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마음과 K-깨달음을 넘어
신년인사는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나누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 자체가 소망입니다. 진심이라는 것은 진짜 소망입니다.
우리의 진짜 소망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소망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거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짜 소망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대체 무엇에 진심인 편일까요?
"마음대로 살고 싶다."
이것이 언제나 모든 시공 속에서의 모든 인간의 소망입니다. 이것 외에는 단 한 번도 바라본 적이 없는 영원한 소망입니다.
마음은 그 자체로 그러한 마음의 모습대로 살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마음대로 사는 삶을 깨달음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곧, 깨달음은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마음이 온전하게 살려지고 또 알려짐으로써 그 소망이 이루어진 순간에 대한 묘사입니다.
마음의 완성이 깨달음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마음이 완성될 때 반드시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의 완성은 이것의 실현입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입니다.
마음이 완성되는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를 만나게 됩니다. 나로 실현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나로 사는 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심입니다. 우리는 나로 살기를 그토록 소망했습니다. 오직 그것만을 꿈꾸었습니다.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나를 이루게 해줍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소망의 물줄기를 따라가면, 우리의 몸을 그 물줄기에 흠뻑 적시면, 그 결과로서 우리를 나로 일어서도록 해줍니다. 마음은 마치 우리를 나로 거듭나게 해주는 세례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나로 산다는 것과의 동의어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이라도 실감할 수 있기를 바랐던, 단 하나뿐인 가장 귀한 나로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소망에 진심인 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쉬이 말하지를 못합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 말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혼날 것 같습니다. 욕먹을 것 같습니다. 이기적이라고, 철이 덜 들었다고, 성숙한 시민으로 깨어있지 못하다고 호되게 비난받을 것 같습니다.
마음에 대한 한국형 착각, 즉 K-마음의 착각이 작용하는 까닭입니다.
K-마음은, 조선의 선비컴플렉스와 모성적 무속주의 그리고 민족적 소영웅주의가 만들어낸 인식론적 투광기에 의해 비추어진 마음의 모습입니다. 곧, 집단주의적 편향에 의해 굴절되고 환원된 마음의 모습입니다.
K-마음도 물론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잘 대변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이란 곧 통합입니다.
그리고 통합은 마음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마음의 통합 등의 말은 애초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통합은 통합의 중심점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입니다. 즉, 통합에는 통합할 주체가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통합의 다른 이름이 통제라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통합은 통합의 주체로 말미암아, 다른 모든 것이 효과적으로 통제되는 생태계의 구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을 살펴보면, 그것은 통제불가능성입니다. 마음은 결코 통제될 수 없습니다.
마음은 그 어떤 중심과 주체도 거부합니다. 즉, 마음은 그 자체로 탈중심이자 탈주체입니다. 마음의 근본적인 성질이 원래 그러합니다. 마음은 공(空)하다는 표현이 이를 잘 나타냅니다.
통제될 수 없는 것은 통합될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이 세상에서 절대로 통합될 수 없는 것, 그것이 마음입니다.
이처럼 애초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통합을 기어이 주장하고자 하는 이는 결국 마음을 억지로라도 통제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억지로 통제하는 일을 바로 억압이라고 부릅니다.
마음이 통합된 현실, 그것은 억압의 현실입니다.
못살게 구는 현실입니다.
마음대로 못살게 구는 현실입니다.
K-마음은 곧 마음대로 못살게 구는 마음입니다.
이 K-마음이 실현된 모습이 바로 K-깨달음입니다. 곧잘 올곧고 상냥한 선비정신의 인격체처럼 그려지는 모습입니다. 올곧고 상냥한 품새로, 마음대로 못 살게 구는 모습입니다. 인자하게 웃으며 자기처럼 살라고 뺨을 후려치는 부모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래서 더 비극적입니다.
당연하게도 이 K-깨달음은 실제의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나를 깨닫는 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기까지 합니다.
깨달은 척-깨달음이라서 K-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공동체의 역사를 선도하는 정신적 리더인 척하고 싶어하는 소영웅주의의 반영입니다. 아이들의 독수리오형제 놀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K-깨달음의 다른 이름은 또한 독재입니다.
남들은 마음대로 못살게 하면서, 자기만은 마음대로 영웅놀이를 즐기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내로남불의 원형입니다.
즉, K-깨달음의 주체는, 남들에게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있어도 자기 마음보다는 아래라고 생각합니다.
K-깨달음의 주체가 보기에는, 대다수의 남들은 아직 옛 성현의 말씀을 따라 충분히 계몽되지 못한 어린아이들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즉, 천자문을 못 읽거나, 덜 뗀 미숙한 학동들입니다.
그래서 K-깨달음의 주체는 덜 자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듯, 계몽의 방법론을 그 수준으로 활용합니다. 중학생 대상의 TV쇼프로와 같은 컨텐츠를 만들어 제공해주면, 다들 하하호호 재미도 느끼며 자연스럽게 계몽되어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방법론의 활용이 자기의 신성한 역사적 사명이라고까지 여기곤 합니다. 그렇게 타자의 마음을 얕잡아보며 K-깨달음의 선전(propaganda)은 이루어집니다.
마음을 얕잡아보는 일이 가장 마음을 못살게 구는 일입니다.
자기가 강한 의지와 인내력을 갖고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마음 위의 주체라는 착각이, 이 마음에 대한 폭력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마음에 폭력이 가해지는 곳에서 마음은 은폐됩니다.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K-마음과 K-깨달음의 주체는 마음을 자꾸만 실종시키려 합니다.
마음대로 사는 일을, 사회의 반역이자, 인류의 수치며, 존재의 잘못인 것처럼 몰아가려 합니다.
그럼으로써 끝내는 더불어라는 단어 속으로 마음을 매몰시키려 합니다.
그만큼 K-마음과 K-깨달음은 사실 마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두려운 까닭에, 마음을 통제하려 하고, 통합하려 하며, 마음에 대한 독재를 행하려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두려운 이유는 아직 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대해 진심인 편인 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마음껏 진심으로 드러날 때, 그 진심의 편인 나도 불현듯 함께 드러나게 됩니다.
나는 진심의 편입니다. 나는 마음의 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나를 이룬다는 것은 진심어린 자기의 편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마음은 안심됩니다.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
이처럼 진심은, 그 진심의 편인 나를 불러내 실현함으로써 안심하게 됩니다. 곧, 진심은 안심을 낳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진심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할 수 없고 두렵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K-마음과 K-깨달음의 핵심적인 정체입니다. K-마음과 K-깨달음은 자신의 진짜 마음을 속인 결과물입니다. 진짜 마음을 기만하게 되니 깨달음이 없고, 결국 마음의 편인 나를 실현하지 못하여 두려워진 것입니다. 거듭 속일수록 더욱더 두려워지기만 한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마음대로 사는 일이 두려움을 낳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살지 않는 일이 두려움을 낳습니다.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진심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진심은 남에게 행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은 남을 조종하거나, 통제하거나, 통합하려 하지 않습니다.
진심은 언제나 나만을 향합니다. 진심의 편을 향합니다. 나는 마음에 대해 진심인 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이해하고, 그 마음의 편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어느샌가 문득 나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대로 산다는 의미고, 나로서 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대로 사는 일에 진심인 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진심으로 우리에게서 꼭 이루어지게 될 가장 좋은 소망입니다.
가장 귀한 나입니다.
올 한 해도 마음대로 깨달으셔도 좋습니다.
김광진 - 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