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발견: 별난 빛"
청년의 날.
그런 날은 없습니다.
남에게 규정되어 성립될 수 있는 그런 청년의 날은 없습니다.
열정에 빛나는 눈동자로 열심히 감자튀김을 튀기고, 하루하루 일당을 저축해 건실하게 미래를 꿈꾸며, 그러다가도 자기보다 힘들어 보이는 할머니를 달동네 골목길에서 만나면 소리없이 소매를 걷고 뒤에서 리어카를 밀며 박카스 광고를 찍는, 그 순수한 땀의 결정체가 곧잘 청년이라고 규정됩니다.
나아가, 사회적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양초를 들고 광장으로 나가고, 선거 때마다 투표에 참여하며, 파란 옷을 입고 SNS에 인증을 남기는 모습 또한 오늘날 건강한 청년으로 규정될 조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적 규정에 따라, 자발적인 자세로 그 규정을 받아들여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청년이 되려 하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향락보다는 커다란 대의를 위해 힘쓰며, 사회의 발전이 곧 개인의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근대적 믿음 속에, 사회를 위협하는 것 같은 불의한 세력에는 자신을 헌신해서라도 언제든 맞설 수 있는 성실한 저항의 세력, 그것이 곧 바람직한 청년의 모습입니다.
대체 누가 바람직한 모습일까요?
이러한 청년상을 바라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알듯이 586세대입니다.
이 세대라는 말이 정말로 애매한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것이 단지 운동권 출신들, 그리고 특정 정당의 종사자들에게만 국한되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하나의 세대의 관점이며 또한 정조입니다. 시대정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그 어떤 전반적 뉘앙스입니다.
이 586세대는 경험의 두 축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저항이며, 하나는 향락입니다. 이 둘을 합쳐 사육제의 감수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는 과감하게 마녀사냥의 감수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녀사냥의 의식은 사악한 존재에게 저항하는 동시에, 마녀를 태우는 불길만큼이나 뜨거운 향락의 시간을 사람들에게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저항과 향락의 경험적 구조를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당연히 죽음의 공포와 삶의 쾌락이며,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나토스와 에로스입니다.
586세대는 이처럼 가장 절묘하고, 그리고 가장 진하게, 죽음의 공포와 삶의 쾌락이 어우러진 현실을 향유했습니다. 가장 밀도 있고 뜨겁게 살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저항이란 깃발 뒤에서 동시에 모든 향락을 다 누린, 즉 좋은 것은 다 누린 586세대는 이제 자신들이 기득권이 된 오늘날 내로남불을 시작합니다.
청년들에게는 저항만을 종용하고, 향락은 거세합니다.
물론 그 저항 또한 자신들에 대한 저항은 차단합니다. 자신들이 아닌, 자신들의 적을 향해 청년들의 저항의 방향성이 임의적으로 설정되도록 만든 다음, 이에 따라 자신들은 다시 한 번 청년들이 들어올리게 된 그 무거운 저항이란 깃발 뒤에서 동일한 향락을 지속하려 합니다.
지속가능한 향락, 586세대의 꿈입니다.
너무나 자극적으로 뜨거운 시절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 지속을 꿈꾸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오늘도 청년들은 열심히 땀을 흘립니다.
586세대가 소유하고 있는 집을 제값대로 정당하게 비싼 값에 사기 위해, 586세대가 운영하고 있는 업장에서 성실히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586세대의 취향으로 정해진 도덕과 규칙에 맞추어, 586세대가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이 되기 위해 SNS와 유튜브에서 열심히 재롱을 부립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586세대의 노후까지 그들의 향락이 지속될 수 있도록, 청년들은 자신의 피와 살을 바칩니다.
만약 정말로 청년들에게 저항의 현실이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은 좌에서 우로, 또는 우에서 좌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닙니다. 좌나 우나 같은 586세대입니다.
착한 586세대, 나쁜 586세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청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에너지와 자원이 그들에게 집중되어, 대한민국의 건국 이래 모든 호혜를 최상으로 제공받은, 마치 주인공과 같은 세대인 586세대가 있을 뿐입니다.
즉, 자신들이 만년 주인공이었던 까닭에, 무대의 가장 변두리에 대사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엑스트라와 같은 오늘날의 청년들의 마음을 짐작할래야 짐작할 수 없는 상태의 그러한 586세대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가장 정직한 586세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가 없다."
이것은 정직한 말입니다. 자신의 주인공 자리는 내려놓지도 않은 채, 엑스트라인 이 시대의 청년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처럼 구는 기만보다는 더 상쾌한 울림입니다.
마치 백설공주가 계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척 굴면서, '가진 사람'이라는 실리적 이득뿐 아니라 '좋은 사람'이라는 도덕적 이득까지 다 독점하려는 모습보다는 청년들을 덜 억울하게 하는 모습입니다.
독점, 이것은 바로 586세대의 키워드입니다.
자신이 손에 쥔 주인공 자리를 몇십 년째 전유한 채, 다른 이들은 주인공이 되지 못하게 하는 이 독점의 세대가 바로 586세대입니다.
그리고 이 주인공 자리를 독점하려는 주인공 의식이 586세대로 하여금 자각을 어렵게 만듭니다.
독점은 곧 독재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선한 주인공으로서 사악한 독재자인 적과 맞서 싸웠다는 과거의 경험에 의해 배양된 주인공 의식이, 586세대 자신들 또한 오늘날 동일한 독재자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의 자각을 힘들게 합니다.
설령 그렇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하더라도, 그 주인공 자리를 손에서 놓기가 어렵습니다. 늘 주인공이어야 늘 향락이 있을 수 있는 까닭입니다.
이 향락은 단지 물질적인 충족감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도덕적인 향락이야말로 586세대에게 가장 큰 충족감을 제공합니다. 즉, 자신들은 선하다는 주인공 의식에서 발로한 도덕적 충족감이, 586세대가 가장 지속하고 싶어하는 향락의 정체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586세대가 도덕적 이득을 위해 물질적 이득을 포기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독점의 세대답게, 그 둘을 다 갖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좋은 모든 것을 다 갖고자 하는 의도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좋은 모든 것을 다 갖고 싶어 합니다.
문제는 이 좋은 모든 것을 586세대만이 독점하고자 한다는 것뿐입니다. 자신들만 주인공이고자 한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듣고 싶습니다.
586세대 자신들이 바로 자신들의 향락을 지속하기 위해서, 즉 자신들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다는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만 듣고 싶습니다.
가장 자신들이 독점할 수 있는 현실을 위해 이 모든 것을 하면서, 공의의 깃발을 내걸고 마치 자신들이 모든 것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것처럼 구는 기만의 선전을 이제는 그만 듣고 싶습니다.
특히, 자신들을 위한 모든 이유에, 청년을 위해서라고 이름붙이는 이야기를 그만 듣고 싶습니다.
청년을 위해서라는 그 이야기는 결국 청년을 규정하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들을 위한 가치관대로, 자신들을 위한 현실을 만들기 위해, 그에 적합한 형태로 청년을 규정하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의 청년들이 정말로 이해가 안간다며, 586세대는 정직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청년이라는 것이 자신들에게 너무나 낯선 존재라고, 586세대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낯설다는 것은 규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렵다는 것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낯선 것으로서의 청년의 발견은, 청년을 규정불가능한 존재로, 그리고 통제불가능한 존재로 다시 보이게 합니다. 그 면모를 새롭게 드러나게 합니다.
그리고 통제불가능한 것은 대체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임의대로 조종할 수 없는 것은, 그것 스스로의 원리로 움직이는 가장 고유하고 자생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청년이 낯선 것으로서 발견될 때, 그 규정불가능성은 통제불가능성으로, 통제불가능성은 대체불가능성으로, 청년의 위상을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으로서 가장 온전하게 회복시킵니다.
넙치나 가자미처럼, 좌나 우로만 쏠려 있는 눈은, 곧 삔 눈은 이 청년의 온전성을 알아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청년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선입니다.
규정될 수 없는 오늘날의 청년을 보는 일입니다.
그럼으로써, 규정될 수 없는 지금의 이 모든 날이, 586세대의 날이 아니라, 청년들의 날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586세대 자신들의 날에 해가 지지 않도록, 청년들에게 대신 태양마차를 붙들고 있게 함으로써 그들이 화에 불타 죽게 한 그 모든 일을 멈추고, 이제 청년들의 날이 왔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586세대가 주인공 의식으로 규정하지 않을 때, 모든 날은 청년들의 날입니다. 청년이 주인공인 날들입니다.
하늘이 준 새 아침의 날들입니다.
586세대가 청년들에게 새 아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청년들에게 주는 것이 새 아침입니다.
586세대가 오늘날 하늘에게 명을 받은 것은 단 하나입니다.
이제 저무는 자신들의 날을 끝내고, 그동안 손에서 놓지 않으며 꽉 쥐고 있던 것을 다시 세상에 돌려주라는 그 명령뿐입니다.
그렇게 청년들에게 그들의 것을 돌려주라는 바로 그 명령뿐입니다.
더 좋은 방식으로 돌려준다는 미명하에,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손에 들고 있으려는 그 불통의 고집을 그만 멈추고, 586세대는 하늘의 말을 조금 더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586세대의 날이 저물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붉은 하늘빛을 이제는 그만 무시해야 합니다. 그 하늘빛이 곧 명령입니다. 청년들 귀한 줄을 알라는 명령입니다.
이제 필연적으로 다가올 밤의 어둠이 무섭지 않으려면, 586세대는 자신들이 청년들의 가슴에 드리운 그 어둠을 걷어가야 합니다. 자신들이 세운 깃발로 인해 생긴 그 그림자를 회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명확하게 해야 할 것은, 586세대가 이러한 방식으로 청년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는 청년들을 착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586세대가 주인공처럼 규정하려고 하지 않으면, 청년들은 스스로 빛납니다.
모든 자원이 집중되었던 586세대와는 달리,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아니 오히려 작은 관심마저도 족족 586세대에게 흡수될 수밖에 없던 이 불모지에서 오직 스스로의 힘만으로 홀로 자생해내고 있는 이 청년들이야말로 진짜 주인공들입니다.
자신들이 저항할 대상을 만들어, 그렇게 사악한 존재라는 적을 만들어, 그 적에 의존함으로써만이 자신들이 빛나는 척 할 수 있었던 586세대와는 달리, 이 청년들은 스스로 빛나는 진짜 주인공들입니다.
이 청년들은,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혹여 미움이 생긴다면 그저 자기 자신만을 미워하며, 그렇게 자기가 잘못한 줄로만 알며, 결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려 했던 가장 착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이 착한 이들을 위해 586세대가 해야 할 일은, 청년의 날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꽃이 피려면, 오래된 열매가 땅으로 떨어져야 합니다.
곧, 정말로 가능할 수 있는 청년의 날이란 586세대에게는 마지막의 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날에 필요한 것은 바로 겸손함입니다. 자신이 반드시 죽게 될 필멸의 존재며, 독점 가능했던 그 모든 향락은 결코 자신의 것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마지막의 날을 장례식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평생을 주인공으로 살았던 이라 할지라도, 그의 장례식만은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고인이 아니라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없는 이마저도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를 기억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장례식의 진짜 주인공들입니다.
이 장례식에 모인 이들의 모습처럼, 자신을 착취하던 586세대마저도 소중히 생각하던, 그렇게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려 하던 착한 이들이, 다시 한 번, 바로 청년들입니다.
적을 만들어 끝없이 그 적과 투쟁하려 하는 586세대가 평생을 내건 깃발의 슬로건과는 그래서 전혀 맞지 않는 것이 이 청년들입니다. 그렇게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586세대에게 맞추어서 586세대가 상정한 적을 미워하는 척 하고 있던 것이 바로 이 청년들입니다.
그러니 586세대는 이 청년들이 이처럼 자신들에게 선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청년들 앞에서 정말로 겸허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지구를 구하는 척, 자신들이 청년들의 구원자인 척 하는 주인공의 쇼를 멈추고, 이제 그만 청년들에게 무대를 내줄 때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청년들은 586세대의 자식이 아니며, 586세대는 청년들의 부모가 아닙니다.
청년들은 다만 낯선 것입니다.
586세대가 감히 규정하고, 통제하고, 또 대체할 수 없는, 아주 별개의 고유한 타자입니다.
별난 것입니다. 별에서 난 것입니다.
그렇게 별에서 온 별난 것입니다.
별에서 온 그대입니다.
가장 낯선 것입니다.
586세대에게, 낯서니까 청년입니다.
청년들의 시대를 586세대 자신들이 살았던 시절의 재연으로 만들려 하지 않을 때, 또 청년들을 약탕기에 억지로 쑤셔넣어 586세대 자신들의 재탕으로 만들려 하지 않을 때, 그때 586세대는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청년들이 스스로 자신의 날들을 빛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빛은 언제나 스스로 빛내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이제 저물어 밤의 어둠을 맞이해야 할 586세대의 가슴마저도 환하게 감싸줄 그 빛임이 분명합니다.
낯설지만 어딘가 친숙하게 따듯한 그 빛입니다.
언제인가 586세대 역시도 자신의 젊은 가슴 안에서 만난 적이 있는 그 빛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빛은 독점될 수 없습니다.
빛은 내 손에 든 촛불과의 동의어가 아닙니다.
내 손을 벗어나 더 많이 환한 가슴이 바로 빛입니다.
별에서 온 빛입니다.
별이 보낸, 사람이라는 낯선 빛입니다.
청년은 바로 이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래서 별난 빛입니다.
마지막의 날들을 새로운 날들로 바꾸기 위해, 그렇게 사람이라는 빛을 지속하기 위해, 별에서 왔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별에서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