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심리학 #28

"욕망의 이해: 하늘이 열린 날"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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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놀라운 제도입니다.


그 어느 제도도 자본주의만큼 욕망을 긍정한 제도는 없습니다. 즉, 욕망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 하나의 제도가 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될 수 있었던 역사가 없습니다.


고등종교의 핵심은 바로 이 '욕망에 대한 긍정'입니다. 특히 대표적인 고등종교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와 불교는 어떤 전통보다도 욕망을 긍정합니다. 이 두 전통이 일견 욕망을 부정하는 금욕주의적 전통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그 보급자들이 자신들의 금욕주의적 의지를 담아 이 두 전통을 제도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한 일을 펼쳤을까요?


금욕주의적 제도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수월한 까닭입니다.


욕망을 억눌러야 개인을 억누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억눌려야 집단은 더욱 잘 유지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주의적 정체성을 가져야 최대의 이득이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제도는 인간이 최대의 이득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법론입니다. 이처럼 과거에는 개인을 억누르고 집단을 살리는 금욕주의적 제도가 최대의 이득을 창출할 수 있다고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이 전제는 뒤집어졌습니다.


개인을 억누르기보다는 개인을 해방해야 최대의 이득이 창출될 수 있다는 현실로 전환되었습니다. 곧, 욕망을 긍정하는 일이 최대의 이득을 낳는다는 자본주의의 현실이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공고화되었습니다.


나이키 신발을 신고 더러운 미국의 자본주의적 욕망에 저항하는 시위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제는 발렌시아가 어글리슈즈를 신고 추악한 현대문명의 자본주의적 욕망에 저항하는 범지구적 연대에 참여합니다.


반어법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무엇을 하든 간에 상시로, 이제 더는 인간이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 없게 된, 정말로 기적같이 아름다운 현실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화상에 대한 혁명적인 변화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습니다.


"네가 왕이면, 나도 왕이야."


이는 마치 "나는 유일신이다."라고 어느 한 신이 대차게 주장하니, 이에 대해 다른 신들이 모두 웃다가 죽어버렸다는 니체의 농담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에서 왕이라고 하는 것을 욕망을 누릴 수 있는 자로 이해했을 때,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 또한 남들만큼 욕망을 누려도 되는 현실이 당연해진 것입니다. 더는 출신이나 핏줄 등에 의한 특권은 없습니다.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공정성에 대한 요청이 끝없이 생겨나는 것은, 우리가 이처럼 욕망을 긍정하는 자본주의의 전제에 이미 동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정성은, 왕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독점될 수 없이, 우리 자신 또한 왕이 될 수 있도록 그 기회가 열려있어야 한다는 투명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일을 좋아한 마르크스는 이러한 공정성에 누구보다도 섬세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지속적으로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현실이 불공정한 자본가들 때문이라고 진단하며, 자본가들의 것이 자기의 것이 되면 지속가능한 욕망의 실현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사회주의의 문을 열었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역사의 필연적인 법칙으로까지 주장했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다 왕처럼 사는 것이, 그리고 마르크스 자신이 왕처럼 사는 것이 필연적인 당위라고 말한 셈입니다. 즉, 마르크스가 한 일은 자본주의의 핵심 그대로 욕망을 긍정하는 일을 한껏 더 강조한 것입니다. 욕망의 긍정을 당위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것입니다.


그래서 제도로서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일견 대립적인 것처럼, 그럼으로써 상보적인 것처럼 작동하는 것 같지만, 그 둘은 동일하게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있는 전통들입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주의가 뭔가 고고한 정신을 담고 있는 것처럼 조금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유교와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선비의 후예들 내지 선비 워너비들이 사회주의를 채택하여, 이를 자기들이 늘 하던 방식대로 또 하나의 금욕주의적 제도로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함께 이 못남을 나누어 가지자. 그렇게 못남을 버티며 함께 살아내보자. 그 날이 올 때까지. 님이 오실 때까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단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는, 신성한 임금을 기다리는 이 기획은 지극히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유교적 사회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종말론적 기획이 됩니다. 그리고 모든 종말론적 기획은 하나의 이득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바로, 임금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동안에는, 즉 임금이 부재하고 있는 그 동안에는, 선비들이 임금을 대신하여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겉으로는 우리가 다 함께 임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외연을 취하고 있는 까닭에, 실질적으로 자기들만 왕 노릇을 하고 있는 현실은 조심스레 은폐되며, 그에 대한 비판도 자연스레 상쇄됩니다.


이처럼 종말론은 치사한 일입니다.


"진짜 왕이 오실 거야."라는 미명하에 금욕적으로 아무도 왕이 되지 못하게 한 다음, 그 종말론적 기획을 주장하는 이들만이 은밀한 왕의 이득을 누리는 일입니다.


자본주의는 이 치사한 기획의 민낯을 드러내어줍니다.


"쟤들 다 자신의 욕망으로 살고 있는 거지, 존재하지도 않는 임금을 위해, 또한 자기네들만큼 존재하고 있는 너를 위해 살고 있는 거 결코 아니다. 정신차려. 왜 쟤네만 왕이 되도록 너의 욕망을 억누르며 희생하고 있어?"


이 말을 은유적인 표현으로 다시 바꾸어보면 이러합니다.


"왜 너는 너의 하늘을 열지 않고, 너의 하늘을 닫힌 지붕으로 만드는 이들을 하늘로 섬기고 있어?"


이처럼 자본주의는 자기들만이 하늘이 되려는 이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어주는 동시에, 열린 하늘을 향한 우리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어줍니다.


욕망은 하늘을 향한 것입니다.


곧, 하늘과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은 수직운동입니다. 높이 올라가야만 또는 깊이 내려가야만 거기에서 이득이 창출됩니다.


그리고 가장 높이 올라가거나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는 이는 오직 개인으로 사는 이뿐입니다. 즉, 최대의 이득은 개인으로서만 창출 가능합니다.


하늘은 신성한 것의 비유적 표현입니다. 근본적으로 신성한 것을 향한 것이 욕망입니다. 모든 욕망은 사실 다 이 신성한 것을 향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개인이 이 신성한 것을 향할 때 창출될 수 있는 최대의 이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원입니다.


영원성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절실하게 희구하던 최대의 이득입니다.


이 영원성이 더는 집단에 의해 성취될 수 없으며, 오직 개인으로만 영원성에 다가갈 수 있다고 명확하게 경계를 그은 것이 현대의 정신입니다. 동시에 고등종교의 가장 심층적인 태도입니다.


분명하게 욕망은 영원성에 대한 단초입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욕망은 영원을 향한 욕망이다."


우리가 오늘날 자본주의라는 제도 속에서 판매하고 소비하는 그 모든 소재를 떠올려보아도 좋습니다. 크든 작든 간에, 그 모든 소재는 그것들을 제대로 영위하면 우리가 보다 영원하게 될 것처럼 간주되는 것들입니다.


욕망이 천박한 것처럼 묘사될 때 다소 자조적인 어감으로 발화되곤 하는 "잘 먹고 잘 살자."라는 표현은 그래서 "영원하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때문에 욕망에 대해 자조적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욕망이 억압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영원은 사랑의 꿈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이만이 영원을 꿈꿉니다. 영원을 지향합니다. 이 말은, 사랑할 수 있는 이만이 욕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비루하게 느끼는 이가 좋은 것들을 욕망할 때, 그것은 그처럼 비루한 자신조차도 이미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루한 자신에게 좋은 것들을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욕망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저 아픈 것일 뿐입니다.


욕망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이처럼 아플 수 있는 것이기에, 금욕주의는 생겨났습니다.


금욕주의는 욕망을 나쁜 것으로 만들어 인간이 욕망으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써, 욕망으로 인해 인간이 아파질 수 있는 현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고 하는 기획입니다. 때문에 그 의도는 사실 상냥한 기획입니다.


그러나 이 의도는 망각되고 굴절됨으로써, 금욕주의는 오히려 인간을 더 아프게 만드는 현실을 출현시켰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한 아이가 자연스럽게 다른 이성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할 때, 금욕주의는 그 아이를 놀리거나 혼냄으로써 수치심을 느끼게 만듭니다.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는 죄책감을 갖게 합니다.


그 결과, 그 아이는 자신이 더러운 욕망에 눈이 멀어서 못난 모습을 보였음을 자책하며, 다시는 이렇게 미숙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처럼 금욕주의에 합류한 아이는, 이제 다른 아이가 이성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신이 당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 모습을 놀리거나 혼내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경험한 수치심을 다른 이에게 넘기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욕망의 억압이 만든 아픔은 우리 사이에서 더욱 확산됩니다.


이것은 곧 욕망과 싸우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실제로 자신을 수치스럽게 한 것은 욕망이 아니라 금욕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욕망이 자신을 수치스럽게 한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욕망과만 씨름하는 엉뚱한 싸움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싸우는 동안, 개인의 힘은 모두 소진됩니다. 왕은 커녕 비루한 존재로밖에 스스로가 경험되지 못하게 됩니다. 그 비루함을 청렴함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기까지 하게 될 때, 개인은 최대의 이득은 커녕 최대의 손실을 향해서만 가열차게 달려가게 됩니다.


최대의 손실, 그것은 바로 하늘의 상실입니다. 그 하늘을 향할 수 있는 개인 자신의 상실입니다. 금욕주의를 하늘로 모시며 그렇게 개인은 영원성을 향한 욕망의 날개짓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금욕주의가 어떻게 하늘을 대신한 기만적 하늘로서의 우상이 되는가의 그 묘사입니다.


욕망을 억누르는 행위가 바람직한 미덕인 것처럼 사회문화적으로 예찬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이 금욕주의라는 우상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마치 욕망을 개인에게 허용하면 큰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초자아라는 욕망통제의 장치를 보급한 프로이트처럼, 자신들이 하늘의 대행자로서 행세하며 욕망을 제약하는 법칙들을 만들어내어 이를 보급한 선비들처럼, 금욕주의의 세력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열렬하게 욕망을 억압하려는 위력을 떨쳐왔습니다.


이처럼 욕망을 억압하려는 금욕주의의 세기는, 금욕주의로 인해 경험된 수치심의 세기와 정확하게 비례합니다.


이 말은, 금욕주의의 강한 억압 때문에, 오히려 욕망이 통제될 수 없는 파괴적인 힘처럼 우리에게 착각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욕망의 모습은 바로 금욕주의에 의해 굴절된 욕망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욕망을 문제처럼 만들고, 그 욕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것이 금욕주의입니다.


그러나 욕망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이, 욕망은 하늘을 향한 수직운동입니다.


꽃이 위로는 줄기를 뻗고, 아래로는 뿌리를 뻗는 수직운동입니다.


그렇게 꽃이 꽃으로 피어나는 수직운동입니다.


즉, 욕망은 그저 인간이 인간으로 무르익는 그 모든 작용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스스로 잘 무르익은 그 모든 과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에게서 나오는 정직한 목소리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증거해줍니다.


"나도 멋진 집에 살고, 멋진 물건들을 갖고, 멋진 이성이랑 함께 살면 안되냐? 나도 좀 그러면 안되냐?"


이것은 인간의 가슴이 아파서 나오는 외침입니다.


자신도 인간이면 안되냐는 그 외침입니다.


그래서 욕망은 인간의 회복과 자기확인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면 자연스럽게 소망하게 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자신 또한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음을 알고 싶어하는 그 의도가 바로 욕망입니다.


즉, 인간이 더 풍요롭게 인간일 수 있는 현실을 향한 의도가 욕망입니다.


때문에 욕망을 부정당한 경험은 곧 인간을 부정당한 경험입니다.


금욕주의가 바로 이처럼 인간을 부정합니다. 인간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역으로 인간을 가장 아프게 합니다.


금욕주의가 만드는 수치심은 존재로부터 가장 먼 것입니다. 수치심은 자신이 존재하면 안될 것 같이 느끼는 것입니다. 잘못된 존재로 스스로를 느끼는 것입니다. 곧, 존재가 부정되는 느낌이 수치심입니다.


욕망이 부정되었을 때 우리가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존재가 부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우리를 더 존재하게 하고, 수치심은 우리를 더 존재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욕망과 수치심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더 존재하게 하려는 욕망이, 나아가서는 영원히 존재하게 하려는 욕망이 수치심의 이유가 아니라, 우리를 더 존재하지 못하게 하려는 금욕주의가, 나아가서는 아예 존재하지 못하게 하려는 금욕주의가 수치심의 이유라는 것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섬세한 이해는 바로, 우리의 수치심도 실은 우리가 더 존재하게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치심은 아픔입니다. 욕망이 부정된 아픔입니다. 인간이 부정된 아픔입니다.


아플 때 우리는 그 아픔만큼 자신을 실감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실감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감을 경험합니다.


이 말은, 욕망이 부정되거나,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은 아픔으로도, 우리는 더 존재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금욕주의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기획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정될 수 없이 대체불가능한 개인으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현실을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욕망은 그것이 실현되는 방식으로서도 우리 자신을 더욱 존재하게 하고, 그것이 좌절되는 방식으로서도 우리 자신을 더욱 존재하게 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우리를 더욱 존재하게 합니다.


조건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더욱 존재하게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욕망은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기쁨으로도, 또 아픔으로도, 성숙해집니다. 사랑은 인간을 모든 것을 통해 성숙시킵니다. 무르익게 합니다.


곧, 욕망은 인간을 무르익게 합니다. 멋있게 만듭니다.


누릴 수 있는 기쁨으로 화사해지게 하고, 누릴 수 없는 아픔으로 다정해지게 합니다.


우리 자신의 기쁨에는 화사해질 수 있고, 우리 자신의 아픔에는 다정해질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하는 것, 그것이 곧 욕망입니다. 그렇게 그 모든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욕망입니다.


그래서 비유하건대, 욕망에 대해서 이렇게도 말해집니다.


"모든 욕망은 하나님의 욕망이다."


모든 욕망은, 우리 자신을 위한, 곧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욕망입니다. 이것이 욕망의 원상입니다.


때문에 진실로 욕망은 수직운동입니다.


그것은 개인이 하늘을 향하며, 동시에 하늘도 그 개인을 향하는 수직운동입니다.


개인과 하늘이 서로를 향한 만남을 이루는 이 순간을 곧 영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욕망은 영원으로의 직행통로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정말로 놀라운 제도입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개인이 가진 모든 것을 팔 수 있다.'입니다.


판매될 수 있는 모든 것에는 가치가 매겨집니다. 가치라고 하는 것은 그 가치 이상도 될 수 없고, 그 가치 이하도 될 수 없도록 정확하게 규정된 것입니다. 곧, 한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치가 매겨진 것은 그 자체로 유한한 것입니다. 우리가 팔 수 있는 모든 것은 유한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팔릴 수 있는 것임을, 곧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유한한 것임을, 자본주의는 만천하에 알리는 제도입니다. 더는 부정할 수 없도록 이 모든 것의 유한성을 드러내는 제도입니다.


더 희소하게 한정된 것일수록, 곧 더 유한한 것일수록 자본주의에서는 높은 가치가 매겨집니다. 더 잘 팔리는 상품이 됩니다. 즉, 우리가 귀한 소유물로 생각했던 것일수록, 더 유한한 것이며, 더 상품인 것입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팔 수 없는 것'이라고 신주단지처럼 우리가 모셔온 그 모든 우상을 기각하고 해체합니다.


신, 깨달음, 정의, 역사적 사명, 가족의 전통 등과 같이, 결코 상품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조차 사실은 다 팔릴 수 있는 상품임을 자본주의는 끝없이 노출해갑니다. 그렇게 우리가 절대적인 그 무엇이라고 믿어왔던 것에 대해 자본주의는 정확하게 가격을 매기며, "그거 한 100조 주면 팔거지?"라며 우리를 뒤흔듭니다.


통쾌합니다.


우상들이 무너지는 순간은 이처럼 통쾌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저당잡혀 그 앞에서 벌벌 떨던 그 '진리의 것'이 고작해야 100조밖에 안되는 것이었다니, 그렇게 100조만큼 더욱 유한한 것이었다니,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자본주의는 애초 '진리의 것'을 지향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의 것이 다 유한한 것임을 지향하는 제도입니다. 그 모든 진리의 것이 원래 다 상품에 불과한 것임을 정직하게 노출하는 제도입니다. 그렇게 진리의 것의 우상으로서의 지위를 폭로하고, 그 모든 우상의 자리를 해체하는 제도입니다.


팔릴 수 있는 모든 것은 우상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우상이 아니라고 고집을 부려보아도, 실제로 오늘날 유튜브에서, 인스타그램에서, 개인미디어에서 팔리고 있는 모든 것은 우상입니다. 신, 깨달음, 정의, 역사적 사명, 가족의 전통 등은 우상입니다. 상품화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는 우상입니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최대의 이득은,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다 유한한 것이었음을 드러냄으로써, 영원성을 향해 인간의 시선이 정향될 수 있도록 해준 것입니다.


'개인이 가진 모든 것을 팔 수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팔 수 없는 것은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팔 수 없다는 것은, 가격이 매겨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조건이 매겨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매매의 행위는 조건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팔 수 없는 것은 이 조건거래에서 벗어납니다. 무조건성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모든 조건에서 벗어나기에 우리가 결코 팔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가 결코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며 재산처럼 가지고 있던 그 모든 것, 이를테면 '정의로운 나' '아름다운 나' '똑똑한 나' 등과 같은 그 모든 것은 사실 다 팔릴 수 있는 상품이었음을 사유재산제에 입각한 자본주의는 입증해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들을 나라고 간주했던 생각이 착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나를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던 생각이 착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그것들을 나라고 하는 소유물, 곧 신주단지와 같은 우상으로 모셔왔던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가진 것들을 다 돌이켜볼 수 있습니다. 팔 수 없는 것들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팔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팔 수 있는 것들은 내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나를 가지지 못했다는 정직한 사실에 조우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가지지도 못했기에, 나를 팔 수도 없습니다.


팔 수 없는 나에게는 가치가 없습니다. 나는 한정된 가치를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무한합니다.


팔 수 없는 나에게는 가격이 숫자로 매겨질 수 없습니다. 나는 미지수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미지의 정확한 이름인 신비입니다.


팔 수 없는 나에게는 상품성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도 구매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유롭습니다.


무한한 신비로 자유로운 존재, 이것이 나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그것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입니다.


하늘과 개인의 만남이 가리키는, 그 모든 수직운동이 가리키는, 그 모든 욕망이 가리키는 영원의 이름, 바로 나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욕망은 나를 향한 욕망이다."


모두가 고대하던 진짜 왕이 오셨습니다.


하늘과 개인이 만나, 하늘이 개인이 되어 가장 무르익은 인간이 나로서 출현했습니다.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유한한 것임을 알리는 자본주의가 그렇게 우상들의 자리를 모두 붕괴시킨 그 터전 위에, 그렇게 예비된 그 대지의 자리에 내가 섭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인간의 향기를 흩날리며, 나라는 인간이 그 하늘 아래 가득 섭니다.


하늘이 열린 날입니다.


욕망이 긍정된 날은, 하늘이 열린 날입니다.


인간이 나를 찾아, 하늘처럼 웃고 있는 날입니다. 나를 닮은 하늘이 웃고 있는 날입니다.


날 보며 웃고 있는 날,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긍정하는 영원의 모습인 까닭입니다.


이미 나이기에 가질 수 없는 바로 그 영원의 모습인 까닭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열린 하늘로 영원히 웃고 있는 나를 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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