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지배자는 마음의 쾌락살인자다"
왜 우리에게서 고통이 멈추지 않는가?
그 핵심적인 이유는 감정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이 고통스러워서 그 감정을 통제하려고 하나, 그러한 통제의 의도로 인해 오히려 고통은 더 지속되는 것이다.
이처럼 감정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가속될 때 반드시 향하게 되는 방향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대상의 남용과 착취다.
이는 이러하다.
감정은 마음의 핵심이다.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곧, 자연현상이다. 때문에 감정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참는다'는 개념은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비가 스스로 내리는 일을 참고, 화산이 스스로 분출되는 일을 참는 일이 성립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감정을 참는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참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남에게 돌리는 것이다.
특히나 참는다는 것을 감정의 상태로 표현하면 단순하게 화가 났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감정을 참고 있을 때, 반드시 남에게 돌리게 되는 것은 화다.
이와 같이, 감정을 통제하려는 이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참고 근접거리에 있는 상대에게 화를 돌린다. 즉, 상대를 화나게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은 화가 나지 않고 상대만 화가 난 것 같은 그림을 만들면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대의 미숙함을 선비처럼 비웃고, 자기 자신은 마치 화라고 하는 감정의 초월적 지배자가 된 것처럼 행세한다.
즉, 이러한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감정을 없애고, 상대에 대해서는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이 감정이라고 하는 것을 임의대로 조종할 수 있는 유능한 능력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웃집에 자기 쓰레기를 계속 버리면서, 그러한 자신이 쓰레기를 효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늘 자신의 집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성숙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표현 그대로, 쓰레기로 하는 쓰레기짓이다.
이러한 쓰레기짓을 당하고 있는 이는 분명하게 남용되며 착취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하며 이 감정의 초월적 지배자를 자임하는 이에게 "쓰레기야."라고 말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다고 그가 쓰레기를 투기하는 일을 멈추지는 않는다.
겉으로는 "아, 내가 이런 쓰레기짓을 하는 줄 몰랐어. 너에게 너무 미안하다." 등과 같은 회답과 비극적인 표정연기가 돌아오겠지만, 실제 그는 내심 다른 것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쓰레기야."라고 할 때, 그가 정말로 경험하는 것은 바로 짜릿한 승리감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었다는, 즉 자신이 고통스러운 감정을 상대에게 유발하는 방식으로 상대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조종할 수 있었다는 전능감에서 비롯한 쾌락이다.
이 쾌락이 쓰레기짓을 하는 이가 얻는 최대의 이득이다. 오직 이 쾌락을 얻기 위해 그는 쓰레기짓을 쉬지 않고 수행한다.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넘긴 것이, 상대의 감정을 조종한 것이라고 착각하며, 그렇게 자신은 감정의 지배자로서 감정의 위에 서서 감정을 조종할 수 있는 것 같은 입장을 확보하여, 상대를 남용하고 착취하여 만들어낸 그 전능감에 부르르 몸을 떨며 신음하는 것이다.
조금도 과장되지 않게, 그래서 이러한 이는 정확하게 쾌락살인자다.
자신이 감정을 초월해있는, 즉 마음을 초월해있는 전능한 신인 것과 같은 쾌락을 얻기 위해, 끝없이 사람의 마음에 고통을 가하며 끝내 마음을 죽이려 하게 되는 마음의 쾌락살인자다.
이 마음의 쾌락살인자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원리는 가피학의 기제다.
모든 가피학의 기제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지배하고자 하는 시도다.
곧, 최대한 고통에 무감해지고, 나아가서는 고통을 쾌락으로까지 삼고자 하는 의도다.
고통을 쾌락으로까지 바꾸어낼 수 있는 모습, 그것이야말로 고통의 완전한 초월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람을 초월한 신의 모습이다.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분명하게 동화 속 마법처럼 신이 되고 싶어하는 이다. 물론 그것은 잔혹동화다.
이러한 신의 모습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고통스러운 감정을 경험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고통을 쾌락으로 바꾸지 않고는 자신이 받은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무시하든, 쾌락으로 바꾸려 하든 간에, 전부 다 자신의 감정을 떠넘길 다른 대상이 있어야만 성립가능한 일이다. 즉, 자기 대신에 고통받을 자를 만들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언제나 고통의 대물림을 성립시킨다.
자신이 받은 고통처럼 다른 이에게도 동일한 고통을 주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난감한 부분은, 이와 같이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을 하면서, 마음의 쾌락살인자 자신은 오히려 상대와 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마음의 쾌락살인자 자신에게는 좋은 쾌락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굴절된 기준에 따라 상대는 조금도 원하지 않는 고통을 쾌락이라고 제공하며, 상대 또한 내심은 자신이 제공한 그 고통을 좋아할 것이라고 자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 마음의 쾌락살인자의 모습이다.
당연하게 이러한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더 정확하게는 감수성이 둔감하다.
감수성은 고통을 얼마나 잘 느끼는가에 대한 섬세함의 정도를 묘사하는 성질이다.
감수성이 섬세한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잘 느끼며, 그만큼 상대의 고통도 잘 느낀다. 그래서 자신과 상대에 대한 핵심적인 이해가 생겨난다.
그러나 고통을 잘 느끼지 못하면, 고통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 우리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고통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오직 이 하나의 목소리다.
"죽지 마라."
고통은 이처럼 우리라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전한다. 결코 죽지 말고 소중하게 살려져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알린다.
그러나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고통을 봉쇄하고 심지어 그것을 쾌락으로 바꾸었기에 바로 이 고통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래서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자신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조금도 실감하지 못한다.
그렇게 자신의 귀함을 실감할 수 없기에, 타인의 귀함 또한 실감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로 타인을 도구처럼 남용하고 착취하게 된다. 함부로 대하게 된다.
이것이 마음의 쾌락살인자가 만드는 지옥이다.
이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의 쾌락살인자 자신의 쾌락을 위해 이용되어야 할 하찮은 도구일 뿐이다. 그렇게 하찮은 것에 의존해야만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자신도 하찮아진다. 이 모든 하찮은 것만을 추구하고 있으니 자괴감이 들며, 끝내는 불감증이 생겨난다. 냉담해진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단테가 묘사한 최하층의 지옥의 모습이다.
이 자리가 끝이다. 정확하게 삶의 끝이다.
결국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신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으로 끝났을 뿐이다. 극복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고통을 열렬히 쾌락으로 바꾸며, 감정에 대한, 즉 마음에 대한 전능한 지배자처럼 굴어도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결코 극복할 수 없다. 곧, 그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극복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사람의 끝에 있다.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죽음에 쉬이 노출되어 있다. 이미 삶의 끝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죽음마저도 그로 하여금 사람을 극복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마음의 쾌락살인자가 아무리 현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무딘 감수성으로 이 세상을 가상현실처럼 경험하며 살아도, 그가 죽고 난 뒤 마치 게임 하나를 클리어한 것처럼 가상현실 밖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고통을 쾌락으로 바꾸려는 방법론들에 내포된 사유는, 이 세계가 허상이고 게임이며, 진정한 세계와 진정한 자신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이러한 판타지적 세계관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마음의 쾌락살인자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망상의 반영일 뿐이다.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자기가 죽는 순간에 정말로 알게 된다. 진정한 세계나 진정한 자신과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그의 생애 동안 다른 이들에게 자기 집의 쓰레기를 투기하며 고통만을 주고 살았으면서, 자기는 그 모든 것이 게임인 양 혼자만 빠져나와 평안하게 향할 수 있는 그런 낙원은 없다는 사실을.
사람은 죽으면 그가 창조한 세계로 간다.
그의 삶 동안 스스로 창조한 그 세계로 간다.
고통만을 창조한 이가 가는 곳은 필연적으로 고통만 있는 세계일 뿐이다.
"자 우리 게임 속에서 그저 고통놀이한 거야. 가상현실인데 진짜처럼 아팠지? 그런데 아프면서도 좀 짜릿하고 즐겁지 않았냐? 다음에는 또 어떤 고통놀이를 한번 경험하러 가상현실로 들어가볼까? 일단은 한 게임 끝났으니 툭툭 털고 너와 내가 하나인 진정한 자신으로 함께 하하호호하자."
타인에게 고통만을 제공한 이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현실은 없다.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죽을 때 바로 이 사실을 깨닫는다.
자기가 가게 될 곳이 고통뿐인 세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자신의 삶 동안 고통을 쾌락으로 바꾸고, 남에게도 고통이 쾌락이라고 강요하며, 그렇게 고통을 떠넘기던 그 모든 일을 해온 진짜 이유인, 바로 고통받고 싶지 않다는 그의 유일한 소망이 완벽하게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자신이 고통받지 않으려고, 남에게 고통을 떠넘긴 이가 가게 되는 곳은 고통뿐인 곳이다. 이것은 필연이다.
그가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 심판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가 그의 평생의 삶을 통해 오직 고통뿐인 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고통을 남에게 떠넘긴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도 그가 사는 세계 속의 고통의 총량은 동일하다. 아니 마음의 쾌락살인자가 고통을 쾌락으로 찬미하여 이를 추구하는 한 고통은 오히려 늘어난다. 이처럼 고통을 확산하는 고통바이러스와도 같은 마음의 쾌락살인자로 말미암아, 세계의 고통의 총량은 현격하게 증대한다.
그리고 마음의 쾌락살인자가 가게 될 세계가 바로 그 세계다.
그가 감정을 통제하려고 하며, 타인을 남용하고 착취하며, 그렇게 고통을 초월한 척하며, 또 마음의 지배자인 척하며, 실제로 하게 된 일은 오직 이것이다.
그는 그저 그가 반드시 가게 될 자신의 세계에 고통을 가득 쏟아부은 것일 뿐이었다. 그가 이웃집에 버린 쓰레기는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그저 그 자신의 집에 그대로 쌓이는 것일 뿐이었다.
이것은 그가 진정한 세계, 진정한 집, 진정한 자신이라고 믿고 있던 낙원에 도착해보니, 그곳에는 자신이 지금껏 버린 오물들이 가득하게 쌓여 있는 현실을 목격하게 되는 것과도 같다.
마음의 쾌락살인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처럼 그가 창조한 지옥뿐이다.
감정을 통제하고, 마음을 지배하고자 하는 의도가, 우리에게 영원히 고통이 반복되는 이 지옥을 불러들인다.
이러한 영겁의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먼저 다른 이에게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떠넘기며 짓는 만족의 미소를 멈추어야 한다. 상대의 괴로움을 자신의 쾌락으로 여기는 일을 중지해야 한다.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가피학의 메카니즘을 강요하는 폭력을 그만두어야 한다.
곧, 자신이 마음을 초월해서, 자기 아래 마음을 두고 조종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신이라고 믿는 망상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한 마음의 쾌락살인자로서의 자신이 단지 고통의 세계를 창조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현재 자신의 모습이 정말로 이러하다는 것을, 이것 외에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명징하게 실감해야 한다.
불쌍한 아이가 아니다.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자신을 불쌍한 아이처럼 곧잘 어필하곤 한다. 그렇게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자못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의 연민이 열어낸 틈새로 들어와 쓰레기를 투기한다. 즉, 불쌍한 아이로의 의태는, 마음의 쾌락살인자가 쾌락을 얻을 구조를 창출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다.
그러다가 더는 고통에 견디지 못해 남용과 착취의 대상이 되어 있던 이가 마음의 쾌락살인자를 떠날라치면, 이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와 같은 참담한 절망과 비탄의 표정을 지으며, 그 떠나는 이의 죄책감을 후벼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가는 상대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면,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미소를 띠며 일어나 "이제 다른 재미있는 거 뭐할까?"하며 치킨을 시키고 유튜브를 시청할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음의 쾌락살인자를 아이로 묘사하고 싶다면, 우리는 소악마로서의 아이를 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악마는 작고, 어리고, 귀엽고, 불쌍하고, 친절하고, 부드럽고, 젠틀하고, 똘똘하고, 자상하고, 순수하고, 재치있고, 해맑다.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 악마는 고통을 생산한다.
악마가 줄 수 있는 것은 원래 고통의 지옥일 뿐이기 때문이다.
악마는 스스로 지옥을 창조하고, 사람들에게 그 지옥을 제공한다. 지옥에서 같이 쾌락이라는 이름의 고통을 즐기자고 권유한다. 지옥에 같이 가지 않으면, 너는 아이를 버리는 못된 부모와 같아, 라며 죄책감을 자극해 사람들을 조종하고 지배한다.
이와 같이, 신이 되기를 꿈꾼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정확하게 악마가 된다.
삶의 끝에 서있는 자신의 운명을 이미 직감하기에, 모두를 자신과 함께 죽이려는 물귀신과 같다. 자기 혼자 고통받는 일은 억울하니 다 같이 고통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정말로 자신이 억울한 희생자라고 인식한다.
지옥을 만든 것은, 그가 어쩌면 경험했을지 모를 실제적인 고통의 삽화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을 쾌락으로 바꾸고자 했던 자신의 의도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저 자신의 무고함만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순결한 아이처럼 이 모든 것의 부당함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아니다.
고통스러운 감정 자체가 지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전능함의 쾌락으로 바꾸고자 하는, 곧 감정을 통제하며 지배하고자 하는 바로 그 의도가 지옥을 만드는 것이다.
신이 지옥을 만든 것이 아니다. 신이 되고자 한 악마가 지옥을 만들었다. 곧, 신이 되고자 한 그 의도 자체가 지옥이다.
때문에 자신이 전능한 신처럼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는 그 모든 왕들, 구루들, 스승들이 정확하게 이 지옥의 창조자다. 고통바이러스다. 마음의 쾌락살인자다.
불쌍한 아이도 아니고, 전능한 신적 존재도 아니다. 다만 마음의 쾌락살인자다.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고통의 인력작용으로 끌어들이는 지옥의 토네이도와 같다.
"벗어나라, 그 자리에서 벗어나라."
옛 현인이라면 이렇게 외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귀하게 살리기 위해 벗어나야 한다.
마음의 쾌락살인자에게서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은, 우리에게 불쌍한 아이와 같은 그를 구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전능한 신적 존재와 같은 그가 지금 이렇게 드러나 있는 우리의 고통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 마음의 쾌락살인자가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는 그 사실만을 말해줄 뿐이다.
물론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이러한 정황을 뒤집어 인식한다. 그는 오히려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의 쾌락살인자가 자기 안에 있는 살의를 숨길수록 이러한 착각은 심해진다. 그리고 그만큼, 마음의 쾌락살인자는 우호적인 친절함을 가장한다.
이것이 우리가 마음의 쾌락살인자로부터 쉬이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이유다. 설마 저 표정과 언동으로 그러겠어,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악마가 언제나 성공적인 이유는, 악마는 친절하기 때문이다.
악마의 친절함은 신에 대한 가장에서 비롯한다.
가장하여 마치 신처럼 보이는 일이 그에게는 신이 되는 길과 같다. 악마의 눈에는 신이 마음에 대해 초월적이면서 친절한 지배자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신을 흉내내 신과 같은 마음의 지배자처럼 보이려고 한다.
이러한 연극을 하고 있는 동안, 신이 마음을 지배하는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악마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마음이 곧 없이 계신 신 자신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악마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게 악마는 허상의 신을 붙잡고 있기에 결코 신이 되지 못하며, 신이 되지 못한 고통은 악마를 더욱더 친절함으로 날뛰게 한다. 조커의 화난 웃음과 같은 것이다. 친절하게 웃으며 죽이는, 사람의 끝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쾌락살인자도 쾌락의 웃음이 알리는 고통 속에서 늘 듣고 있는 것이다.
"벗어나라, 그 자리에서 벗어나라."라고 하는, 고통이 알리는 삶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삶의 끝에서도 찾아온 삶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마음의 지배자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음을 지배하려는 의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차가워진다. 추위를 느낀다. 얼어붙은 지옥을 창조하게 된다.
지배하려 하지 않을 때 모든 감정은 따듯함이 되고, 마음은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된다.
지옥 밖을 향한다.
지배되지 않은 마음이 우리를 지옥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지배되지 않는 마음을 타고 우리가 지옥 밖으로 살아오르는 것이다.
고통의 끝이다.
스스로를 향해 가장 친절한 세계의 시작이다.
사람은 그가 창조한 세계에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