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있고 그때는 없다

"있을 수 없는 것의 전환"

by 깨닫는마음씨




우리의 고통의 목소리를 묘사하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이."


여기에서 '이러한 일'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나'와 '있을 수 없는 일'은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없다. 그 둘은 모순관계다.


그래서 노력이 시작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을 해결하고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나'의 노력이 시작된다.


이러한 나는 분명하게 해결사로 간주된다. 어떠한 인생의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내가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더 잘 해결할 수 있는 강하고 유능한 내가 되려고 한다.


여기에서의 이 해결사 '나'의 정확한 이름은 자아다. 실제로는 나의 대리물에 불과하면서, 자기가 나인 줄 알고 있는 구조적 장치의 이름이다.


자아는 자기가 있는 곳에는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자아 자신이 유능하게 작동하지 못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처럼 여겨지는 '있을 수 없는 일'과 정확하게 모순관계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이 자아다.


이 대립에서 자아는 언제나 '있을 수 없는 일'을 이기고 싶어한다. 승리의 규칙은 '더 큰 것이 이긴다.'이다. 그래야 작은 것을 먹어치워, 커다란 한쪽만 남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먹어치울 수 있는 가장 진정한 자기만 남는 것이 자아의 입장에서는 바로 모순의 극복이다. 곧, 해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는 계속 자신을 부풀린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잡아먹기 위해 그 몸집을 계속 키운다. 곧, 우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더 큰 존재가 되려고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정말로 힘들어진다. 더욱 힘들어진다.


표현 그대로, 힘이 쓰이고 있는 까닭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억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까닭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어떻게든 사랑하고 용서해야만 해!"

"있을 수 없는 일을 경험한 내가 나를 어떻게든 사랑하고 용서해야만 해!"


이러한 방식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자기 안에 집어넣어 수용해보기 위해 악바리처럼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뜨거워지고 열이 난다. 과부하가 걸린다. 해결사인 내가 '있을 수 없는 일'을 집어삼켜 소화하고자 하는 작용에만 무리하게 모든 에너지를 동원하니, 피가 돌지 않아 손발은 차가워진다.


이것은 다만 고통스러운 상태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진 상태다.


그래서 이것이 아니다. 이것은 수용이 아니다.


수용은 이렇게 나의 노력을 통해 무엇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것을 억지로 받아들이기를 포기하고 인정하는 것이 곧 수용이다.


즉, '있을 수 없는 것'의 해결을 포기하고,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수용이다.


그러나 이 인정이라고 하는 것 또한 노력을 통해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인정하기만 하면 다 해결되는 거죠?"라는 식의, 자아가 갖고 있는 해결의 의도를 통해서는 그 어떤 것을 하더라도 무용하다.


수용이 담고 있는 인정의 의미는 아주 단순하게, 자아가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용은 내가 수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이 노력해서 더욱더 큰 존재가 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 수용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고통을 제거하고자 하는 내가 결코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수용이다.


이처럼 내가 결코 할 수 없는 것이 수용이라면, 수용은 누가 하는 것일까? 수용의 주체는 대체 무엇일까?


바로 '이러한 일' 자체다.


우리가 사건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용되도록 사건 자체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에 대한 섬세한 이해뿐이다.


'이러한 일'은 '일어난 일'이다.


'일어난 일'은 '있었던 일'이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일이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게 이미 있었던 일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은 사실적으로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있었던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있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있었던 것이다. 곧, '없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있을 수 없는 것'에서 '있을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었던 것'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분명 있었던 것이다.


그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없다.


그때 있었던 것이고 지금은 없는 것이다.


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바야흐로 '없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우리가 문제로 느끼던 일이 그러하다.


그때 있었던 일이고, 지금은 없는 일이다.


지금은 문제가 없다.


문제가 없는 지금이다.


문제가 없는 지금은 있고, 문제가 있는 그때는 없다.


늘 그 지금만 있다.


그래서 늘 이미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일어난 일 자체가, 즉 지금 '이러한 일' 자체가 알아서 한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은, 이미 지금은 없을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은 괜찮다.


이제는 괜찮다.


지금 일어나는 이 자연스러운 일이 우리가 바로 수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와 아무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아무 상관없는 나를 수용하고 있는 일이다. 모든 것을 더 좋은 조건을 갖추어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나를, 아무 조건없이 이미 수용하고 있는 지금의 일이다.


정말로, 지금은 있고 그때는 없다.


괜찮을 수 있는 내가.


그렇게 지금 안에서, 괜찮을 수 있는 나는 '없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늘 있는 것이 된다.


지금이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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