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 좋아하면 안되냐?"
최민식 배우가 열연했던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명장면이 있습니다.
상남자의 고백이라는 제목 등으로 밈(meme)이 되어 잘 알려진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심리학적 실천론입니다.
특히나 관계의 문제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아주 유용한 실천론입니다.
최민식 배우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의미로서, 우리는 이 실천론을 임의적으로 '최민식 테라피'라고 명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최민식 테라피는 아주 단순합니다. 단순한만큼 효과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관계에 대해 고통받는 그 핵심적인 이유를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군더더기를 다 치우고, 가장 명확한 고통의 이유만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까닭입니다.
관계로 인한 그 모든 고통의 핵심적인 이유, 그것은 바로 관계가 우리 자신을 못나게 만드는 것처럼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관계가 어렵고, 불편하고, 긴장되고, 아프고, 화나는 소재가 되는 그 모든 이유는, 자신을 못났다고 생각하는 이가 관계 속에서 그러한 자아상을 여실히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관계는 자신의 못난 자아상이 실증되는 장입니다. 그래서 관계는 언제나 잠재적인 고통의 장이 됩니다.
그리고 고통은, 그 고통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될 때, 더 큰 고통이 됩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이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경험하는 고통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못난 존재로 경험되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을 바로 고백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고백은 상대에게 전하는 형식같지만, 실은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최민식 테라피는 이 고백의 실천론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거나, 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조건과 아무 관계없이, 고백한 자신을 대단히 편하고 자유롭게 만들어줍니다.
고백한 만큼, 자신이 스스로에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까닭입니다.
관계는 자신을 쉬이 망각하고, 상대에게 어떻게 하면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만을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못났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모습을 관계 속에서는 거의 노출할 수 없게 됩니다. 그 대신에 관계가 요구하는 것 같은 좋은 모습이 되기 위해 모든 최선을 다하며, 그 결과,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상대를 원망하고 증오하게 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제 "닥치고 나를 무조건 받아들여!"라며 상대에게 폭력적인 억지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관계에서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가 상대가 받아들여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즉 상대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있기에 생겨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관계는 다만 거울처럼,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상을 비추어줄 뿐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못났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관계가 그러한 못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어주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이 못났기 때문에, 관계를 통해 그 못남을 보완하려 하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신과 반대되는 상대를 만나야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며 좋은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들입니다.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관계는 보완재가 아니라, 정말로 그저 거울과 같은 성찰재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러한 보완재로서 관계에 대해 기대할 때, 그 관계는 우리를 더 못나게 경험되게 하는 현실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촌스러워서 못났다고 생각하는 이가, 세련된 이를 만나 그와 관계를 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촌스러움을 보완하려고 할 때, 이러한 이는 역으로 그 세련된 이와 비교되는 자신의 촌스러움을 더 못나게 느끼게 되며, 그 결과 세련된 이와 더 집착적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자신을 더 못나게 느끼는 만큼, 세련된 이를 더 가지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촌스러움을 못남으로 알고 있는 이는 정확하게 세련된 이의 노예가 됩니다. 세련된 이가 자기를 떠나지 못하도록, 노예처럼 그에게 매여 모든 최선의 봉사를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를 보완재로 간주할 때 생겨나는 관계의 비극입니다.
관계는 다만 성찰재입니다.
관계를 통해, 우리는 관계의 틀에 비친 우리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 자신을 더욱 깊이 수용할 수도 있게 됩니다. 관계는 바로 이 이해와 수용을 도와주는 성찰재입니다.
성찰재로서의 관계의 논리는 '그러니까'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즉, 관계의 상대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내가 너 좋아하면 안되냐?"라는 말의 의미는 그래서 정확하게는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습니다.
"이런 내가 살면 안되냐?"
최민식 테라피는 바로 이 삶의 조건없는 긍정에 대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조건없이 긍정되기를 소망하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그 못난 조건들의 고백 자체가, 그대로 조건없는 긍정을 실현시키는 기제로 작용하게 되는, 역설적 실천론입니다.
우리는 한번 해볼 수 있습니다.
"부장아, 니가 바라는대로 실적 제대로 못내고 말도 잘 못알아듣는 머저리인 내가 너 좋아하면 안되냐?"
"자기야, 돈도 많이 못벌고, 집에 오자마자 곯아떨어지기만 하는 무능력한 남자인 내가 너 좋아하면 안되냐?"
"오빠, 할줄 아는 것도 없고, 남들 인스타그램이나 보며 구제명품이나 검색하는 내가 너 좋아하면 안되냐?"
그렇게 못난 우리 자신을 한번 긍정해볼 수 있습니다.
못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이해와 수용의 시간 속에 놓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시간은 그대로 공간이 됩니다.
우리 자신이 못났다는 생각으로 인해 더는 고통받지 않을 수 있는,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 됩니다.
그 공간 속에서 또한 확인됩니다.
우리가 사실은 못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못난 자아상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그 모든 못남의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고통의 이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좋아할 수 있습니다. 좋아해도 됩니다.
얼마든지 사람을 좋아해도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얼마든지 사람으로 살아도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사람입니다.
어떠한 관계와, 그 관계가 요구하는 그 어느 역할 속에서도,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최민식 테라피는 이 사람을 회복하는 실천론입니다.
언제나 사람내음 가득한 연기를 펼치는 최민식 배우처럼, 최민식 테라피는 사람이 원초적인 사람내음을 돌이키는 삶의 실천론입니다.
그 원초적인 사람내음은 바로 자유의 내음입니다.
모든 자유는, 좋아할 자유입니다.
삶을, 사람을, 좋아할 자유입니다.
좋아하는 이가 조건없이 긍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이가 조건없이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고 있는 자신의 현재 모습 그대로를 실은 조건없이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자유롭게 회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좋아할수록, 더 많이 자유롭습니다.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듭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이 글도 그렇게 그 사실을 향해서만 움직입니다.
"쓰잘데기없이 귀여운 척 고양이 사진이나 올리고, 인기도 하나 없고, 늘 알아듣기 힘든 이상한 말이나 하는 내가 너 좋아하면 안되냐?"
최민식 테라피는 안되는 것 없이 다 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