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움과 아름다움: 나는 너의 자유를 꿈꾼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만사가 짜증이 날까요?
자유롭고 싶은데, 자유롭지 못해서 짜증이 납니다.
우리는 정말로 다 때려치고 자유롭고 싶습니다. 간절합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여전히 때려치지 못하는 것일까요?
바로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우리 자신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을 때려치지 못합니다.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이 이야기에 대해, 이제 우리는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름다움은 순간이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결국에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사라질 것이란 의미입니다. 사라진다는 것은 흩어지는 것입니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먼지처럼 흩어집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아름다움이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하게 가장 응집되어 이루어진 하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름다움이란 흩어짐과는 반대로 가장 모인 것입니다. 산개가 아니라 수렴입니다.
이를 다시 풀어 말하자면, 아름다움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그 모든 것이 수렴된 것입니다. 흩어져 펼쳐진 그 무수한 가능성들 중 단 하나의 가능성에만 관심과 자원이 집중되어 그것이 실현된 모습입니다. 그렇게 생겨난 하나의 현실이며, 하나의 우리 자신입니다.
곧, 고유성이 바로 아름다움의 정체입니다. 개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답고 싶은 이들은 개성을 추구합니다. 자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고유한 특질들을 더욱 빛내고자 합니다.
바로 이렇게, 아름답고 싶은 이들은 더욱더 하나의 현실에 수렴해들어갑니다.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어느 하나의 가능성에만 스스로 묶습니다. 그 하나의 가능성만을 위해 살겠다고 약혼(engagement)하는 것입니다. 곧, 그 하나의 가능성만이 실현될 현실에 온몸을 던져 참여(engagement)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전적인 투신의 움직임이 아름다움을 낳습니다. 이 움직임 자체가 아름다움인 까닭입니다.
무수한 가능성들을 스스로 기각하고, 그 대신에 오직 "바로 너!"라고 말하는 일은 아름다움의 원형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나, 음악가가 작곡을 할 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무수한 물감과, 무수한 곡조 중에 "바로 너!"인 것입니다.
이는 결국, 아름다움은 자유를 제한할 때 생겨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제한된 것, 곧 유한한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기독교의 비유를 활용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유한하게 창조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유한한 상태로 멀리 놓아두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육화되어 유한한 우리 자신이 되셨다고 은유적으로 이야기됩니다.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한한 것이 스스로를 유한한 것에 묶은 것입니다. 약혼한 것이며, 참여한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행위를 통해, 유한한 것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일을, 하나님과 하나인 우리 또한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제한된 개성이라고 하는 것에 우리의 전 존재를 투여해, 다른 모든 가능성을 기각하고 오직 그 하나의 가능성만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바로 그러한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잠시 잊었다는 것뿐입니다.
곧, 우리가 자유로웠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를 지금 이 하나의 가능성에 묶어 이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살 수도 있었고, 또한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지금 이 하나의 가능성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할 수도 있었다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자유롭다는 사실이 먼저 망각되니, 지금 하나의 모습으로 드러나있는 우리 자신의 아름다움 또한 쉬이 찾아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기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유에 대해 다시 한 번 기억해보겠습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이것이 자유의 원형적인 정의입니다.
"자유는 선택이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등과 같은 근대시민사회의 자유개념은 이 원형적인 자유가 윤리론의 형태로 조금 축소된 것입니다. 이것이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유의 원형을 먼저 상기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용되는 이 윤리론은 자유를 짐짓 무거운 것으로 경험되게 하며, 우리를 쉬이 죄인의 입장처럼 만들곤 합니다. "자유는 선고된 것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자유에 대한 이 두려움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 원형은 무겁고 두려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유는 다만 무한한 가능성 그 자체입니다. 자유는 곧 무한입니다.
이 무한을 영원이라는 표현으로 치환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 또한 곧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영원'에 대비되는 '순간'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무한한 가능성이 지금 여기에 드러난 하나의 현실로 아름답게 응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은 순간의 가능태고, 순간은 영원의 현실태입니다.
이 말은, 다시 한 번, 자유는 아름다움의 원인이고, 아름다움은 자유의 결과라는 의미입니다.
자유는 스스로를 제한해 아름다움을 낳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답답하게 느끼며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고 싶어서 스스로를 제한했던 그 이유 또한 망각했기에, 답답함은 더 커져갑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러고 있는지를 모르겠어서 자꾸 화만 납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싶어서,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의 자유로움 또한 함께 발견하고 싶어서 바로 이 모양 이 꼴로 이렇게 살고 있던 것입니다.
자유가 행사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비움입니다.
자유는 자기비움을 통해서만 자유로 행사됩니다.
이 자기비움의 구체적인 표현은 바로 앞서 말한 '참여'며, 다른 말로는 '결단'입니다. 이 단어들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면 그냥 '선택'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아, 지금 내 모습은 내가 선택한 거구나! 이 모습의 아름다움을 알고 싶어서 내가 선택한 거구나!"
우리에게 펼쳐진 그 모든 일에 대해, 그것이 "내 선택이었다."라고 말하는 일, 이것은 우리의 자유를 가장 본원적인 형태로 확인하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을, 그저 수동적으로 휩쓸리기만 하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자유의 행사자로서 확인하는 일입니다.
"나는 절대로 이러한 현실을 선택하지 않았어!"
우리는 분명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선택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택했다!"와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를 이미 선택하고 있습니다.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실존상담자인 빅터 프랭클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상황을 선택할 수 없을 때라도, 그 상황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만은 반드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응답(response)'의 의미입니다. 선택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이란 그래서 윤리적인 것보다 큰 것입니다. 그것은 선택한 것에 마주하여 응답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책임이란 곧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버리지 않을 상냥한 힘'입니다.
우리는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때려치지 않을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할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언제나, 언제라도,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통해, "바로 너!"라며 지금 우리 자신의 모습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시 비유하자면, 그래서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동반자인 것입니다.
스스로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지금 우리 자신이라는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 모조리 다 제한하고, 그렇게 우리 자신만을 사랑하고자, 우리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우리에게 하신 바 그대로, 우리 역시도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자유의 제한, 즉 자유의 자기비움으로써만 행사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실현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모든 것이 실현되게 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이 말은, 자유가 자유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손아귀에서 나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가 정말로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자유와 사랑의 궤적은 이렇게 형상화됩니다.
"나는 너의 자유를 꿈꾼다."
이것은 온당합니다.
비유컨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고, 우리가 그와 같이 하게 되는 일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이야기는 이러한 방식으로 화음이 됩니다.
"내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자유롭게 하라."
자신이 물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물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실현하는 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이의 자유가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게 할 때, 그때 우리는 스스로를 가장 근원적인 자유의 행사자로 확인하게 됩니다. 곧, 우리가 정말로 자유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에게서 자유가 상기된 결과, 곧 자유가 회복된 결과, 우리 자신의 아름다움 또한 함께 회복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일 속에서, 이 모든 아름다움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너무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우리의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할 것을 선택했던 그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출발한 사랑은, 동일한 모습으로 이 모든 것을 결코 버리지 않을 자유를 아름답게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버려지지 않고, 그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처한 현실 속에서 부자유하다고 느끼며 짜증만 내고 있던 쪼잔한 우리가, 실은 이 모든 것에게 거대한 자유를 선물하고 있던 제법이나 대단한 존재였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도 우리가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니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일은 숨쉬는 일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니까요.
우리는 당연하게 자유롭고, 당연하게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로움이 당연하고, 아름다움이 당연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됩니다.
우리에게는 자격이 있습니다.
너의 자유를 꿈꿀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언제라도, 언제까지라도.
그것이 영원한 최종의 자격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너의 자유를 꿈꿉니다.
Whitney Houston - Greatest Love of All
Because the greatest love of all Is happening to me
가장 거대한 사랑이 내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죠
I found the greatest love of all Inside of me
가장 거대한 사랑을 내 안에서 발견했어요
The greatest love of all Is easy to achieve
가장 거대한 사랑을 얻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Learning to love yourself It is the greatest love of all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가장 거대한 사랑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