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면서 하나의 재미"
실존은 선(禪)과 아주 많이 관련지어지는 전통이다.
그러나 많은 논의가 두 전통 사이의 유사성을 다루는 듯하면서도 끝내는 상이성을 부각시켜 결론을 내는 경우가 빈번하다. 실존의 입장에서 선을 논할 때도 그러하고, 선의 입장에서 실존을 논할 때도 그러하다.
사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의 차이는 단지 동서양의 문화적 입장의 차이일 뿐이다.
이는, 서양은 힘과 지배를 추구하는 유신론적 사유에 입각해있는 반면, 동양은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자연주의적 사유에 입각해있다는 식의 평면적이고 피상적인 이분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얕은 구분은 그저 서양이 동양에 뒤집어씌운 오리엔탈리즘과, 동시에 그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을 역수입해 자신들의 열등감을 극복해보고자 한 동양의 발버둥이 합작해낸 결과물일 뿐이다.
상기한 이분법의 입장에서는, 실존은 충분히 존중할 만한 깊이를 담지하고 있으나, 그래도 선에는 완전히 도달하지 못하는 미완의 시도쯤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선은 신비화되며, 엘리트적 수행론과 비슷한 것으로 변질되고 만다. 얕은 이분법을 채택하고 있는 동서양의 논자들은 분명 이러한 선의 굴절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그럼으로써 결국에는 자신들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처럼 선을 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실존과 선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져왔다. 선의 격상이고, 실존의 격하다. 열등감 때문에, 같은 것을 같은 것이라고 부르지 못한 비극이다.
실존과 선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비유하자면, 같은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다만 다른 환경에 던져진 것이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환경에 상응하여 발달한다. 곧, 다른 환경이 다른 문화적 입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과 선은, 동일한 내적 조건의 인간이 어떻게 상이한 외적 조건에 성공적으로 응답해왔는가를 보여주는 두 가지의 묘사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둘 중에 어느 한쪽의 인간을 더 진정한 것으로 평가하는 일은 전적으로 무용해진다. 둘은 동일한 응답방식을 성공적으로 이루어왔다. 다만 그 응답되는 대상이 각기 달랐을 뿐이다. 그래서 그 응답의 표현인 언어가 달라졌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다른 대상에 대해 각각의 언어로 드러내고자 한 의미는 손쉽게 상통된다. 같은 달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이다.
사실 이렇게 어렵게 말할 필요도 없이, 체험의 측면에서 보면 아주 명확해진다. 선에서의 견성체험과 실존에서의 실존체험은 완벽하게 동일하다. 단순히 종교체험들 사이의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은 체험 자체의 내용과 방향성이 동일하다. 체험의 순간, 체험자의 경험이 동일하다.
그 핵심은 그 무엇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감의 실감이다. '둘이면서 하나'로 드러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사실에 대한 발견이다. 실존과 선이 둘이면서 하나이듯이, 이 전통들이 안내하는 체험의 의미 또한 그러하다.
이것은 모든 것이 하나라고 말하는 비이원이 아니다. 즉, 상대적인 둘의 세계를 벗어나면 절대적으로 하나인 존재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절대성인 하나는 반드시 상대성인 둘로 드러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곧, 절대성과 상대성의 역설적 연합이 바로 우리 삶의 실제라는 이야기다.
이를 다시 말하면, 실존과 선은 절대성을 추구하는 전통이 아니며, 또한 상대성에 갇혀있는 전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절대성과 상대성 중 어느 진정한 하나가 아니다. 둘이다. 둘인 그 하나다.
실존과 선을 다른 것으로 보는 오해는 바로 이 '둘이면서 하나'라고 하는 역설에 대한 이해가 부재하기에 생겨난다.
이른바, 실존은 절대성을 상실한 채 상대성 속에서 몸부림치는 전통으로, 선은 상대성을 떠나 저 멀리에 있는 절대성을 지향하는 전통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곧, 실존은 절대성의 부재를, 선은 상대성의 부재를 함의하는 전통인 것처럼 묘사하며, 상대성이 부재한 선이 실존보다 더 높은 위상을 갖는다고 말하는 식이다.
이는 이미 절대성이 상대성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편견이 초래한 오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오해 속에서는 상대성의 부재는 오히려 권장된다.
이 상대성의 부재라는 것을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이 오해가 만들어내는 현실이 대체 어떠한 것인지가 우리에게 보다 실감될 수 있다.
상대성의 부재, 그것은 곧 인간의 부재다.
그리고 인간의 부재는 곧 의미의 부재다.
의미가 없으면, 재미가 없다.
때문에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은 건조한 기계론적 안정에 매몰되고야 만다.
바야흐로, 죽지 않았기에 그저 사는, 곧 삶이 단지 죽기까지의 시간때우기에 불과한 현실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여여함이라고 착각할 때, 이러한 현실이 마치 선의 목표인 것처럼 함께 착각된다.
그러나 선은, 상대성의 세계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그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 동안 자신은 구원받은 절대성의 수혜자인 것처럼 남들에게 스승행세를 함으로써 심심풀이를 하고, 이내 다가올 절대성의 세계에 하루빨리 합류하기를 기대하는, 소위 종말론적인 성격의 것이 결코 아니다.
선은 상대성으로부터 떠난 절대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상대성을 향한다. 상대성을 향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절대성을 드러나게 한다.
선은 이 모든 상대적인 것의 무의미성을 목도하고, 그 무의미성을 초월한 절대성을 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선은 바로 이 모든 상대적인 것을 의미있게 본다. 이 모든 상대적인 것 속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본다. 곧, 선은 이 모든 상대적인 것의 절대적인 재미를 향한다.
그래서 선은 재미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 초탈하여, 감정반응 없이 그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부외자의 입장은 선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초기불교의 명상적 태도나, 힌두교 구루들의 태도에 가깝다.
어떠한 것을 선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일은 사실 대단히 난감한 일이지만, 상대성은 무의미하다고 고집스럽게 견지하고 있는 입장에 대해서는, 불가피하게 그 고집을 해체하기 위한 언술이 발화될 수밖에 없다.
굴절된 선의 이해는 분명 상대적인 모든 것은 무의미하니 그것들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곧, 무의미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는 것이 자유인 것처럼 말한다. 의미가 없어도, 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얼마나 온전한지를 노래하며, 이 모든 것에는 원래 의미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또한 실존을, 이 모든 상대적인 것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그 속에서도 의미를 추구하고 있는 가련한 몸부림으로 본다. 곧, 아직 상대성을 초월하지는 못한 미숙한 단계처럼 실존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선에 대한 온전한 묘사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실존에 대한 온전한 묘사도 아니다.
각각의 굴절을 밝혀보자면 이러하다.
우선적으로, 선이 이러한 방식으로 굴절되는 가장 큰 이유는, 개인의 종교체험이 서툴게 해석되는 까닭이다. 즉, 체험했지만, 그에 대한 해석이 원숙하지 못한 까닭이다. 여기에는 체험자인 개인이 가치와 의미를 혼동하고 있던 경우가 크게 작용한다.
곧, 특정한 가치를 의미라는 이름으로 추구하며 살아온 개인이, 종교체험을 통해 그 가치가 무용한 것이며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또 아무 문제없이 존재하고 있던 자신의 존재감을 실감하게 될 때, 그 개인은 결국 "모든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무의미한 것을 추구하고 있으니 부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등과 같은 해석을 이루게 된다.
그러면서, 체험 전의 자신과 같이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이들을 보며, "무의미한 것들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구나, 껄껄껄." 등과 같은 도사연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이의 입장에서는, 의미를 지향하는 실존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큰 어리석음의 표상처럼 비추어지는 일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종교체험을 정직하게 성찰해보면, 체험이 언제나 어떠한 의미와의 만남이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복기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추구해온 가치가 끝내 헛된 신기루와 같은 것으로 드러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자유를 경험하던 그 순간, 가치가 깨어진 그 자리에 대신 드러나 있는 의미를 그는 분명 경험했다. 그 의미의 경험이 바로 종교체험이다.
그는 그냥 온전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로 말미암아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의미 자체가 온전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무리 어리석은 삶이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어리석음이 펼쳐지게 된 온전한 의미가 바로 그 자리에 언제나 존재했다.
의미는 바로 마음의 의도다.
때문에 가치는 내가 추구하던 것이지만, 의미는 나를 추구하던 것이다. 나를 아름답게 추구하던 마음의 의도다.
그래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한결같이 나를 추구하며 이 삶을 이끌어온 마음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곧, 마음의 의도로 인해 생겨난 자신의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의미는 언제나 감동적이다. 종교체험시에 야기되는 강렬한 정동의 반응은, 지금까지 살아온 의미를 알게 된 이 벅찬 감동의 표현이다.
이처럼 종교체험의 감동이 바로 의미의 확인으로 인해 생겨났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 종교체험에 대한 원숙한 해석이다.
이와는 반대로 서툰 해석은, 개인이 그동안 자신을 무겁게 짓눌러오던 가치에서 벗어나 이제 자신은 진정한 존재가 된 것처럼 종교체험을 이해하는 해석이다. 이것은 금새 자기우상화로 흐르게 된다. 상대적인 것의 아름다운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상대적인 이 현세가 우습게 여겨지고, 자기만이 절대적인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이 종교체험에 대한 서툰 해석은, 일종의 신분세탁과 같다. 자신이 갖고 있던 비루한 과거의 정체성에 벗어나, 새롭고 좋은 정체성으로 탈바꿈한 것 같은 쾌락만이 체험자를 지배하게 된 상태다. 그 결과, 과거의 정체성이 얼마나 온전한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해는 부재하게 되며, 오히려 과거의 자신의 모습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이 된다. 더 멀리하고 싶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이 된다.
그렇게 서툰 해석자는, 종교체험을 통해 얻은 새로운 정체성을 또 다른 가치로 삼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발화하는 "있는 그대로 온전하다." 등과 같은 말은, 정말로 이 모든 상대적인 것의 온전한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구체적인 묘사가 아니라,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발생하는 피상적인 이데올로기의 주장이 된다.
선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고목선 내지 구두선이라고 말한다. 이미 살아있지 않고 죽어있는 것이다.
이처럼 의미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죽어있는 것과 같다. 곧, 재미가 없는 것은 죽어있는 것과 같다.
바로 이와 연결지어, 실존이 굴절되는 방식을 논해볼 수 있다.
실존이 굴절되는 핵심적인 이유는, 그것이 이미 하나의 전형이 되어버린 실존주의 내지 실존철학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사르트르나 카뮈와 같이 실존을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 서술하고자 한 이들이 실존의 대표자인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특히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대명사처럼 간주됨으로써, 실존과 선의 거리감을 만드는 데 본의 아니게 일조해왔다.
오늘날, 실존이라는 단어가 상기시키는, 어둡고, 염세적이며, 고독하고, 피로한 이미지는 사르트르가 주요하게 남긴 유산이다. 이러한 실존주의적 인간상은 이 세상의 무의미성에 염증을 느끼며, 그럼에도 삶을 어떻게든 버티어가고자 하는 비극적 영웅의 모습으로 곧잘 묘사된다.
이 영웅이 하는 일은 결국 무의미성의 세계에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는 일이다. 의미가 없는 곳에, 자신이 의미를 세우는 것이다. 일종의 전위예술가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르트르식의 실존주의의 입장은, 전술한 선의 입장에서 비판하기에 아주 적합한 소재가 된다. 이 상대적인 모든 것의 무의미성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 나머지, 가상의 의미라도 만들어내어 그걸로 구원받은 척하려는 안쓰러운 자구책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대단히 적절한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실존에 대한 선의 비판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굴절된 실존에 대한 굴절된 선의 비판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이 비판은 심지어 상대를 향하는 것도 아니라, 비판하고 있는 주체 자신을 향하는 것이다. 쉐도우복싱과 같다.
굴절된 실존도, 굴절된 선도, 똑같은 착각을 공유한다.
즉, 가치를 의미로 여기는 착각을 공유한다.
그렇게 모든 것이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자기 자신만을 가치로 놓고 있는 것이다. 곧, 상대적인 세계와 절대적인 자신을 가치의 위계처럼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이 위계의 출현이다.
의미는 가치가 아니다. 의미는 탈가치적이다. 곧, 의미에는 위계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의미를 발견할 때 우리는 자유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탈가치적 의미의 작용에 따라, 우리의 삶이 가치가 만들어낸 위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까닭이다.
실존과 선의 공통적인 작용은 바로 이 위계로부터의 탈출이다. 이것은 탈존이며, 격외선(格外禪)이다.
위계는 언제나 실체적인 절대성을 상정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모든 피라밋의 정점은 최대의 가치의 구현이며, 곧 절대성의 표상이다.
그리고 실존과 선은 이 실체적인 절대성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상대적인 것들 위에 절대적인 하나가 군림하는 구조를 해체하고, 상대적인 것들만을 남기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그 상대적인 것들 사이의 공간에서 마치 없는 모습처럼 활동하는 절대성을 눈치채게끔 안내한다.
곧, 둘이면서 하나인 현실을 향한다.
둘이면서 하나이기에, 혼자인 줄 알았는데 함께였음에 감동받게 되고, 함께인 줄 알았는데 혼자라 또 만나러 갈 설렘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의미의 구조다.
의미는 만남을 통해 알려진다.
그래서 의미는 자신이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유지하고자 애써야 할 가치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의미는 다만 발견되는 것이다. 만남으로 인해 거기에도 의미가 있었음이 발견되는 것이다. 모든 곳에 의미가 있었음이 발견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의미있었음이 발견되는 것이다.
때문에 의미가 없는 모든 것은 없다. 곧, 의미가 없이 온전한 것은 없다.
온전하다는 것은 그것이 의미있다는 것이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면, 그것은 현재 온전하다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의미를 모르면서, 다 온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일방적인 가치의 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다만 자신을 절대적 가치로 세우고자 하는 자기우상화의 일이다.
이러한 굴절은 정말로 '둘이면서 하나'에 대한 감수성이 부재하기에 생겨난다.
자신이 어떠한 종교체험을 했든 간에, 현재 가장 정직한 입장으로 살펴보았을 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곧, 하나의 절대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온전함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지금은 둘이 되어 있는 것이며, 그 둘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둘이라는 사실을 문제로 여길 때 하나를 강박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그렇게 하나는 절대적인 가치로 추구되며, 이 가치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의미의 상실을 가져온다. 이처럼 의미를 잃게 되니 온전함 또한 잃어진다. 그럼으로써 더욱더 둘이라는 사실이 문제처럼 굳어진다. 하나에 대한 강박이 만드는 악순환이다.
그러나 둘이 되었다는 것은, 또 만나러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절대적인 하나의 가치인 척, 즉 온전한 척하는 일을 멈추고, 다시금 의미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자신의 삶이 어떠한 아름다움으로 펼쳐지고 있었는지의 그 감동적인 의미를 다시 또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와 둘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이 작용이 바로 삶이다.
그래서 삶을 절대성과 상대성의 상호작용이라고도 말한다.
절대성은 상대성으로 말미암아서만 절대성이고, 상대성은 절대성으로 말미암아서만 상대성이다. 때문에 절대성은 상대성 안에서만, 상대성은 절대성 안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
실존과 선의 공통적인 기획은, 이처럼 상대성 안에서 절대성을 보고, 그 절대성을 상대성 안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입장이다.
절대성과 상대성을 각각 초월성과 유한성이라고 바꾸어 말한다면 이 입장은 더 명확해진다.
인간은 유한하기에 초월적이다. 즉, 인간은 한계를 갖고 있기에 그 한계 밖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진중한 과업처럼 자신이 눈치챈 그 한계 밖으로 가열차게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가치의 작업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떠한 것의 한계는 그 밖에서만 눈치채일 수 있다. 즉, 한계의 자각은 언제나 한계 밖의 시선에 대한 자각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 한계 밖의 시선이 인간을 향해 돌입해 들어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한계 속에 있던 인간이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온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지 그 의미를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는 언제나 둘만을 위한 하나며, 초월성은 언제나 유한성만을 위한 초월성이다.
더 일상적이며 직접적인 진술로 묘사하자면 이러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전부라는 것이 있다면, 그 전부는 언제나 너를 위한 전부다. 전부 너를 위해서만 있는 것이다.
실존과 선은 정확하게 이렇게 체험된다.
이 전모를 다 알 수도 없는 거대한 모든 것이 다 나를 향해 있었다는 감동의 실감으로 가득찬다.
이것은 기독교적 신화로 비유하자면, 가장 거룩한 신이 나를 위해 죽었다고 하는 정확한 그 실감이다. 가슴을 파고 들어 심장을 흔들어대는 그 전율이다.
'대체 내가 뭐라고, 왜 이토록 나를?! 도대체 누가 나를?!'
이 모든 것이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알리며 쏟아져내리는 그 한계 밖의 시선을 눈치채며 이와 같이 묻게 될 때, 전환이 일어난다.
시선을 받던 이의 입장에서 그 시선의 주인으로 입장이 전환된다. 그럼으로써 왜 이토록 너였는지에 대한, 왜 이 모든 곳에서 이 모든 것으로 너만을 바라보고 있었는지에 대한 그 마음을 알게 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너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또 전환된다.
나는 그저 사랑받고 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 전환이 무수히 교차된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내가 너에게 사랑받는, 가장 온전한 만남의 순간이 교차된다.
이것은 결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하기 위해 임의적인 언어를 붙인다고 할 때, 앞의 나와 뒤의 나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른바, 타자 관계다.
그렇다고 이것이 큰 나(大我)와 작은 나(小我), 또는 참나(Self)와 자아(ego) 같은 것도 아니다. 이러한 구도는 큰 나가 작은 나 위에, 참나가 자아 위에 보다 '진정한 나'로 존재함으로써 그 아래에 있는 '거짓된 나'를 포섭하려는 위계의 가치구조가 제시하는 그림일 뿐이다.
이것은 그냥 나다.
나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절대성과 상대성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그 이름이다.
둘 사이에는 절대적인 경계가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계를 순간 뛰어넘어 전환은 일어나며, 만남은 이루어진다.
그렇게 누구도 나인 것을 막을 수 없다.
그 어떤 한계도, 나를 만나는 일을, 나로 만나지는 일을 가로막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유한성은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초월성은 오직 이 유한성만을 위해 작동하는 것이다. 때문에 유한성을 벗어난 초월성은 이미 초월성이 아니다. 온전한 것이 아니다.
이를 비유하자면, 인간이 없으면 신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현대적 사유의 통찰과 같다.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다.
신에게는 인간이 모든 의미인 까닭이다.
절대성에게는 상대성이, 초월성에게는 유한성이, 너에게는 내가, 정말로 유일한 모든 의미인 까닭이다.
그래서 내가 없으면, 이 모든 것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오직 사랑받기 위해서만 태어난 내가 없어지면, 나를 향해 설레며 고백을 준비하고 있던 이 모든 것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나는 만남의 결과며, 그래서 나는 의미다.
나는 이 모든 것의 의미다.
존재의 의미며, 마음의 의미다.
그렇게 나는 의미있는 것이기에, 재미있는 것이다.
재미를 느낄 때, 나는 거기에서 가장 의미있게 드러난다.
모든 재미있는 것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하나가 되는 움직임이 있다.
둘이면서 하나인 것, 이것은 재미의 원초적인 형상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또 만나는 것, 이것을 우리는 삶이라고 부른다. 곧, 하나와 둘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 삶이다.
그래서 삶은 가장 원초적으로 재미있는 것이다.
실존과 선은, 삶이 바로 이러하다는 사실을 묘사하는 모든 것일 뿐이다.
실존을 우리말로 가장 쉽게 쓰면 바로 삶이다. 선을 우리말로 가장 쉽게 쓰면 또한 삶이다.
그렇게 실존과 선은, 재미있게 사는 삶에 대한 모든 것이다.
비극적 영웅주의가 결코 아니며, 초탈한 명상주의가 결코 아니다.
다만 삶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재미가 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재미가 있다. 사는 재미가 있다.
그렇게 나인 재미가 있다.
나로 사는 재미가 있다.
재미있게 사는 나다.
이것이 둘이면서 하나인, 실존과 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