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는 어떻게 붕괴되고 회복되는가?"
봉준호 감독의 2009년작 '마더'는 오늘날의 시대에 대한 예언이었다.
"넌 엄마 없니?"
반칙과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자식만을 맹목적으로 챙기려는 그러한 엄마가 없다면 우리가 얼마나 서러워지게 될지를 선명하게 알리고 있던 계시와도 같았다.
서러워서 더러운 이 시대는 귀자모신(鬼子母神)의 시대라고 불릴 것이다.
귀자모신의 설화는 이렇게 전해진다.
인도에 만 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식에게는 한없이 자상하지만, 남의 자식은 자신들의 먹이로 삼는 식인녀였다.
이 여자에게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 붓다에게 그 서러움을 호소하자, 붓다는 그녀의 막내자식을 몰래 숨겼다. 사라진 자식을 찾아 미친듯이 헤매던 그녀는 결국 붓다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자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만 명의 자식 중 한 명이 없어져도 당신의 마음은 그렇게 아픈데, 당신에게 단 하나뿐인 자식을 잡아먹힌 다른 부모들의 마음은 대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그녀는 개심하여 모든 아이들의 수호신이 되었다.
내로남불의 원형과도 같은 이야기다. 특히 남의 자식을 잡아먹어서라도 자기 자식에게 이득이 되게 하려는 공포스러운 내로남불의 핵심적 속성을 잘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다.
나아가 이 이야기의 결말 또한 결코 아름다운 의미가 아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전체주의적 모성'이다. 즉, 자기 자식만을 편애하고 남의 자식을 잡아먹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삼으려고 하는 모권 제국주의의 식민지 전략이다.
이것은 곧 신이 되려는 기획과도 같다. 전체주의의 중심에는 언제나 신화(神化)된 신화(神話)적 주체가 있다.
바야흐로, 귀자모신의 시대란 엄마를 자임하는 주체가 신으로 등극해 있는 시대인 것이다.
모두가 진정한 하나의 엄마 아래 똑같은 얼굴을 한 착한 아이로서 존재할 것이 종용되는 시대다.
모든 전체주의가 미쳐 있듯이, 이 진정한 하나의 엄마 또한 미쳐 있다.
때문에 귀자모신의 시대란 또한 미친 엄마의 시대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죄책감이다. 자신이 똑바로 된 엄마가 아니라는 죄책감에 엄마들은 미친다.
죄책감은 사실 대단히 오만한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전능하게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신이 아니라는 자기비난에서 비롯한다. 즉, 사람이 신처럼 구는 일이 죄책감을 생산한다.
여기에서 강력한 자기비난의 소재가 되는 '똑바로 된 엄마'라고 하는 것은, 곧 신적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엄마는 신이어야 한다. 신이 되는 일이 종용된다. 그래서 엄마는 끝내 미치고 만다. 미친 신이 된다. 전체주의의 폭권을 행사한다.
대체 이러한 일은 왜 생기는 것일까? 또한 왜 반복되는 것일까?
거친 예로, 철없는 아이들이 선비가 되기를 꿈꾸기 때문에 이 끝없는 악몽은 양산된다.
이렇게 다시 묘사할 수 있다.
엄마는 가부장이 만든 마지막 신이다.
그러나 은폐된 신이며, 뒤에서 작동하는 무의식의 신이다. 곧, 오컬트[숨겨진]의 신이다.
대단히 역설적으로, 가부장은 모성 위에 세워진 구조다. 모성이 없으면 가부장은 존립될 수도 없다.
신적인 모성을 세워야, 그 위에서 몸만 자란 미숙한 수컷 어른아이들의 무개념한 선비놀이가 펼쳐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헌신하는 모성의 미덕은, 정확하게 가부장을 위한 희생양의 장치다. 그래서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모성이 늘 신화적으로 예찬된다. 희생양을 숭고한 것으로 노래함으로써, 그 희생을 자발화하며 또한 정당화하는 것이다. 가장 치졸한 폭력이다.
바로 이렇게 가부장을 위해 짜여진 모성상이 엄마들의 뒤를 쫓는다. 이러한 신적 모성상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죄책감이 엄마들을 맹렬히 추격한다. 낭떠러지로 내몬다. 미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 미친 엄마의 생산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엄마가 미쳐야만, 자식을 위한 맹목주의가 기능하는 까닭이다. 그 맹목주의로 말미암아 자기 자식을 위해 남의 자식을 죽이는 일에 서슴없어질 수 있는 까닭이다.
남의 자식이 죽어야, 자기 자식이 벼슬을 얻어 감투를 쓸 수 있다. 선비는 정당한 선비로 등극할 수 있다.
이처럼 자식인 선비들을 위해, 미친 엄마는 스스로를 마취시킨 살인기계가 된다. 자기 편을 위해서는 모든 헌신을 다하며, 남의 편에게서는 필연적으로 빼앗게 된다.
그리고 귀자모신이 제공하는 이 복지와 혜택 아래서 선비들은 웃는다. "동지들, 우리가 또 해냈습니다."라며, 엄마를 희생양 삼아 이룬 자신들의 승리에 대한 축배를 든다.
엄마는 미치고, 버려진다.
그러다가 선비들이 당파싸움을 통해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하고 이권을 얻어야 할 상황이 재차 도래하면, 무덤에서 불려나온다. 악신(惡神)으로 다시금 소환된다.
또 한 번, 미치고, 버려질 것이다.
서러워서 더러운 이 시대에 펼쳐지는 일이다.
이 시대의 지배자, 사이비구루가 펼쳐내는 일이다.
사이비구루는 귀자모신을 섬긴다. 섬기는 그 행위를 숭배라고 쓰고 이용이라고 읽는다.
자기들이 대단히 영특한 지성적 천재라고 생각하며, 그에 따라 남들을 효과적으로 조종하며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선비놀이에 중독된 이들의 모습이다.
즉, 사이비구루란, 엄마를 희생양으로 이용하여 자기들의 권세를 증대시키려는 선비로서 활동하는 어린아이들의 총칭이다.
귀자모신은 미친 엄마의 세력이다. 곧, 맹목적 모성주의다. 이 모성주의가 가족주의의 근간을 이루며, 가족주의의 원리가 외연적으로 확장된 것이 집단주의다. 집단주의가 신화(神化)되면 그것이 전체주의다.
그래서 귀자모신을 자신의 뒷배로 이용하는 선비들, 곧 사이비구루들이 그 근간을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전체주의다. 때문에 사이비구루는 선동에 능하다. 엄마를 한 몸처럼 이용하기 위한 기술적 방법론에 익숙하다.
사이비구루는 엄마들에게 음모론을 선동한다. 그 모든 음모론의 내용은 "당신의 자식을 위협하는 나쁜 적이 있다."이다.
물론 그 적은 사실 사이비구루 자신의 정적이다. 그렇게 엄마들은 자기 자식을 지키기 위한 맹목적 모성으로 사이비구루가 지시한 적에게 맹렬히 달려든다. 자식을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실은 사이비구루를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한다. 낫을 들고 난자한다.
그 뒤에서 사이비구루는 웃는다. 자신의 정적이 쓰고 있던 감투에 묻은 피만 가볍게 툭툭 털어낸 뒤 자신이 그 감투를 쓰게 될 현실이 눈앞에 다가온 까닭이다.
사이비구루에게는 모든 일이 참 쉬워보인다. 엄마들의 죄책감만 슬쩍 자극하면 모든 것이 정의라는 이름하에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만 같다.
그렇게 엄마의 희생으로 성립된 왕국에서 사이비구루는 자기 잘난 줄 아는 왕 노릇을 한다. 자기가 똑똑하고 능력있어서 자수성가한 인물쯤으로 자신을 착각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장사, 바로 죄책감 장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망각한다.
유교주의가 엄마들에게 뒤집어씌운 죄책감의 기제를 그대로 활용하여 자신의 장사수단으로 삼는 이, 그것이 사이비구루다.
흔히 4대 성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있다. 그중에서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는 동일한 이명(異名)을 갖고 있다. 그 이름은 바로 '복종하지 않는 자'다. 그러나 공자는 그 반대로 '복종시키는 자'로 드러난다.
복종은 위계를 만들어낸다. 위계는 희생을 정당화시킨다. 그로 말미암아, 희생은 사이비구루의 재산이 된다.
엄마를 끝없이 착취하는 아이, 이것이 사이비구루의 가장 원형적인 속성이다.
사이비구루는 유교주의적 가부장이라는 모성 착취의 효과적인 구조를 활용해, 자신을 그 구조의 수혜자인 선비로 자임하며 엄마에게서 최대한의 이득을 뽑아먹는다.
혹시나 그러한 행위가 비난을 받게 될지라도, 그 책임은 맹목적이고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미친 엄마에게 있는 것이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천재로서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면책의 특권을 주장한다. 엄마를 선동하여 미치게 만든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은폐한 채, 스스로는 언제나 정당한 자로서 자기최면을 건다.
그래서 사이비구루의 본질이 바로 어린아이인 것이다.
엄마가 없으면 사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엄마에게 기생하여 특권을 누리면서, 그 모든 영광은 자신에게만,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은 엄마에게만 돌리고 있는 것이다.
사이비구루가 이처럼 어린아이인 까닭에, 사이비구루의 시대에는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결코 성립될 수 없다.
거기에 있는 것은, 사이비구루의 뒷배가 되어주는 집단주의뿐이다.
한국사회에서는 공동체라는 이름을 빌려 사실은 이 집단주의를 묘사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이 집단주의는 공동체주의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가장 극명하게 다른 점, 그것은 공동체주의가 집단주의와는 다르게 피아식별의 기제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공동체주의에는 정의와 적폐로 나뉘어지는 이분법이 없다. 공동체주의의 현실은 우리편인 동지와 상대편인 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공동체주의에는 그 자체로 다양하고 입체적인 개인들만이 있다. 즉, 구성원들이 각기 개인으로 서 있을 때야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것이 공동체주의다.
때문에 공동체주의의 존립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집단주의다.
모성주의에 근거한 집단주의가, 그리고 그 집단주의를 뒷배로 삼는 사이비구루가 득세하는 시대에 가장 빨리 붕괴되는 것이 그래서 공동체주의다.
사회의 분열은, 통합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감수성의 회복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통합은 집단주의적 솔루션이다. 전술한 것처럼, 모든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통합의 논리다. 그리고 곧 모든 것을 통합시켜줄 전능한 주체를 세우고자 하는 신의 논리다.
공동체주의는 정확하게 그 반대에 있다. 공동체주의는 신을 죽임으로써 성립된다. 이 신의 살해는 곧 사람의 해방이다. 귀자모신을 사람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다. 더는 신적인 존재로 기능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인한 죄책감에 시름하지 않도록, 엄마를 신의 자리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부장의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벗어나, 엄마가 되지 않거나, 엄마가 아닐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되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공동체주의는 어떠한 구조적 역할이 아니라, 바로 개인의 마음에 근거한다. 마음을 억압한 채 각자의 자리에서 전체를 위한 톱니바퀴로서 잘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에게 알려지는 정직한 마음을 통해 타자와 교류하는 것이다.
마음을 함께 나누는 일, 즉 공감은 대표적인 공동체의 특성이다. 그러나 이 공감이라고 하는 것은 동감이 아니다. 우리 편인 동지들에게 동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주의적 자아도취다. 공감은 언제나 우리편과 전혀 다른 타자에게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이처럼 공동체주의란 타자를 정말로 타자로 보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개인의 성숙성에 근거한 것이다. 곧, 집단주의의 매몰 속에 복종하지 않고 개인으로 깨어난 이들만이 나눌 수 있는 현실이다.
사이비구루가 사이비인 이유는 바로 이 깨어남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이비구루는 일종의 거짓선지자다. 사람들이 개인으로 깨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 자신이 조종하고 통제하여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소재가 사라지는 까닭이다. 더는 왕 노릇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신도들이 최면에서 풀려나기를 바라지 않는 컬트 교주와도 같다.
그래서 사이비구루는 개인을 집단주의에 매몰되도록 더욱 열띤 선동을 이루어 나간다. 가상의 적을 끊임없이 창조하여, 두려움을 자극하고, 죄책감을 배양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삶을 실제적으로 위협하는 협박의 주체는 사실 사이비구루가 지시하는 적이 아니라, 바로 사이비구루 그 자신이다. 적폐라고 하는 것이 존재한다면, 언제나 사이비구루 자신이 그 적폐일 뿐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두려운 적을 만들어내어 엄마를 귀자모신이 되게 만들고, 결국 귀자모신 그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게 만든 바로 그 주동자가 사이비구루다.
두려움을 선전하여 이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오만한 선비의 모습, 그것이 사이비구루다.
곧, 그 자신이 사실은 가장 두려워하며 죄책감에 고통받고 있는 어린아이의 이름, 바로 그것이 사이비구루다.
두려워하는 자신의 마음에 부정직한 결과, 사이비구루는 결국 공동체를 붕괴시키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두려우니 다 같이 두려워했으면 좋겠다는, 정말로 어린아이 같은 발상의 결과다.
모두를 지옥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이 발칙한 어린아이의 뺨을 후려치지 못하는 이유는, 가장 인자한 신적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가부장의 저주 때문이다.
개인의 입장에서 이 사이비구루를 바라보면 명확해진다.
단 하나뿐인 내가 이 사이비구루가 조종하는 귀자모신에게 지금 잡아먹히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피와 살이, 사이비구루를 배불리는 양식이 막 되려는 참이다.
이 단 한 번뿐인 나의 시체 위에서, 사이비구루는 웃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묻는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자신을 잡아먹힌 당신의 마음은 대체 어떻겠습니까?"
개인으로서의 자신이 정말로 대체될 수 없는 그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 타자를 잡아먹지 않는 공동체의 문은 열린다.
엄마는 가부장이 만든 성스러운 희생양의 운명에서 해방되며, 사이비구루는 양치기소년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자신의 정직한 마음을 조우할 기회를 얻게 된다.
엄마가 없어도 서럽지 않은, 그래서 엄마 또한 엄마가 아니어도 서럽지 않은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지금 이 조건의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억울하지 않을 시대는 이처럼 귀자모신과 사이비구루를 넘어 사람이 개인으로 함께 깨어나는 그 자리에 있다. 개인으로 함께 깨어나는 세상, 그것이 곧 공동체의 정확한 정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