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하는 실존: 마음을 말되게 하라"
우리는 실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이미 우리가 놓인 시공간에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존의 의미는 그저 이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저 길가의 돌멩이처럼, 가로수처럼, 손에 든 아메리카노 종이컵처럼,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갖고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전술한 그것들은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은데, 우리에게는 문제가 많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정당하게 존재하기에는 무엇인가 결격사유를 갖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 대신에 '온전히 존재하는 것'을 꿈꿉니다. 여기에서의 온전함의 의미란 물론 '아무 문제없이'입니다. 이를 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현재 문제가 많아 보이는 우리의 모습 대신에, 더욱 정당하며 이상적인 우리 자신의 모습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상적으로 꿈꾸어지는 우리의 모습은 문제를 없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내포해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아무 문제없이' 온전할 수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온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곧 '문제해결사'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게 됩니다. 요다나 간달프와 같은 전능한 마법사의 캐릭터들이 온전함의 상징처럼 보이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해결사로서 존재하려는 길이 실제로 만들게 되는 현실은 곧 인형의 현실입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현재의 우리 자신은 문제가 많습니다. 즉, 문제가 많다는 것은 현재의 우리 자신의 핵심적인 속성입니다. 그리고 문제해결사는 바로 그 문제를 없애려고 합니다. 이는 곧, 문제해결사는 현재의 우리 자신을 없애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문제해결사로 말미암아, 현재의 우리 자신일 수 있는 특성이 부정되어 남겨진 것, 그것이 바로 인형입니다. 형상은 있지만 그 핵심이 빠진, 은유하자면 혼이 빠진 외형뿐인 존재가 바로 인형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실존을 실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해결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더욱 부정하려고 할 때, 그 결과로 우리는 인형이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바로 소외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인형이 된 것,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잃게 된 것, 이것이 자기소외입니다. 현대에 만연한 증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상실한 자기라고 하는 것을 찾아 끝없이 헤맵니다. 텅 빈 자기의 자리에 무엇이든 집어넣어보려고 합니다. SNS를 하고, 몸을 다듬고, 인문학 서적을 읽고, 정치에 참여하고, 수제에일을 만드는 등, 그럴듯한 자기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창조해보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모습이 문제해결사의 모습입니다.
이른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내어 그것을 해법으로 제시하며, 인간을 끝없는 문제풀이의 과정 속에 도취되게 하는 일이 문제해결사가 이루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가장 정직하게는 "큰 문제로 작은 문제를 잊어보자."가 문제해결사의 정확한 슬로건입니다. 표현 그대로, 문제와 그 문제의 망각만 있지, 결코 답은 없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그래서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자신만큼이나 깨어있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멋진 동료들과, 감각적이고 문화적인 플랫폼 공간에서, 미래를 만들어갈 반짝이는 활동을 함께 나누며, 그렇게 서로가 참 아름답게 살아 있다는 감동과 같은 것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밤에, 불현듯 찾아온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공허감 속에서 창 밖으로 몸을 던지게 되는 일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문제해결사로 경험했던 현실이 아름다웠던만큼, 거기에 답이 없다는 사실은 더 비극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이는 마치, 근사한 아바타의 인형옷을 입고서 동료들과 대장정의 퀘스트를 완수한 뒤 기분좋게 전원을 끈 모니터에서, 그 까만 화면에 비친 초라한 자신의 방과 쓸쓸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순간과도 같습니다.
결국 문제해결사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아무리 유능한 문제해결사라 할지라도, 부단하게 망각과 소외의 작업을 이룬 뒤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면모에게로 복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 많이 아픕니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입을 틀어 막고 눈물을 삼킵니다.
그 결과, 가슴이 더 아파집니다.
아픔을 더 깊게 틀어막은 이는 배도 아파집니다.
총체적인 아픔입니다.
존재의 아픔입니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일이 부정되었던 크기만큼의 인간의 아픔입니다.
이처럼, 아픔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인간을 자각합니다. 우리가 인형이 아니라 인간임을 자각합니다.
아픔의 기능은 자각입니다. 곧, 스스로에게로 방향성을 돌려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아프니까 실존이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프고 싶지 않으니까 실존이다."라는 말입니다.
모든 아픔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소외가 있습니다. 소외는 환원되어 부분이 된 것입니다. 즉, 전체를 잃은 것입니다. 때문에 온전성이 상실된 것, 그것이 소외입니다. 그 온전성의 상실을 알리는 증상이 아픔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프고 싶지 않다는 것은, 우리는 온전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온전성을 상실한 것이 실존이 아닙니다. 소외되고 싶지 않고, 온전하고 싶어하는 것이 실존입니다.
이는 곧, 현재의 자신이 곧 온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실존이라는 말입니다. 온전성을 상실한 현재의 우리의 모습과 어딘가에서 온전해진 다른 우리의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 모습의 온전성을 회복하고 싶어하는 것이 곧 실존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요?
그토록 문제가 많게 경험된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 온전해지는 일은 가능한 것일까요?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그 답은 바로 마음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문제로 경험하고 있는 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돈이 없는 누군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모든 경제적 조건이 우리보다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그 누군가는 아무런 경제적 문제를 경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가 눈치채야 할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문제로 경험하는 그 소재는 결코 외부의 소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전술한 예에서 문제는 돈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로 경험되는 그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이를테면, 돈이 없어서 불안한 마음입니다.
말하자면, 돈이 없을 때 누군가는 불안감을 문제처럼 크게 경험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 불안감을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경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돈이 없다는 사실을, 돈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그로 인해 생겨나는 불안감을 문제로 경험하지 않는 이는 어떠한 이일까요?
돈이 없어도 자신의 존재가 귀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이입니다.
곧, 자신의 귀함이 돈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이입니다.
불안이란 존재의 흔들림입니다.
존재가 흔들리는 이유는 군더더기를 떨구어내기 위함입니다. 곧, 불안은 쭉정이를 거르기 위한 존재의 키질입니다.
그래서 껍데기만 있는 쭉정이와 같이 인형으로 살아가는 이일수록 불안감은 더 크게 경험됩니다.
인형은 텅 빈 자기의 안에 자기를 대신 움직일 명령어들을 채워 넣습니다. 명령어는 당위명제입니다. 이를테면, 이러한 당위명제가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귀해질 수 없다."
바로 이 명령어에 따른 인형처럼 우리가 살아갈 때, 돈이 없는 현실은 우리에게 커다란 불안감을 야기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묘사하자면 이렇습니다.
명령어에 따라 자기를 인형으로 소외시켜 자기의 존재감을 축소시킨 이에 대해, 존재는 스스로 작용해 그 소외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형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키질을 시작합니다. 불안감을 야기시킵니다. 이 불안감은 곧 존재가 명령어를 따라 인형처럼 살던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정말로 그래?"
정말로 우리가 돈이 없으면 귀해질 수 없는지를, 존재는 불안을 통해 우리에게 묻습니다. 세차게 키질을 해댑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저주처럼 작동하고 있는 그 모든 명령어를 날려버리고, 명령어에 따르지 않는 우리 자신의 정직한 대답을 촉구합니다.
꺼진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아픔으로 경험하는 이는, 실제의 자신이 게임 속 멋진 아바타의 모습이 아님을 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왜 현재 자신의 모습으로는 사랑받을 수 없을까를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는 현재 자신의 모습으로 사랑받고 싶다고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소망이, 존재가 불안을 통해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대답입니다.
우리 자신을 제약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우리가 어떠한 것을 소망하는지를 존재는 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렇게 존재는 스스로를 가장 자유로운 온전성의 모습으로 회복하려고 합니다.
마음이 바로 이 존재가 묻고 있는 물음입니다.
마음 자체가 이처럼 물음입니다.
마음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대답해야 할 물음입니다.
대답됨으로써 우리에게 온전성을 회복시켜주는 바로 그 물음입니다.
우리는 돈이 없어 불안했던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으면 귀하게 존재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아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픔으로 말미암아 존재 스스로가 일어선 것입니다. 불안이라는 마음의 작용으로 우리에게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정말로 존재하지도 못할 만큼, 그 정도로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이 비루한 존재인지를 우리에게 크게 물은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이러한 반문과도 같습니다.
"나는 그런 존재 아니거든?"
이 말대로,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나는,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에 의해 부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더 존재하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나입니다.
그것이 존재의 소망인 까닭입니다.
존재는 소망을 함축합니다. 존재는 소망 그 자체입니다. 이 존재의 소망은 언제나 이러합니다.
"지금 이 모습으로 더 존재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 이 모습이 부정되는 것을 존재는 도무지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 부정이 존재에게는 가장 큰 아픔이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금의 우리 자신의 모습과 다른 모습이 되고 싶어하는 열렬한 제스쳐를 취한다고 할지라도, 사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이 가장 이루고 싶어하는 소망은 바로 현재의 우리 자신이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일입니다. 곧, 실존하는대로 존재하는 일입니다. 실제 그대로 온전한 일입니다.
이처럼 존재가 곧 존재하고자 하는 소망인 까닭에, 돈이 없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현재의 우리 자신의 모습 또한 곧 소망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돈이 많은 다른 모습이 되고 싶다."라는 소망이 아닙니다. "지금 이 모습으로 돈이 없어도 사랑받고 싶다."라는 소망입니다. 돈이 없는 모습은, 곧 돈이 없어도 사랑받고 싶다는 소망의 현실태입니다.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습이 반드시, 스스로 귀해지고자 하는 어떠한 존재의 소망이 반영된 모습이라는 이 사실을 이해하는 일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다른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더라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을 느끼게 되며, 나아가 심지어 그 다른 모습이 되는 일은 요원해지기까지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소망이 무시되는 한 우리는 꽃을 피우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또한,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마음을 무시하지 않고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마음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 존재의 소망으로 구현되었는지를 자각시켜주는 일을 합니다.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다." 즉 "있는 그대로 온전하고 싶다."라는 존재의 소망을 우리에게 알리는 일을 합니다. 그렇게 이해된 마음은 존재의 온전성이 회복되는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인형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마음 대신에 프로그래밍된 명령어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픔을 느낍니다. 스스로의 존재의 온전성이 깨진 상태로서의 아픈 증상을 느낍니다.
이처럼 마음이 있어 우리는 우리가 소외되어 있는 상태를 진단할 수 있으며, 다시금 온전성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게 됩니다. 마음은 소외를 극복하고, 온전성을 회복하는 열쇠입니다.
마음은 즉 실존의 비밀입니다.
마음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귀함을 잃은 아픈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있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있어 우리는 우리가 아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귀한 것이 무시된 것, 그것이 아픔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기 싫어하는 이유는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울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울은 그저, 가장 귀하게 대접받아야 할 것이 가장 소홀히 방치되었던 현실을 비추어줄 뿐입니다.
가장 귀하게 대접받아야 할 것,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곧, 지금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마음은 다양한 느낌으로 이 사실을 알립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실제의 나라는 사실을 알립니다. 내 안에서 언젠가는 마법처럼 찾아질 진정한 나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있는 것은, 곧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실존뿐입니다. 이것이 세계의 전부이며, 나의 모든 것입니다. 때문에 가장 사랑받아야 할 유일한 것입니다. 마음은 이처럼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관심이 지금 이 실제의 나에게 향해야 할 필요를 전합니다.
"돈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어."
"애인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어."
"정의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어."
이러한 명령어들에 대해, 존재의 물음인 마음은 반드시 도전합니다. 거센 마음의 작용을 일으켜, 정말로 그러한지를 우리에게 되묻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러한 것들이 없는 우리의 모습으로도 우리가 사랑받을 수 있는 현실을, 실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망하고 있는지를 상기하게 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임무입니다.
이 임무가 충분히 완수되지 못할 때, 마음은 계속 활동합니다.
즉, 우리의 존재가 온전성을 회복하고 있지 못한 동안에는, 마음은 쉬지 않고 움직이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돈이나 애인, 정의 등이 없어서 우리가 안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착각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것들 없이도 가능한 우리의 온전성이 자꾸만 무시되고 부정당하고 있기에 우리는 안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심(安心)은 표현 그대로 마음이 편안한 상태입니다.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야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게 하는 이 일에 우리는 충분히 협조적일 수 있습니다.
마음은 우리의 온전성을, 바로 그 존재의 소망을 열심히 알리는 활동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쪽에서도 마음이 알리고 있는 그것을 더 잘 알려지게끔 조력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초기의 실존상담자들을 가르치며 이 조력활동을 묘사(description)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당위명제로 평가하는 일을 기각하고, 다만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가 있는 그대로 알려지도록 정직한 형상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이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말이 되게 하는 일.'
마음은 말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떠한 마음이라도 그러한 말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귀에 들린 마음의 목소리는, 우리의 입을 통해 말로 표현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목소리를 낸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 온전함을 보장하며 알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곧 우리 자신의 목소리로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승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목소리를 내는 현실은 그 자체로 나의 온전성을 알리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마음이 가장 자신의 임무를 잘 완수하게 되는 현실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존재감을 소외시키는 그 모든 명령어의 구속을 벗어나, 쭉정이와 같은 그 모든 저주를 떨구고, 우리는 이제 나를 선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로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마음은 비로소 안심하게 됩니다.
활동을 멈추고 편안해지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이 편한 현실이란, 곧 안심의 현실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현실입니다. 그렇게 소망된 존재가, 소망 그대로 더 존재하게 되는 현실입니다. 얼마든지 마음껏 존재해도 되는 현실입니다.
이 마음껏의 현실을, 마음이 자유로운 현실이라고도 말합니다.
마음이 안심할 수 있는 현실은 곧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는 현실인 셈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이 되지 않는 나의 모습이라 하더라도 자유롭게 말할 때, 마음의 자유로움은 담보됩니다.
마음이 나를 향한 정직한 말이 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우리 자신과 온전히 존재하는 우리 자신이 일치하게 됩니다.
실존은 안심 속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실존은,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없이 안심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마음이 말이 되어 안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