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자유의 접점에서"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질문이다. 우리를 새로운 길로 나서게 하는 질문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를 가장 속이는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마치 우리에게 진정한 우리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고 싶다'의 범주를 벗어난다. '해야만 한다'의 영역에서 작동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고 싶다'의 감수성을 점점 잃게 된다. 그렇게 '하고 싶다'가 잃어지니 '하고 싶은 일'은 발견되기 요원해진다.
때문에 결국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하고 싶다'의 감수성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수성의 회복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목이 마른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럴 때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물 마시고 싶다."
그냥 마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물이 '마시고 싶어' 마시는 것이다. 즉, 목이 마를 때, 우리에게는 물을 마시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고 싶다'의 감수성이다.
우리의 일상은 사실 이 '하고 싶다'의 연속이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이미 '하고 싶다'의 감수성으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일을 무시하고 오히려 하찮은 일로 보며,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거대한 '하고 싶다'를 찾을 때, 곧 진정한 내 자신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을 때, 그러한 것은 결코 발견되지 않게 된다.
곧, 우리가 '하고 싶다'를 무시하고 '해야만 한다'의 감수성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될 때, 하고 싶은 일이 발견될 수 없는 것은 필연이다. 그것은 빨간 렌즈를 끼고 이 세상에서 파란색을 찾으려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찾고 싶어하는 그대로 정직하게 이 세상을 보는 일이다. '하고 싶다'를 찾고 싶다면 다른 어느 것도 아닌 '하고 싶다'를 봐야 한다. 그렇게 오직 '하고 싶다'를 연쇄시켜야 한다. 그럼으로써 '하고 싶다'가 또 다른 '하고 싶다'를 계속 끌어들이며, 우리는 하고 싶은 일에 늘, 또한 끝내 도달하게 된다.
이를테면, 우리가 아무 일도 안하고 누워 있을 때, 우리는 그냥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못 찾아서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로 누워 있는 일이 '하고 싶어' 누워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고 싶다'의 감수성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이며, 그 감수성을 통해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하고 싶다'를 더 간소하게 표현해서 소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하고 싶다'의 감수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순간 소망을 충족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좌절되는 것은 없다. 그 어떤 행위 속에서도 '하고 싶다'를 발견함으로써, 그러한 소망이 이루어진 매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이 소망의 연쇄다. 곧,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고 싶어하는 자유의 연쇄다.
'하고 싶다'는, 즉 소망은 바로 우리의 자유의 표현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는 운명이 있다. 운명은 '해야만 한다'는 당위다.
자유와 운명, 소망과 당위는, 이처럼 분명한 대조군을 이룬다.
그리고 바로 이 대조가 만들어내는 역설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니, 이미 그렇게 우리는 살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삶이 우리에게 배고픔을 알린다. 그것은 우리에게 밥을 먹으라고 하는, 즉 밥 먹는 일을 '해야만 한다'라고 하는 운명적 명령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배고픔 앞에서 밥 먹는 일을 '하고 싶다'라고 소망하게 된다. 밥을 먹는 자유를 행사하게 된다.
그렇게 양자는 만나게 된다. 그 양자의 접점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은 정말로 이루어지게 된다.
저쪽에서는 '해야만 한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쪽에서는 '하고 싶다'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운명에 응답한다는 것이다. 자유는 바로 이 운명에 대한 응답이다. 동일하게 소망 또한 당위에 대한 응답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우리는 '해야만 한다'에 대해서는 아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우리쪽에서 그 원리를 굳이 채택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쪽에서 우리에게 늘 전해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하고 싶다'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은 이러하다.
우리는 운명을 신경쓸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운명 속에 던져졌고, 운명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운명은 저쪽에서 우리에게 알아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쪽에서 우리의 자유로 다가가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러면 어느 지점에서 운명과 자유가 만나진다. 바로 그 접점이,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정말로 찾아지고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비유하자면, 밥을 먹어야만 하는 현실이 밥을 먹고 싶은 현실과 합치되는 순간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삶의 주요한 두 원리인 운명과 자유가 그대로 우리의 편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운명과 척지지 않고, 자유를 배신하지 않으며, 그 둘을 온전하게 우리를 살게 하는 힘으로 가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유와 운명을 다 갖는다.
우리가 하고 싶던 일을 하면, 우리가 해야만 했던 일로 승인된다.
이를테면,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자유롭게 선택해 결혼을 했는데, 사실은 그이가 운명적인 상대로 밝혀지게 되는 셈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삶이 가장 정당화되어 축복받게 되는 것과 같다.
곧, 우리가 웃으면, 우주도 웃는 현실이다.
이것이 정말로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일이다.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어하는 일,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사랑받는 일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우리의 자유가 운명적으로 허용되는 현실을, 우리의 소망이 당위적으로 실현되는 현실을 살아가는 일을, 우리는 정말로 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확인해볼 일이다.
우리가 다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 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입장에서 '하고 싶다'를 연쇄시켜보면 된다. 어떤 일이든 간에 '하고 싶다'의 감수성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일상에서 발견해보면 된다.
그러면 우리에게 불가피한 운명처럼 다가와 있는 우리의 이 삶을, 실은 우리가 얼마나 소망했던 것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이미 우리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며, 이 운명적 우주가 우리에게 가장 해야만 했던 일이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에게 "너는 살아야만 해."라고 말했고, 우리는 그에 대해 "나는 살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지금의 나는 바로 이 운명과 자유가 만나진 결과다.
그 둘은, 나라고 하는 이것을 가장 하고 싶어서 만남을 이루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다.
이제 찾아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