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이것만은 배워야 할 한 가지

"두려워한다면 이들처럼"

by 깨닫는마음씨




우리가 정말로 배워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이것만은 배워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실 이것 또한 엄밀하게는 배워야 할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누구도 이것이 자연스럽게 실현되도록 가만두지 않는 까닭에, 심지어는 의식적으로 배울 항목에조차 넣지 않는 까닭에, 이것을 배우는 일은 긴밀한 필요가 되어버렸습니다.


특히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는, 더욱더 이 배움의 필요는 절실합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배워 이것에 대한 배움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어머니를 두려워하고, 형을 두려워하고, 오빠를 두려워하고, 누나를 두려워하고, 언니를 두려워하고, 동생을 두려워하고, 아들을 두려워하고, 딸을 두려워하고, 할아버지를 두려워하고, 할머니를 두려워하고, 연인을 두려워하고, 친구를 두려워하고, 적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정말로 두려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 위에서 이 모든 것을 불쌍하게 내려다보듯 긍휼히 돌보려는 태도로 자신의 두려움을 은폐하는 일을 멈추고, 이 모든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두려움이 만연한 현실일수록, 우리는 두려워하는 법을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움이 문이 되어, 우리에게 그 다음의 삶을 열어줄 수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두려움은 분명하게 하나의 관문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경계에 마주했을 때 느끼게 되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곧,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갖고 있던 하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만드는 동력입니다.


때문에 두려움을 받아들여 오직 두려워하는 이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존재의 시간이 흐릅니다. 그 반대로,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하거나, 무시하려고 하거나, 회피하려고 하는 이는, 하나의 경계에 갇힌 채 존재의 시간이 멈추게 됩니다. 늘 아이와 같은 퇴행적 모습으로만 남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채택하는 대표적인 퇴행의 방식은 바로 인내입니다. 두려움을 참고 버티며, 두렵지 않은 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586 운동권들에 의해 더 활발히 보급된 태도이기도 합니다.


586 운동권들은 한국사회에서 두려움을 가장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적대적 태도를 취하게 된 대표적인 이들입니다. 그렇게 두려움을 배우지 못하고, 두려움 앞에서 다만 얼어붙은 채, 시간이 멈추어버린 이들입니다.


이들의 시간은, 이들이 경찰에 잡혀가고, 취조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던 그 순간에 멈추어 있습니다. 즉, 그저 친구들 따라, 선배들 따라, 재미있는 축제에 참가하듯이 집단주의적 열광 속에 자신의 몸을 묻었다가, 한순간 그 군집체에서 개인의 몸이 확 끄집어내어져 단독으로 차가운 감방에 던져지게 된 그 현실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게 이들은 물장구를 치며 놀던 따듯한 욕조 안으로부터, 벌거벗겨진 채 한겨울의 차가운 아파트 복도 밖으로 갑자기 던져지게 된 것만 같은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이들로서는 차마 받아들이기 황망한 일이었습니다. 그 급속의 현실은 이들에게 두려움보다는 수치심으로 다가왔습니다. 자신이 왠지 진 것만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를 악물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패배가 공고화될까봐, 그로 인해 가상의 승자들이 벌거벗은 자신을 놀릴까봐, 이들은 악바리처럼 그 상황을 버티고자 했습니다. 대쪽같은 선비의 인내가 미덕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586 운동권들의 가열찬 활동의 방향성은 바로 이 수치심을 씻기 위한 목적을 갖습니다. 과거의 자신이 패배해서 벌거벗겨졌다는 수치심을 극복해보고자, 그때 자신이 수치심을 경험하게 된 이유로 작용한 것만 같은 구조를 어떻게든 바꾸어보려는 것입니다. 곧, 정의가 아닌 수치심이 그 동인입니다.


때문에 586 운동권들은 수치심에 대해 극도로 예민한 모습을 보입니다. 586 운동권들이 철저하게 방어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수치심을 경험하게 될 것 같은 상황입니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더라도 어떻게든 그것만은 피하려고 합니다. 두 번 다시는 수치심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수치심은 곧 패배와의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든 것을 적과의 투쟁 속에서 야기되는 승패의 장으로 바라보며, 결코 자신이 패배하지 않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해 버티고자 합니다. 곧, 이들에게 있어 인내라는 것은 패배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론입니다. 참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이 승리하게 되거나, 또는 상대가 그 끈질긴 인내의 고집에 질려 패배를 선언하게 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내의 방법론은, 인생을 살아가는 진정한 방법론으로서 보급됩니다.


두려움에 대해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 방법론으로서, 두려움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더욱 활발히 보급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두려움에 대해 더 무력해지게 됩니다. 이미 목적도 방향성도 없는 길 잃은 인내 속에서 그저 더 고집스럽게만 됩니다.


두려움을 수치심으로 착각하며 그 수치심에 대해 개발한 방법이, 두려움에 대해 조금도 효과적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인 까닭입니다.


이 두려움의 시대를 효과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수치스러웠던 것이 아니라, 두려웠던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로, 다만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수치스러운 것으로서 굴절되어버린 것뿐입니다.


그 굴절로 인해 아픔이 두 배가 된 것뿐입니다


곧, 두려움의 아픔에, '두려워하는 한심한 놈'이라는, 자기가 자기에게 가하는 채찍질의 아픔이 더해진 것뿐입니다.


이것은 다만 두려움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것은 결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전술한 것처럼, 문입니다.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그 문을 열고 나가게 됩니다. 아이의 시간을 끝내고, 새로운 하늘의 시간을 얻어 스스로 활공하게 됩니다.


즉, 두려움은 기회입니다.


두려워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이 기회를 잡는 법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모든 기회는 사람에 의해 생겨납니다.


때문에 두려워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이 사람을 잡는 법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은 사실 어떠한 구조나 상황이 아닙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의 원형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사람을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인내하는 이들은 이 사람 두려운 줄을 모르게 됩니다. 곧, 사람을 우습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 두려운 줄을 알아야, 사람 귀한 줄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사람을 두려워할 줄 아는 이는, 사람을 먼저 청하게 됩니다. 먼저 대화를 요청하게 됩니다. 자신의 두려움이 소통에 대한 자신의 목마름이 되어, 먼저 대화를 시도하고자 하는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워할 줄 아는 이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사람과 먼저 대화를 시도합니다.


이것을 곧 용기라고 부릅니다. 용기는 곧 두려움이 피운 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배우지 못한 이는, 즉 두렵지 않은 척하며 턱을 꽉 다물고 버티고 있는 이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습니다.


고집을 부리며 끝까지 버티는 것이, 자기가 두려움에게 승리하고, 또 자기를 두렵게 하는 사람에게 승리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두려움을 인내하는 이는 필연적으로 사람을 소외시킵니다. 사람을 그저, 자신이 얼마나 잘 버티는지 보여주기 위한 쇼의 무대소품으로 만듭니다. 즉, 사람을 사물로 소외시킵니다.


그러한 무대 위에서는 오직 잘 버티는 자기만이 사람입니다. 인내가 마치 사람의 자격처럼 평가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에게서 발화되는 "사람이 먼저다."와 같은 말은 사실, 무대 위에서 유일하게 사람인 "자기가 먼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인내하는 이에게 확연하게 드러나는 모습은 바로 이 폐색적인 자기중심주의입니다.


두려움이 그를 자폐적으로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라, 두려움을 인내하려는 일이 그를 자폐적인 불통자로 만듭니다.


두려움 자체는 오히려 자폐의 반대편에 있는 개방의 현실을 향합니다. 두려워할 줄 아는 우리가 충분히 두려워할 때, 두려움은 반드시 우리를 소통의 장으로 이끕니다.


이처럼 두려워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두려움이 정말로 알리고 있는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그 목소리가 안내하는 방향을 따라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목소리는 이러합니다.


"얼른 가서 오해를 풀고, 이 세상의 누구도 네 적이 아님을 빨리 확인해봐."


그래서 우리가 두려움을 느낄 때면 몸이 떨리는 것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입니다. 소풍가는 전날밤처럼 심장이 빨리 뛰는 것입니다.


빨리 가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해서 연결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충분히 괜찮고 안전한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두려워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즉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길은, 자폐적인 세계에서 나와, 섬세하게 경계를 넘어, 사람과 연결되고자 하는, 곧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안내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에게로 나있는 길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두려워할 줄 아는 이들은 곧 사랑할 줄 아는 이들입니다.


사랑할 줄 아는 이들은, 두려움을 인내함으로써 사랑도 억눌리게 하지 않습니다. 두려운만큼 사랑하고, 두렵기 때문에 사랑하며, 두려움에도 사랑합니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두려워한다면 이들처럼,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이것만은 배워야 할 한 가지입니다.


사랑, 그 한 가지입니다.


오직 사랑만을 배우기 위해 펼쳐진 것, 우리는 그것을 인생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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