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의 아이(海獣の子供, 2019)

마음의 아이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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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원작자인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다른 작품인 『마녀』에서는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하늘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이가 '하늘은 파랗다.'라고 말하는 건, 말은 틀리지 않지만 거짓말이에요."


여기에는 선(禪)적인 풍모가 담겨 있다. 삶과 불일치하는 말은 전적으로 무용하다는 자각이다.


말이 삶을 앞서 나가게 된 것, 나아가서는 말이 삶을 대신하게 된 것, 그럼으로써 자신이 하는 말을 자신이 사는 삶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 이것이 우리의 모든 고통의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선언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하는 표현은, 바로 이 말과 삶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발화된 것이다. 그것은 이러하다.


"삶은 말에 앞선다."


반드시 그러하다. 왜냐하면 삶은 언제나 나의 삶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누군가가 삶을 묘사하는 말을 발화했다 하더라도, 그 말이 우리에게 있어 우리 자신의 삶을 앞서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야만 그 말은 비로소 우리 자신의 것이 된다. 삶이 앞서고, 말이 그 삶을 증거하는 형태로, 둘은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삶은 애초 말에 앞서는 전적인 체험의 영역이다. 『마녀』에서는 삶의 이 핵심적인 특성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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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적 전통에서 깨달은 이들이, 즉 궁극적인 것을 체험한 이들이 한 목소리로 하게 되는 말이다.


여기에서 '확인'이라고 하는 표현은 중요하다. 확인은 확신이 아니다. 확인은 삶의 언어고, 확신은 앎의 언어다. 즉, 확신은 그것이 그렇다고 아는 말을 맹신하는 것이며, 확인은 직접 자신이 그 길을 걸어 그것이 정말로 그러함(suchness)을 사실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확인의 다른 이름은 바로 발견이다.


뉴턴은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으며, 동시에 확인한 것이다. 중력이라고 하는 힘이 정말로 작용하고 있는 사실임을 스스로의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체험해서 확인한 사실은, 단지 말로 아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범주에서 작동하게 된다.


감동이 넘친다.


사실을 체험한 만큼, 그것을 체험한 자신의 몸 또한 무엇보다 사실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리얼한 진짜로 느껴진다. 정말로 살아 있다는 실감이 몸을 가득 채우며, 세계로 흘러 넘친다. 지금 숨쉬고 있는 자신이, 자신에게 보이는 이 모든 것이 감동으로 벅차게 된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로 잘 알려진 뱀파이어 연대기의 작가인 앤 라이스는, 다시 종교적 삶을 찾은 뒤 집필하게 된 『어린 예수』라는 작품에서 예수의 입을 빌려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느끼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또한 스즈키 선사는 선불교에 대해 가장 짧은 요약을 이룬다.


"선(禪)은 느낌이다."


이 모든 것은 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다.


'해수의 아이'는 이처럼 인간의 종교적 탐구의 여정을 묘사하고 있는 영화다.


그러나 말의 종교가 아니다. 바로 삶의 종교다. 보편적인 진리처럼 행세하는 말로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종교가 아니라, 느낌의 체험을 통해 개인이 스스로의 삶을 회복하게 하는 종교다.


여기에서 체험의 소재는 분명하다.


앞서 인용된 『마녀』의 장면에서는 그것을 세계의 확인이라고 말한다. 곧, 우리의 몸으로 세계를 체험해가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신체성이라는 말로 분명 이러한 체험의 구조를 묘사한다.


영화에서는 이 구조를 더 심화시킨다.


세계는 하늘과 바다 사이에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나와 동떨어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바로 그 하늘과 바다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나를 통해 펼쳐진 것이다. 곧, 체험할 수 있는 내가 있기에, 세계는 세계로서 존재한다.


나와 세계는 동격이다.


나는 세계다.


그리고 더 나아간다. 이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리고자 영화는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세계는, 하늘과 바다 사이는, 그리고 그 하늘과 바다 자체는 대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영화를 체험한 우리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바로 마음이다.


세계는 마음으로 채워져 있다. 세계 자체가 마음이다.


우리가 세계를 체험한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은, 바다 속의 물고기가 자기를 둘러싸 가득 채워진 물을 느끼듯이, 우리를 둘러싸 가득 채워진 마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느낌으로써, 우리는 마음을 발견한다.


그 마음의 느낌은 언제나 생생하게 빛나는 것이다.


"빛나는 것들은 누군가가 발견해주기를 바라기에 빛나고 있는 거야."


세계는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며 자신을 알리고 있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곧, 세계는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며 나를 알리고 있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나는 바로 마음의 아이다.


마음이 낳아, 마음이 알리며, 마음이 빛내고 있는 마음의 아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다.


나는 하늘이다. 나는 바다다. 나는 세계다.


나는, 나를 낳은 바로 그것이다.


둘이지만 하나인 것이다.


온전한 것이다.


온전함, 그것이 나의 이름이다. 그리고 너의 이름이다.


이것이 여름방학의 탐구생활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된 것이다. 분주하게만 스쳐지나가던 뜨거운 활동이 멈추어진 마음의 쉼 속에서 비로소 우리가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모험을 마치고 일상이 다시 시작된다. 깨닫고 다시 저잣거리로 나아간다.


결코 잊을 수 없이 온 세포에 새겨진 그 생생한 느낌을 간직한 채, 이 모든 것을 다시 바라본다.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를 다시 바라본다. 나는 너를 다시 바라본다.


그렇게 둘인 하나는, 하나인 둘로 다시 돌아온다.


회복한다.


그냥 나여도 충분했던 것이고, 그냥 너여도 충분했던 것이다.


충분하게 좋았던 것이다.


그저 나인 채로, 또 그저 너인 채로, 하늘만큼, 바다만큼, 가득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가 하늘임을, 바다임을, 가장 빛나는 마음임을, 서로에게 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반짝이던 여름,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확인했다.


나를 발견했다.


눈부셨다.


너무나 만나고 싶었던 바로 그 느낌이다. 하늘만큼, 바다만큼, 가득 채워진 가슴이다.


이제, 나는 살아 있다고 말한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그렇게 스스로 걸어온 삶을 말하기 위해, 마음의 아이들은 이 세상에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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