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은 독재자의 이름, 코로나

by 깨닫는마음씨


77b8379d98386b488e531268e88513c6.jpg?type=w1600



코로나는 수줍다. 우리가 다 안다.


우리가 다 아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인 까닭이다. 인간이라서 모든 것을 우리의 모습처럼 의인화시킨다. 그렇게 의인화된 현상은 그 습성과 작용이 우리의 이해범위 안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즉, 의인화의 핵심적인 결과는 통제가능성이다.


아직은 철이 없어서 미숙하게 주변에 민폐를 끼치기도 하나, 기본적으로 잘 통제되는 아이의 모습이 있다. 에릭 번과 같은 심리학자는 이러한 아이를 '순응하는 아이(adapted child)'라고 묘사한다. 부모 말을 잘 따르는 모범생의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가 꿈꾸는 코로나의 모습이다.


이러한 코로나의 모습은 정말로 수줍다. 모범생의 수줍음이다.


코로나 범생이는 4명 이하의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면 그 자리에 끼지 않고 모른척 지나쳐간다. 소규모의 모임 속에서 불가피하게 자기를 개방해야 하는 일이 너무나 부끄러운 듯하다. 우리가 친밀하고 따듯한 대화를 나누던 중, 문득 창문 밖을 내다보면 성냥팔이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빠르게 창가에서 멀어져가는 코로나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참 수줍은 아이다.


동일한 이유로 이 범생이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이 낯설다. 잘 있다가도,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고 음식물을 취식하려고 하면 훌쩍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향한다. 늘 식사시간마다 급한 약속이 생기는 것 같다. 회식자리때마다 할아버님이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게 되는 신입사원의 모습과도 같다. 많이 수줍은 녀석이다.


그렇다고 이 범생이가 자기와 마음이 잘 맞는 소수의 이들과는 살가운 정을 나누는 것도 아니다. 누구보다도 이 범생이를 이해해주는 이들이 있다. 이제 긴 터널의 끝이 보인다는 말을 반복하며, 코로나 범생이가 더는 나쁜 아이가 아니고, 이제는 잘 통제될 수 있는 착한 아이로 개심했다는 증언을 열심히 해주는 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와인파티나 회합 자리에는 유독 이 범생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자기에게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지 말라며, 부담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일까. 츤데레처럼 수줍은 친구다.


어떻든 우리 코로나 범생이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양식있고 격조있는 친구다. 낄 자리 안 낄 자리를 가리며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진정 깨어있는 친구다.


프레이저는 "유사한 것이 유사한 것을 부른다."라며 주술의 원리를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깨어있는 것은 또 다른 깨어있는 것을 부른다. 마치 촛불의 빛이 옆으로 옮겨져 확산되듯이, 깨어있는 이로 말미암아 모두는 깨어나게 된다. 이 작용을 '계몽(enlightenment)'이라고 부른다.


수줍은 코로나는 역설적으로 계몽의 선두주자다. 자기의 모습은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하지만, 모두를 자기와 똑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데는 누구보다 열정적이다. 구체적인 얼굴이 노출되는 사적인 자리보다는, 익명의 군중 속이 이 계몽지기에게는 편안한 자리다.


모두가 착한 모범생이 되어 효율적으로 잘 통제되는 세상, 이것이 계몽의 완성이다. 근대시민국가는 이로써 유토피아가 된다. 천국이 지상에 현현한다. 모두가 똑같이 수줍은 얼굴을 한 이 천국의 시민들이 한 목소리로 외친다.


"우리가 또 해냈습니다. 더불어 뭉치면 우리는 다 할 수 있습니다."


계몽이 집권한다. 사우론과 같은 어둠의 독재가 아닌, 간달프가 빛으로 독재하는 시대가 개막한다. 전체주의의 빛은 수줍은 얼굴들에 홍조를 더해준다. 가장 수줍은 모범생의 얼굴을 가졌던 이, 히틀러를 추억한다.


모두를 자기와 똑같이 비추려는 독재자는 결코 악마의 얼굴을 갖고 있지 않다.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다. 부모 말을 하늘같이 여기며 모범생으로 잘 통제되어 온 '순응하는 아이'만이 독재자가 된다. 그래서 독재자의 얼굴은 참 인간적이다. 선하고, 여리며, 귀엽기까지 하다. 수줍음이 만면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바로 카메라에 비친 군중의 얼굴들이다.


대중독재사회의 주체는 바로 이 수줍은 모범생들이다. 이들이 자기의 모습과 같은 형태로 코로나를 의인화한다.


그래서 코로나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적폐가 아니다. 오히려 이해되어야 할 우리의 자화상이다.


현상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다. 때문에 현상을 보면 우리 자신이 보인다.


자신의 정직한 개인성은 숨긴 채, 모두를 자기와 똑같은 얼굴로 전염시키려고 하는 수줍은 독재자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자신의 삶은 억압하며, 그 억압의 억울함만큼 타인의 삶도 억압하려 하는 상호폐색의 현실을 낳은 것은 코로나가 아니라, '순응하는 아이'로서의 원한심을 키워온 독재자인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렇게 억눌려 살았으니, 얼마나 독재하고 싶었을까?"


이것은 자화상에 대한 이해다.


'순응하는 아이'를 억눌러온 것은 그의 부모밖에 없다는 실제의 현실에 대한 이해다.


그러나 차마 하늘처럼 섬기던 부모에게는 반항할 수 없던 까닭에, 게다가 한국형 문화적 문법의 과외선생인 공자가 임금에게는 대들어도 부모에게만은 절대 대들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던 까닭에, 타오르는 심정을 꾹 찍어 누르며, 자기 부모 대신에 심판될 '나쁜 부모'를 여기저기에 투사해서 정의를 부르짖던 그 회피의 역사에 대한 이해다.


자신을 제일 위축되게 하는 부모 앞에서는 실실거리며 착한 모범생을 연기하고, 외부의 만만해보이는 대상에게는 부모에게 화난 그 감정을 대신 처절하게 쏟아붓는 그 간극에서 피어오르는 표정, 그것이 바로 수줍음이다.


그렇게 우리는 수줍다. 우리가 다 안다.


우리가 다 아는 이유는 우리가 수줍은 독재자인 까닭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음은 온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