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심리학 #22

"희생의 의미: 사랑한다면 이것만은"

by 깨닫는마음씨




사랑한다면 이것만은, 우리는 꼭 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더 잘 할수록, 사랑을 더 잘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마치 완성된 사랑의 증거처럼 삼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희생입니다.


"난 널 위해 내 일을 포기하고 이만큼 했는데, 너는 날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구나."


우리가 사랑하는 이와의 사이에서 곧잘 발화하게 되는 이러한 대사는 결국 희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상대를 위해 희생한 만큼 상대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지 않은 것 같을 때, 이는 결국 상대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처럼 여겨집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마치 순교자처럼 자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상대가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우리 자신만은 사랑을 배신하지 않고 상대에게 더욱 충실하고자 다짐합니다. 시무룩한 얼굴로, 그래도 자신은 이 사랑을 지켜나겠다며 슬프게 고개를 돌립니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상대에게 죄책감을 선사합니다. 마치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를 대하듯이, 상대를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사랑에 헌신한 순교자이며, 상대는 사랑을 배신한 배덕자입니다. 그렇게 상대의 부덕에 대비되어 우리 자신은 빛납니다.


물론 상대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난 널 위해 내 일을 포기하고 이만큼 했는데, 너는 날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구나."


이 대사는 사실 상대쪽에서도 똑같이 우리에게 발화하고 싶은 대사입니다.


그러나 상대가 우리에게 졌습니다. 우리가 더 먼저 불쌍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기쁨과 행복의 우주에서 떠밀려 어디 차가운 블랙홀 끝으로 유배당한 듯한 표정으로, 그러나 여전히 가슴 속에는 "그래도 널 영원히 사랑할거야."라는 불멸의 의지를 담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상대에게 먼저 선수를 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는 복수를 결심합니다.


우리를 위해 가장 비참하게 희생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상대는 준비합니다.


사랑할 능력이 없는 자에서, 가장 크게 사랑할 수 있는 유능한 능력을 가진 자로 다시 회복하기 위해, 상대는 가장 큰 희생을 준비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먼저 차지한 사랑의 순교자의 자리를 우리로부터 빼앗기 위해 상대는 이를 악물고 때를 기다립니다.


이러한 구도가 만약 아이가 있는 배우자들 사이에서 펼쳐졌다면, 아이는 이제 지옥입니다. 양쪽의 배우자가 앞다투어 누가 더 아이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가를 겨루며, 그만큼 아이에게 '나 때문에 부모님들이 힘들어졌어.'라는 더욱 큰 죄책감을 거듭 제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요?


희생.


사랑한다면 이것만은, 우리가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희생할 때, 우리는 반드시 상대 또한 희생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모두를 희생시키게 됩니다.


희생이 키우는 것은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희생이 키우는 것은 단 하나, 바로 '희생하는 현실'입니다.


희생은 결코 자기 혼자의 희생이 아닙니다. 희생이 발생하면 반드시 모두가 희생하게 되는 현실이 출현합니다.


'나 하나 희생해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이러한 생각이 주는 고귀한 충족감 속에서 희생하는 주체는 모두의 구원을 꿈꾸지만, 이 소영웅주의가 만드는 현실은 결국 전부 희생되어서 다 같이 죽게 되는 현실입니다. 모두를 희생으로 살리려는 이가, 모두를 희생되어 죽게 만드는 셈입니다.


그래서 이 희생하는 고귀한 순교자는 지옥으로부터 모두를 구원하는 자가 결코 아니라, 오히려 모두를 지옥으로 빠트리는 자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할 때, 우리가 실제로 사랑하는 이에게 하게 되는 바로 그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연인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연인 또한 우리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현실을 만드는 일이고, 신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신 또한 우리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현실을 만드는 일이며, 정의를 위해 희생하는 일은 정의 또한 우리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현실을 만드는 일입니다.


더욱 실증적인 예는 이러합니다.


자신이 정의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정의를 위해 평생의 삶을 바친 고귀한 희생자처럼 스스로를 인식하는 이는, 그 결과 자신 때문에 정의가 희생되어 무너지는 현실을 끝내 출현시키게 됩니다. 정의의 수호자인 척 행세하는 이들이 결국에는 반드시 정의를 그의 손으로 무너뜨리게 되는 그 이유입니다.


이것이 내로남불이 작동하는 원리입니다.


자신이 행한대로, 똑같이 얻게 된다는 것을 몰라서 생기는 일입니다.


즉, 마음의 원리를 몰라서 생기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짐짓 억울한 말이 들려올 수 있습니다.


"나는 정의를 행했는데, 그렇다면 왜 내가 행한 대로 나에게 정의가 돌아오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정의를 행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정의는 추구되는 대상이었습니다. 즉, 행위가 목표로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행위는 희생입니다. 그렇게 정의라는 대상에 대해 희생이라는 행위를 행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정의라는 대상에 대해 희생을 행했으니, 역으로 자기라는 대상에 대해 정의가 희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이 목숨 바쳐 수호한다고 생각했던 정의가 자신의 발 밑에서 목숨을 거둔 것입니다.


모든 내로남불은 붓다가 연기법이라고 말한 이 상호작용의 원리를, 곧 마음이 작동하는 원리인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생겨납니다.


따라서 심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사랑하면서도, 사랑하는 이를 오히려 위협하게 됩니다.


희생을 아주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목소리와 같습니다.


"더 좋은 것을 위해 죽어라."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상대를 이처럼 더 좋은 것으로 보며 그것을 위해 죽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행위는 동시에, 상대에게도 더 좋은 것인 우리를 위해 죽으라고 종용하는 행위가 됩니다.


즉,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채, 그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하며 그렇게 합니다.


사랑한다면 이것만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한다면 이것만은 기어코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 희생을 좋은 것으로 착각하게 된 이유는, 원시시대의 주술적 의식을 사랑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즉, 인신공양과 같이, 더 큰 것을 위해 더 작은 것을 바치며, 그렇게 더 좋은 것을 위해 인간을 죽이려 하는 그 잔혹한 의도를 사랑이라는 언어로 수식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우리에게 두려움을 야기하는 자연현상을 통제하고자 우리가 제물로 바친 그 희생양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 희생양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제물이 되었다는 식으로 사랑의 서사를 창작해낸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더 개화되면서 그 죽음이 정말로 아무 의미없는 죽음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사랑의 서사는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야만의 역사는 인간의 두려움과 수치심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스톡홀름 신드롬과 같습니다. 자신을 두렵고 수치스럽게 하는 것과 동조하면, 두려움과 수치심을 더는 느끼지 않아도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렵고 수치스러운 현실을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은폐한 결과, 그 두려움과 수치심은 결국 다른 이에게 가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게 가게 됩니다.


우리의 연인이 유괴범에게 납치되었다가 구조된 다음,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에이, 자기야. 그분을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 자기는 그분 만나본 적도 없잖아. 그 사람, 그냥 서툰 사람일 뿐이야. 마음은 참 다정하지만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조금 날카로워진 것뿐이야. 세상이 그 사람 많이 오해하고 있어. 자기도 그 사람 만나보면 참 반가울 거야. 자기랑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래, 우리 그분이 억울하게 들어간 감옥에서 나오면 셋이 같이 하와이로 놀러가자."


이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얼마나 부들부들 떨릴까요. 우리의 가슴은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얼마나 가득해질까요.


바로 이와 같은 일을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게 합니다. 희생이라는 행위로 정확하게 이와 같은 일을 합니다.


자신을 고귀한 희생자처럼 두는 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할 때 가장 하지 말아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가장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사랑한다면 이것만은 해야 할 일,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만을 합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존재이자 행위입니다. 일치하는 것입니다.


일치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우리 자신과 상대를 일치시킨다는 것입니다.


그 일치되는 방향성은 바로 이것입니다.


"살아요. 죽지 말고 살아요."


사랑은 오직 이것만을 합니다. 사랑은 오직 이 부드러운 삶의 명령만을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상대에게 똑같이 다정한 이 명령만을 합니다.


즉, 사랑은 모든 희생을 종식시키는 것입니다.


사랑은 정확하게 희생의 반대말입니다.


희생은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합니다. 오직 죽기 위해서만 살아오게 된 셈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니 우리는 두렵고 수치스러워집니다. 그래서 희생의 의미는 바로 무의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을 의미롭게 합니다. 아주 작은 것조차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대를 커다란 것으로 보며 그 앞에서 우리를 더욱 작은 것으로 인식함에 따라, 그 커다란 것을 위해 죽으려는 움직임을 펼치려고 할 때, 사랑은 그 희생을 곧바로 막습니다. 그리고는 상대가 정말로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바로 그렇게,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가 우리를 바라보는 그 눈망울 속에 담긴 우리의 의미가 떠오를 때, 우리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습니다. 더욱더 살아야겠다고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가슴은, 순교자의 자기도취가 아닌, 사랑의 정겨움으로 가득찹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이 사랑만 있으면 우리는 정말로 살 수 있다는 실감이 확인됩니다.


사랑한다면 이것만은, 입니다.


사랑에게는 우리가 바로 '이것만은'의 내용입니다.


사랑한다면 우리만은, 사랑은 늘 살리려 합니다. 모두가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해도, 사랑만은 우리를 살리려 합니다. 사랑에게는 우리가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얼마든지 살아도 되는 가장 의미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 그 자체입니다.


전술하였듯이, 희생은 무의미고, 사랑은 의미입니다. 이에 따라, '결코 희생하지 않는 사랑'을 다시 표현한다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의미'입니다.


바로 이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서술입니다.


인간을 인간이 있어야 할 최후의 자리로 돌려놓는 것, 그것은 희생이 아닌 사랑입니다. 희생하지 않는 사랑이 우리를 인간으로 회복시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으로서 희생하지 않고 사랑합니다. 사랑만은 꼭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사랑한다면 사랑만은 꼭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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