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이해: 다양한 상태들의 절대적 평등함"
의식(consciousness)이 무엇일까요?
아주 단순하게 그냥 '아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태가 춥다고 할 때, 그에 대해 "아, 춥다."라고 아는 일, 그것이 의식작용입니다.
이에 따라, 추운 현재의 상태가 내 안으로 들어와, 동일하게 추운 나의 상태를 만들 때, 그것을 의식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의식작용과 의식상태를 연결해서 표현하자면, '알아서 되는 일'입니다. 즉, 자동으로 자연스럽게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의식과 관련된 것을 우리가 임의적으로 하려고 할 때,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고난이 시작됩니다. 만약 우리가 숨쉬는 일을 임의적으로 우리의 통제하에 하려고 한다면 이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의식을 임의적으로 운용하려고 하는 이 고난은, 분명 우리가 의식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 첫 번째 오해는, 의식은 실체적인 것이라는 '실체성에 대한 오해'입니다.
이것은 인도철학의 형이상학적 세계관 등에 의해, 그리고 그러한 세계관을 근거로 해서 성립된 오리엔탈리즘의 표현인 영성 및 영성심리학 등에 의해 생겨난 오해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의식은 마치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실체처럼 묘사됩니다. 즉, 작용이 아닌 사물처럼 설정되며, 나아가 그것이 가장 진정한 우리 자신의 실체인 것처럼 묘사됩니다.
우리의 몸은 죽어도 영혼은 불멸한다, 라는 믿음이 있다고 할 때, 그 영혼의 다른 표현이 바로 의식입니다. 우주와 하나되어, 아니 오히려 우주 그 자체인 의식으로서 우리가 실체적으로 영원히 생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된다는, 영원에 대한 소망이 이처럼 의식이라는 개념으로 희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두 번째 오해가 출현합니다. 그것은 바로 의식에는 높은 의식과 낮은 의식이 있다고 하는 '위계에 대한 오해'입니다.
이 심신이원론의 세계관에 따라, 의식은 물질보다 우월한 것으로 설정됩니다. 곧, 높은 의식이란 물질로부터 보다 독립된 의식을 의미하게 됩니다.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물질에 갇힌 의식은 낮은 의식입니다. 의식은 이 더럽고 추한 물질로부터 벗어나서 원래 그러했던 순수한 속성을 다시 획득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이 임무는 의식의 진화, 의식의 정화, 의식의 발달 등의 이름으로 형상화됩니다. 요는 우리가 더 높은 의식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이 위계와 노력의 세계관을 그대로 구현한 결과물입니다. 영성심리학의 켄 윌버와 같은 이는 심리학적 언어를 차용해 이러한 세계관을 현대적으로 변용시켜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 핵심은 어떻든 이러합니다.
"나의 노력을 통해, 물질에 좌절하고 있는 저질스러운 나의 상태를 극복하고, 물질 없이도 살 수 있는 순수하고 영원한 나의 상태를 이룩하자!"
마치 돈이 없어서 자신을 보잘 것 없게 경험하는 이가,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며 돈으로 인한 아픔을 잊어보고자 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기획을 다시 더 단순하고 짧은 말로 요약해볼 수도 있습니다.
"집착을 내려놓아라."
이것은 자신이 더 높은 의식상태가 되기 위한 바로 그 노력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언뜻 이 말은 불교적인 뉘앙스로 우리에게 감지되지만, 정확하게 이것은 힌두교화된 불교의 목소리입니다. 오늘날 불교가 힌두교화되어 있는 현상은 만연합니다. 굳이 비밀도 아닙니다. 이러한 노력의 기제를 도입해야, 자기계발의 성취욕에 불타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장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자기계발은 실제로는 자기로부터의 도피입니다.
이를테면, 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기 위해 노력하는 이는, 실은 누구보다도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이입니다. 돈이 없어 크게 힘들어하는 이는, 누구보다도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입니다. 바로 이처럼 돈에 대해 지향되어 있는 것이 실제의 자기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를 자꾸 억압하며, 자기가 아닌 더 높은 의식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며 안간힘을 씁니다. 누구보다도 돈을 원하면서도, 그렇게 돈을 원하는 자기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한쪽편에서는 우물을 파고 있고, 다른 한쪽편에서는 그 우물을 메우는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자기분열입니다.
자기계발은 이 자기분열을 조장합니다. 분열되어 자기와 섀도우복싱을 하는 데만 모든 힘을 쓰고 있는 까닭에, 아무리 힘을 기울여도 자기가 원하는 현실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니 더욱더 효율좋은 노력의 기제를 찾아 다시 또 자원을 투자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돈을 가장 얻고 싶었던 이는, 남에게 돈을 가장 많이 벌어주게 됩니다. 자기계발의 이득은 언제나 자기계발의 저자에게만 돌아갑니다. 높은 의식상태에 대한 추구를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이득은 바로 그러한 의식론을 창작한 이에게만 돌아갑니다.
그렇게 자기 또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좌절되어, 돈을 추구하는 자기를 부정하고 대신 의식을 추구하게 된 선구자들, 곧 자기계발의 창작자들은, 이제 이 '의식을 추구하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팔아 결국 그가 원하던대로 돈을 벌게 됩니다. 그리고는 우주처럼 높은 의식상태가 되면 돈도 우주가 알아서 가져다주게 된다고, 의식론을 더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게 됩니다.
높은 의식상태에서 한다는 일이, 결국 낮은 의식상태를 더욱더 많이 끌어모으게 되는 그 일인 셈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자기가 가장 선하고자 하는 이는, 자기 주변에 더 많은 악을 끌어모아야 더욱 선한 것처럼 자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습니다. 높은 의식을 추구하는 이는, 높고 낮음이라는 상대적인 기준에 따라, 더 낮은 것처럼 보이는 상태들을 자기 주변에 더욱 끌어들여야, 자기가 높은 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정확하게 '의식의 실체성'은 붕괴합니다. 높은 의식의 실체성을 추구하는 이는, 그 추구로 인해 스스로 자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높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낮은 의식에 의존해서만이, 높은 의식인 것처럼 성립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높은 의식은 홀로 높은 의식이지 못합니다.
현상학의 주창자이자, 모든 현대심리학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준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훗설은, 정확하게 의식의 이러한 특성을 묘사합니다.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의식은 반드시 지향되는 대상을 통해서만 의식으로 출현가능합니다.
지향되는 대상이 없다면, 의식 또한 없습니다. 즉, 대상에 의존해서만이 의식은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이 없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은 결코 그러하지 못합니다. 가장 실체적이지 않은 것, 곧 무엇보다도 가장 대상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의식입니다.
물론 이러한 반론도 가능합니다.
"이 친구 뭘 모르는구만. 내가 명상 오래 했는데, 명상에서 하나하나 대상을 바라보며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다보면, 결국에는 바라보는 대상이 다 사라지고 단지 바라봄 자체만 남는, 그리고는 끝내 그 바라봄 자체도 사라지는 여여한 의식의 상태가 된다고. 그렇게 우주와 하나된 그 순수의식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이야. 쯧쯧. 명상을 해봐야 알지."
그렇지 않습니다.
외부의 현상 또는 마음을 대상으로 삼는 일을 그렇게 거듭 기각하여, 대상이 없는 높은 의식상태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는 가장 큰 대상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자기라는 대상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기라는 대상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기각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죽으면 물론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사죽음을 체험했을 때, 그때는 자기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자기가 사라진 상태는 직접적으로 경험되지 못합니다. 그 자기부재의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라진 상태는, 의식이 툭 꺼진 어둠으로만 남습니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유사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돌아온 후에야, 자기가 바로 그러한 상태를 경험했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게 됩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핵심은, 대상을 다 사라지게 한 후에 마치 영원한 것처럼 홀로 우주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듯한 그러한 자기 의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대상 없이도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의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의식은 언제나 대상에 대한 의식입니다.
이 말은 인도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가 의식에게 임의적으로 부여한 영원성이라는 속성을 자동적으로 해체시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대상은 필멸합니다. 그렇게 필멸하는 대상에게 의존해서만이 성립될 수 있는 의식이라고 하는 것 또한 당연히 필멸합니다. 당연합니다.
더 단순하게, 의식은 뇌의 작용입니다. 이 몸에서 생명이 사라지는데, 몸에 부속된 뇌가 홀로 영원하게 생존하게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허구를 더욱 이어가고자 하면 결국 공각기동대나 론머맨, 매트릭스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이 몸이라는 대상에 의존해서만이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 한정된 몸에서 벗어나 더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우주 자체와 연결됨으로써 의식 또한 무한하게 유지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공상에 따라 우리의 뇌를 들어내 우주와 광케이블로 연결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이미 그 의식은 우리의 의식이 아닙니다. 우주의 의식입니다.
의식의 지향성이라고 하는 것은, 밖에 있는 것이 지향되어 안에 있는 것이 되는 일입니다. 즉 안팎을 일치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 의식입니다. 우주와 연결되어 우주가 지향되고 있다면, 그것은 우주이지, 지금 자기가 자기라고 경험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곧, 그러한 일을 이룬다해도, 지금 이 자기의 불멸은 불가능합니다. 우주와 자기의 뇌를 연결하는 그 일 자체가 역으로 실체적인 자기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붓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적으로 자기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습니다.
이것은 더 정확하게는 실체성을 띤 그러한 자기와 같은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의식의 지향적 작용에 따라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자기가 만들어집니다. 그때그때, 추우면 추운 내가 되고, 더우면 더운 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무아적 현실에 대한 이해는 결국 '의식의 위계성' 또한 붕괴시킵니다.
좋은 나와 나쁜 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 다른 내가 있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각각 다른 나들에 대해 조금 더 친숙하고, 조금 덜 친숙한 경험의 상태가 있을 뿐입니다. 조금 더 친숙한 내 모습에 대해서는 우리는 "좋다."라고 말하고, 조금 덜 친숙한 내 모습에 대해서는 "싫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즉, 이것은 '좋고 싫음(like or dislike)'의 취향의 문제이지, '좋고 나쁨(good or bad)'의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가치가 바로 위계를 만드는 원인입니다.
그리고 가치가 생기게 된 이유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좌절 때문입니다.
돈이 없는 자기의 상태를 아픔으로 경험한 이가, 돈은 '나쁜 것'이라는 가치를 규정한 것입니다. 그에 따라 돈과 같은 물질이 아닌 것, 즉 의식과 같은 것은 자동적으로 '좋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어떠한 하나의 가치적 속성을 규정하는 언어란 그 반대편에 놓인 상대적인 속성을 상정함으로써 작동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하는 각각의 의식상태들을 좋아해도 되고, 싫어해도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싫어하는 상태를 나쁜 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여우의 신포도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은 그것을 좋아하기에 생겨난 자기기만입니다.
물질을 좋아해서(like) 생겨난 아픔에 대해, 그 물질을 나쁘다고(bad) 말하며, 그럼으로써 그 반대편에 있는 의식과 같은 것을 좋은(good) 것으로 추구하고, 그 추구의 결과로 "의식은 좋은 것이다."를 판매함으로써 결국 자기가 원래 좋아하던 물질을 얻게 되는 현실을 만드는 이 일은 정말로 지난하기 짝이 없습니다. 뱅글뱅글 돌아 꼬여 있기만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구조 속에서 우리는 어렵게 살게 됩니다. 삶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복잡한 것처럼 경험됩니다.
복잡한 것 속에는 언제나 소외가 있습니다. 역으로 우리는 어떤 것을 소외시키기 위해 복잡함을 애써 창조합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면 말이 복잡하게 많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조 속에서는 무엇이 소외되어 있을까요?
바로 싫음(dislike)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것을 싫어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싦음을 소외시킬 때, 자동적으로 우리의 아픔도 소외됩니다. 역으로, 우리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싫음을 소외시키기도 합니다.
"집착을 내려놓아라."
이러한 맥락에서 이 말은, "아픔을 참아라."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껏 이처럼 아픔을 참아왔기 때문에 불평등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아픔을 참는 일이 불평등한 현실을 만드는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아얏!"
이 원초적인 음색은 대체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 사람이 있으니 똑바로 보라는 의미입니다.
나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우리는 실체와 위계의 세계관에 따라, 우리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애써 지우려 해왔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몸과 물질의 욕망에만 끄달리는 못난 존재라고 생각하며, 이 사람을 부정하고 더 좋은 의식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점점 더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게 되는 불평등한 현실을 창조해왔습니다.
현실의 의식작용에 허구의 색채를 입히고, 그것을 실체적이고 위계적인 가치로 만들어냄으로써, 이 불평등은 심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의식작용은 사실 평등에 대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이제 다시 눈치챕니다.
의식작용은 사람이 경험하는 다양한 상태를 긍정 또 긍정하는 작용에 다름아닙니다. 이것은 호불호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이 경험하는 상태를 좋아해도 되고, 싫어해도 됩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싫어한다는 것도 그것의 존재를 분명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높은 의식이라고 하는 허구의 산물은 사람이 경험하는 다양한 상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있어서는 안된다고 끊임없이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의 의식작용은 그러한 가치에 의해 작동하지 않습니다. 비가 나쁜 것이라고 우리가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또 비에 젖은 자신이 못난 놈이라고 우리가 아무리 정죄한다고 해도, 비는 내리며 우리는 추운 비를 맞아 똑같이 추울 뿐입니다.
이 추운 자기의 상태를 좋아하는 이는 빗속에서 춤을 출 수도 있을 것이며, 추운 자기의 상태를 싫어하는 이는 따듯한 집으로 들어가 몸을 녹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전부 자기에 대한 긍정에 다름아닙니다. 이런 나로서도, 또는 저런 나로서도, 그에 알맞는 삶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맞기에 우리는 충족됩니다.
자기가 현재 느끼기에 알맞은 상자 안에 들어간 고양이가 충족감을 느끼는 모습과 같습니다.
고양이는 더 높은 상태의 상자를 찾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이아몬드와 금박으로 장식된 상자를 갖다줘도, 또는 캘리포니아의 어느 영성공동체에서 사온 의식수준이 높은 상자를 갖다줘도, 고양이는 그저 자기에게 알맞은 허름한 택배상자 속에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뿌듯한 표정으로 골골거립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다양한 자기의 모습으로,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그 어떤 상태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등은 행복을 위해 있는 언어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상태가 위계에 따라 상대적으로 우리의 행복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태가 똑같이 우리의 행복에 기여하게 되는 현실은 결국 절대적 평등의 현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의식작용을 통해 경험하는 다양한 우리 자신의 상태들은 절대적으로 평등합니다. 절대적으로 똑같이 우리의 행복에 기여합니다.
바로 이렇게, 의식작용은 다양하게 드러나는 우리의 상태가 평등하다는 것을 '아는 일'이고, 그에 따라 평등하게 '되는 일'입니다. 평등함이 '알아서 되는 일'입니다. 곧, 정말로 평등하게 '사는 일'입니다.
의식은 다만 우리의 삶을 위한 작용입니다. 삶을 위한 앎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의식은 우리의 삶에 앞서거나, 우리의 삶을 떠나려는 목표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뇌가 우리 자신을 죽이려는 훌륭한 계획을 갖고 우리의 앞에서 이끄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삶을 부정하는, 더 높은 의식상태에 대한 추구는 삶에 대한 폭력에 불과합니다. 의식을 실체적이고 위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오해는,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새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게 되는 현실을 낳습니다.
이 폭력이 싫어야 합니다. 이 폭력에 대해 아프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것이 정말로 폭력이었음이 긍정되며, 그로 인해 이 폭력을 낳은 불평등의 현실이 노출됩니다. 그리고 이제 평등에 대해 정말로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평등은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기회의 평등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큰 이야기입니다.
평등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평등은 존재론적인 평등입니다.
그리고 의식작용은 안팎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상태를 일치시킴으로써, 이 존재론적인 평등을 증명합니다.
우리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평등합니다.
존재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누구는 더 많이 존재하고, 누구는 더 적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다양성은 그 잠재력의 가장 최대치로 존재합니다. 알맞게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해해도 됩니다.
우리에게 지금 경험되는 상태는, 지금 알맞은 상태의 상자입니다. 예를 들어, 화라는 상태가 경험된다면, 그 화는 우리가 들어가기에 알맞은 상태의 상자입니다. 들어가서 골골거리기에, 그렇게 행복하기에 딱 좋은 상자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의식작용에 의한 다양한 상태를 통해, 우리는 상자에서 다음 상자로 계속 이동합니다. 행복에서 다음 행복으로 계속 이동합니다. 행복한 나에서 다음 행복한 나로 계속 이동합니다. 우리는 계속 변화되어 가는 것만 같은데, 신기하게도 우리에게 알맞은 상태의 상자가 계속 출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치채게 됩니다.
의식작용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는 이 세상의 다양한 상태들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알맞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그것들에게 알맞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것들과 썩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그렇게 우리에게는 우리가 경험하는 그 모든 상태를 가질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금수저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가져도 됩니다.
의식작용을 통해 알려지는 마음은 절대적으로 평등한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이런 마음을 가지면 안돼."
마음에는 절대로 이러한 규칙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가져도 됩니다. 조건없이 전부 가져도 됩니다.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가져도 된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길을 걷다가 어떠한 대상을 보고 섹시하다는 마음이 느껴졌다면, 우리는 그 마음을 가져도 됩니다. 지금껏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조금도 섹시하지 않다고 생각해왔을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든 "나는 섹시하지 않다."의 실체성과 위계성을 뛰어넘어, 지금 알려진 그 섹시한 마음을 얼마든지 가짐으로써 우리 자신으로 삼아도 됩니다. 그렇게 섹시한 우리 자신으로 살아도 됩니다.
이와 같습니다.
의식작용이란 곧, 우리가 살고 싶은 그 모습을, 그저 우리에게 되비쳐주는 것뿐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를 아는 일이며, 그렇게 되는 일이고, 그렇게 사는 일입니다. 일치시키는 일입니다.
다양한 그 어떤 마음으로도 행복한 일, 이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입니다.
사람은 행복하라고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행복하라고, 행복에 딱 알맞는 모습으로 보내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평등한 행복을 누려도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마음에 참 잘 어울립니다.
우리는 행복에 참 잘 어울립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행복에 참 잘 어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