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없는 그대에게

"파랑새야, 파랑새야"

by 깨닫는마음씨




그대여,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는가?


아직도 그대는 희망을 찾고 있는가?


그대여, 원래 이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 아침에 신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밤에 뉴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희망이라곤 찾을래야 찾을 수조차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어딘가에 파랑새가 있을 것이라는 사탕발림뿐이다. "파랑새야, 파랑새야."라는 그 어딘가를 향한 주술적 외침뿐이다.


그 어딘가는 대개 미래다. 곧, 그대가 참고 버티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부추기는 말들만 세상에 범람한다. 그리고 그 말들에 속아, 그대는 현재를 화생방 훈련처럼 흘려보내며 더욱더 암울해진다.


그렇다면 그대가 있는 바로 여기, 곧 현재에 희망이 있다는 말인가? 역시 파랑새는 우리 집에 있었단 말인가? 하며 그대는 뭔가 대단한 인생의 비밀을 눈치챈 것 같은 제스쳐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 힘들게도 찾아낸 비밀이다. 남들은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서 2만 원 정도를 내고 '지금 여기에서 살기' 등과 같이 보다 잘 정제된 언어로 더 손쉽게 얻는 비밀인데 말이다.


이것만 보아도 그대의 인생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대에게는 모든 것이 평탄하지 않고 어렵기만 하다. 남들보다 노력해도, 남들만큼은 커녕, 남들조차도 되지 못한다. 그대가 대체 어떤 것을 몰라서 이러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오체불만족의 삶이다. 그대에게 삶은 이처럼, 하루하루 때워가기에도 버겁기만 한, 그저 고통일 뿐이다. 정말로 괜히 태어났다.


그대여, 그대는 이제 포기해야 한다.


희망을 찾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 희망에 기대하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 희망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그대의 고통은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대가 희망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대의 고통은 곧 희망 때문에 그대가 그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생겨난 것이다. 희망이라는 말로, 그대가 그대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고, 다른 그대의 모습만을 추구하고 있기에 생겨난 것이다.


그대여, 이것은 이와 같다.


그대가 불행한 사고로 두 팔을 잃었을 때, 그대는 그대의 팔을 재생시켜 줄 줄기세포를 꿈꾼다. 줄기세포를 그대의 희망으로 삼는다. 언제 이 마법같은 기술이 상용화되어 그대가 기적의 수혜자가 될 수 있을까만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는 동안, 그대는 꼴도 보기 싫어진다.


사라진 그대의 두 팔이 미워진다.


미래에 희망으로 다가올 진정한 그대의 모습이 아닌, 이 '가짜의 모습'이 그대는 너무나도 혐오스럽다.


그래서 그대는 희망이 찾아올 때까지, 그대의 두 팔이 사라지기 전에 수행하던 일을 하려 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그대가 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대의 모습을 찾아줄 희망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대는 좋아하던 그림도 그리지 않게 되고, 맛있는 음식도 먹지 않게 되며, 그대가 사랑하는 것들과 체온도 나누지 않게 된다.


삶이 냉담해진다.


오직 어딘가에 있을 희망을 기다리다 타버린 하얀 재로만 남을 뿐이다.


이것이 절망이다. 전적인 희망없음이다.


그대가 희망을 찾고 있기에, 그 결과 그대는 정확하게 절망하게 된다.


그대는 정말로 이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받아들여야 한다.


희망이 없다.


그대에게 찾아올 수 있는 희망은 없다.


그런 것은 없다. 그 따위 것은 없다.


그대는 그 따위 것을 빨리 포기해야 한다.


그대여, 정말로 이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


그대 말고는.


그대 말고는, 이 세상에는 그 어떤 희망도 없다.


두 팔을 잃어서도, 좋아하는 그림을 입으로 그리고, 맛있는 음식에 입을 가까이 대어 먹으며, 그대가 사랑하는 것들에 다정하게 입맞추는 그대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희망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러한 그대의 모습을 희망으로 본다.


이 암울한 세상에, 살아서 고요하게 타오르는 희망의 등불로 본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도 어엿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를 사람들은 희망으로 본다.


그러한 그대가 있기에, 사람들은 그대처럼 다시 또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그대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가슴은 든든해진다. 그대는, 그저 있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한다.


그렇게 그대는 희망 그 자신이다.


그대가 아무리 찾아도 이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대가 희망이었던 까닭이다.


파랑새는 물론 있다. 그러나 그대의 집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비로소 자신을 찾아 이제 돌아가야 할 집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파랑새다.


그래서 그대가 있는 어디에서라도 반드시 그곳에는 파랑새가 있음을 사람들은 알아본다.


그렇게 사람들은 그대의 이름을 부른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자신의 이름을 듣고 깨어나, 다리가 없어도, 부리로 땅을 콕 찍고 일어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저 작은 날갯짓과, 그 날갯짓이 겹쳐지는 저 거대한 하늘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그대의 모습을 가슴에 새긴다.


사람들이 가끔 하늘을 보며 희망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연유다.


이 세상에 정말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대라는 희망을.


그대여, 진실로 그대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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