것, 즉 한 개인의 고유한 존엄성이, 고작해야 하나의 톱니바퀴 정도로 환원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나도 남도 없는 '하나의 우리'일 뿐이지, 남과 분명하게 변별되는 '하나의 나'가 아닙니다. 곧, '나'는 '우리'에 의해 대체가능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로 말미암아, 삶에 있어서 '이 모든 것'인 바로 '나'는 그 근본부터 부정당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폭력의 구조가 공고화됩니다.
'우리'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무수한 남들의 세계는, 대체될 수 없는 그 무수한 고유성들의 세계는 무너집니다.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입니다.
한 민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내세우는 명분을 통해 모든 것이 정당화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착각은 히틀러의 아리안 민족에 대한 착각과 동일합니다. 바로 전체주의의 착각입니다.
이 착각이 성립되어 온 역사는 뿌리 깊습니다.
가족 내에서 무상의 노동인력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힘이었던 농경사회의 문화에서, 하인들을 많이 거느리는 것이 힘이었던 양반의 문화에서, 배신하지 않고 충성을 바치는 가족같은 조직원을 많이 슬하에 두는 것이 힘이었던 조폭의 문화에서, 또 어쩌면 유사가족인 동지들을 많이 모으는 것이 힘이었던 운동권 문화에서, 이 착각은 오랜 시간 지지되어 왔습니다.
아니 어떠한 때는 이것은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어느 순간에는 효과적으로 생존을 담보시켜 준 유용한 생각이었습니다.
이 생각이 착각이 된 것은, 오늘날 이미 변화된 삶의 조건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북한과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의미체계가 다릅니다. 그러면 다른 삶이 됩니다. 같은 단군의 피가 흐른다고 고집을 부려도 다르게 살아가면 엄연한 남입니다. 똑같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피가 흐른다고 모든 인간이 한 가족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분단의 역사가 겨우 70년밖에 안되었는데 삶이 변해봤자 얼마나 변했겠는가가 아닙니다. 폭발적인 가속도로 발전해간 기술문명에 의해 문화가 완전히 달라졌고, 그에 따라 삶의 양상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주 단순한 예로, 조선왕조 500년의 시간보다 오늘날 50년의 시간 동안 생긴 변화가 훨씬 극적입니다. 즉, 현대의 50년이면 한 나라가 시작되었다가 망하기까지의 시간의 밀도에 상응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고작해야 70년이 아닙니다. 까마득한 70년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한 나라라는 이야기는 그래서 이성계가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이라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선비들이나 좋아할 이야기입니다. 사실 남북한을 하나로 보고 싶어하는 이들은 이 선비정신에 홀린 이들이 많습니다. 망국의 영토를 회복하고 싶어하는 망령의 집념에 홀린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살펴보면 이 유교주의에 근간한 선비라고 하는 이들 또한 족보가 없는 이들입니다. 고작해야 500년입니다. 때문에 이 반도가 태초부터 유교의 땅이었던 것처럼 행세하는 선비들의 모습은 사실 코미디입니다. 그것은 북아메리카 대륙이 티라노사우루스의 땅이니 티라노사우루스를 신으로 섬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곧, 늙은 조폭 두목이, 한 번 나와바리는 영원한 나와바리라고 주장하는 옹골찬 고집입니다.
경계 안의 것들이 비슷한 이유는, 혈족의 동질성이나 역사적 전통 때문이 아닙니다. 현재 공유하는 삶의 조건이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거꾸로 뒤집으면, 곧 공유하는 삶의 조건이 유사한 것이 경계 내의 가족입니다. 가족에 가까운 것입니다.
경계 내의 핵심적인 특성은 편안함입니다. 가족에게 기대되는 핵심적인 특성은 편안함입니다.
편안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하다는 것이며, 곧 살 만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살고 싶나요, 북한에서 살고 싶나요?"
사실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쪽이 우리의 경계 내 감수성과 가까운 쪽입니다.
이것은 미국과 북한 중 어느쪽이 우방이고 어느쪽이 주적인가와 같은 편가르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엄연한 남을 억지로 '우리'라고 하는 테두리에 넣어, 그렇게 실제적으로 남을 무시하는 일을 그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무시하면 나도 무시됩니다.
나는 바로 인간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남을 무시한다는 것은 곧 인간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개인으로서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곧, 인간은 '하나의 나'로서만 비로소 인간을 회복합니다.
현대를 개방한 사유인 실존주의는, 바로 이 개인을 회복하는 일이 곧 인간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것에 대한 모든 이야기입니다.
개인을 회복한다는 말은 즉 남을 회복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각각이 서로에게 다 고유한 남이라는 사실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나를 말하면서, 동시에 필연적으로 남을 말할 수밖에 없는 타자 철학입니다. 타자의 존귀함을 회복하고자 하는 갸륵한 몸짓입니다. 이 몸짓은 근대가 자행한 '우리'의 폭력과 그 폭력이 낳은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반대편에 상정되는 것은 바로 '적'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적을 계몽해서 '우리' 안으로 편입시키거나, 또는 적을 구축해서 '우리'의 순수성을 강화하고자 합니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역사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합니다. 헤겔과 마르크스가 오용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저 동일성의 폭력입니다. 후자의 결과는 물론 홀로코스트의 폭력입니다.
반면, 나는 통합하거나 제거해야 할 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적 대신에 '남'이 있습니다. 남과 이루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경계를 존중합니다. 남으로 인해 나일 수 있고, 나로 인해 남일 수 있는 그 경계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남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집니다. 그러면 나의 삶이 사라집니다. 나라고 하는 인간이 사라집니다.
'우리'라는 이름의 허깨비와 같은 망령만 남을 뿐입니다. 시공간을 착각한 채 샌프란시스코의 마천루를 배회하는 티라노사우루스와 같습니다. 황망한 일입니다.
남을 정확하게 남으로 말하는 일,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남이 남으로서 존중될 때, 그것은 '우리'에서 남이 자유롭게 되는 현실을 낳습니다. 곧, '우리(cage)'에서 풀려나 남이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이 자유롭게 될 때, 그 남에 의해서만 나일 수 있는 바로 나 또한 함께 자유로워집니다.
나와 남이 함께 '우리'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남이라 말할 수 있는 자유는, 모든 자유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현재 나의 가족을 나의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또한 현재의 경계가 변화되었을 때는, 그 전까지 나의 가족이었던 이에 대해서도 남이 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 하나의 고유한 남으로 설 수 있는 자유를 바로 독립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독립은 '우리는 한 가족이다.'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남이다.'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독립은 곧 심리적 성숙입니다. 마음의 개화입니다. 모든 꽃은 다른 것들에 대해 고유한 남일 때 그 자신으로 꽃핍니다.
우리가 추석 같은 명절에 왠지 모르게 친척들을 만나는 일이 부담되는 이유는, 우리가 바로 이러한 꽃으로 피는 일을 친척들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막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에게 익숙한 과거의 모습으로만 자꾸 우리를 거푸집에 넣어 보려 하기에, 그들이 고집하는 그 과거의 경계가 정말로 우리를 가두는 '우리(cage)'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역설입니다.
어느 순간, 우리가 그들에게 분명히 남으로 인식되기에, 친척들은 그 낯선 남을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통제해보고자 더욱더 과거의 경계를 적용하려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 대한 집착이 가열될수록,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남으로 드러나 있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이미 부정할 수 없이 드러난 남에 대해, 이를 어떻게든 '우리'로 바꿔보려는 이 의도가 말해주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산물입니다. 두렵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로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고자 그렇게 '우리'라는 이름으로 어떻게든 남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북한을 열띠게 '우리'로 말하고자 하는 이들, 그들은 사실 북한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의 자각이 바로 남을 남으로서 존중할 수 있게 되는 핵심적 기제입니다.
실제로는 두려워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두렵다는 사실이 자각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것이 곧 폭력입니다. 동네 주먹고기집의 욕쟁이 할매는, 손님들에게 비난받을 것이 두려워 먼저 욕을 하며 거칠게 손님들을 대하게 됩니다.
결국 '정(情)'이라고 하는 것이 담고 있는 실제의 의미는 두려움인 셈입니다. 두렵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다정해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만 남아 그것이 예로서 반복되고, 그 와중에 두려움이라는 실제적인 자각은 은폐될 때, 결국 형식은 폭력이 됩니다.
형식은 껍데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식만이 남을 때, 그 텅빈 껍데기는 결국 '우리(cage)'로만 작용합니다.
선비들이 형식적 예를 중요시여기며,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부자유스럽게 감옥에 가두게 된 그 이유입니다.
두려움이 분명 자유를 억압하며 인간을 죽이는 폭력을 낳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두려움의 은폐가 폭력을 낳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이 느껴질 때, 여기에 '우리'가 임의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우리(cage)'보다 더욱 크고 존귀한 남이 있다는 사실을 빨리 눈치채야 합니다.
그래야 형식의 내용이 살아납니다. 우리가 두렵기 때문에 사람들을 귀하게 대해야 한다는, 남에 대한 존중이 회복됩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남이라 말할 수 있는 자유를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나의 자유를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타자 철학에서, 타자, 남, 너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들이 갖는 실제적인 함의는 바로 이러합니다.
'가장 귀한 것.'
그래서 '남이라 말할 수 있는 자유'는 곧 '가장 귀한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유의 온당한 방향성입니다.
자유는 우리 각자가 가장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모든 몸짓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자유로 말미암아,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경계 자체가 가장 귀한 것이라는 사실이 개방됩니다. 자유는 경계를 제멋대로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가장 귀한 것으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경계가 존중되니 경계 안의 것도, 또 경계 밖의 것도 함께 존중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이처럼 경계 안의 것 또한 가장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존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은폐하기 위해, 저 경계 너머 멀리에 있는 남을 자꾸 가족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 경계 안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실제의 가족을 잘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제일 가까운 것을 소외시킬수록, 우리는 가장 멀리 있는 것을 그 가까운 것처럼 보려 하게 됩니다.
남을 가족이라 부르는 이, 그는 그래서 가족을 소외하고 있는 이입니다. 즉, 현재의 경계를 소외하고 있는 이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라는 이름 아래, 남을 소외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소외하고 있는 이입니다.
다가오는 추석은, 가족과의 경계를 이해하며, 그 경계의 안팎으로 동시에 드러나는 가장 귀한 것들에 대한 존중을 회복할 기회입니다. 그렇게 나를 귀한 것으로, 또 남을 귀한 것으로 함께 만날 기회입니다.
그것이 자유의 실현이며, 곧 경계의 존중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경계를 존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