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다. 사랑이다."
사람을 가장 배신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이 먼저다."
이 말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커다란 설움만을 낳아온 말입니다.
사람을 먼저 챙기려 한다는 '올바른' 자기 자아의 의지를 가장 먼저 챙기고 싶어하는 이들이 자주 발화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이렇게 옮겨져야 정확합니다.
"사람이라는 가치를 깃발로 걸며 맹진하는 내가 먼저다. (그러니 다들 내 말을 듣고, 날 따라.)"
전장의 포화 속에서 가장 앞서 달려가는 기수의 모습은 영웅놀이의 꽃입니다. 모든 아이들은 그렇게 "브링 미 따노스!"를 울부짖는 용사가 되고 싶어 합니다. 무릎이 움찔움찔합니다. 동지들이 하나둘 생겨나면 더욱 신이 납니다. "어벤져스, 어셈블!"을 외치며 우주의 독재자가 퍼붓는 최루탄과 물대포 사이를 뚫고 질주해나갑니다.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거악(巨惡)이 음모론적으로 설정되어야 그만큼 영웅은 빛이 납니다.
갈등과 대립의 전쟁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이유는 이처럼 자기가 용사로 보이기를 꿈꾸는 아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용사의 꿈을 조용히 혼자 집에서 글로 묘사하면 이고깽(이세계에서 고등학생이 깽판치는) 판타지물이 되고, 밖에 나가서 동지들과 행위예술을 이루면 정치게임이 됩니다.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RPG인 셈입니다.
게임은 연극과 같습니다. 게임 속에서는 모든 것이 역할의 기능적 특성으로만 남는 대상화가 됩니다. 그리고 대상화는 사물화입니다. 사람이 실종되는 일은 필연입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사람이 실종된 것이 아닙니다. 미발견된 상태로 남겨진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는, 사람은 언제나 가장 최종적으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결코 먼저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가장 나중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깃발을 들고 달려가지 않습니다. 특정한 용사의 가치를 수호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궁금해합니다. 자기 앞에 놓인 그 모든 기존의 이유들을 기각하며, 자신이 정말로 왜 태어나서, 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마지막 질문, 곧 궁극적 물음에 관심을 갖습니다.
가장 마지막의 것을 향한 거대한 모름의 감수성이 사람의 가장 핵심적인 특질을 형성합니다.
"깨어있는 용사로서 사는 것이 사람이다. 그 용사가 사람을 먼저 챙기는 것이다. 정의의 용사야말로 인간조건이다."
때문에 이러한 도식은 사실 완전한 허구입니다. 아무리 용사로 산다고 해도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용사라고 하는 어린아이들의 가치로 좁게 환원시키고 있기에, 사람은 더욱더 발견되기 어렵게 됩니다. 아는 척하고 있으면 정말로 알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앎은 도취를 낳고, 모름은 감동을 안내합니다.
도취와 감동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설명서를 보고 플라스틱 모델을 자신이 직접 만든 아이가 있다고 할 때, 그 아이가 경험하는 것이 바로 도취입니다.
"아싸! 내가 해냈어!"
정해진 기존의 앎의 설명서대로 실천해서 현실적인 결과를 이루어냈을 때, 그 개인은 스스로의 역량에 도취됩니다. 이것을 자기효능감이라고도 부릅니다. "나는 할 수 있다."의 만족감으로 뿌듯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앎의 도취는 끝없는 유능감의 소비로 이어집니다. 더 잘해내는 자신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할 수 있다."의 연쇄만이 인생 최대의 쾌락적 가치가 됩니다. 필요한 일이지만, 이제는 필요를 넘어 과잉이 됩니다. 때문에 앎의 설명서대로 되지 않는 현실은 그만큼 개인에게 커다란 좌절과 무능감을 야기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마르크스가 제공한 설명서대로 역사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실제의 현실은, 그 앎의 설명서를 따라 자신의 세계를 조립해온 이들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무능감의 소재가 됩니다. 조립에 열정적으로 매진한 만큼, 그 무능감은 받아들이기 더욱 힘든 것이 됩니다. 그래서 좌절한 아이들은 이러한 방향성을 갖게 됩니다.
"나는 제대로 성실하게 노력해왔는데 내가 만들고자 한 그 현실이 실현되지 않은 것은 내 책임이 아니야. 사람들이 잘못된 거야. 사람들이 아직 깨어있지 않고 무식해서, 내 조립을 도와주지 않은 탓이야. 그래, 그렇다면 이 탁월한 앎의 설명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내가 더 쉽게 설명해주자. 사람들을 계몽해서 이 현실을 완성해보자."
위대한 앎의 설명서를 따라 광화문에 세울 커다란 레고 모형을 위해, 모든 이가 잠정적으로 부역자가 되어야 하는 운명이 출현합니다. 아이의 자기효능감에의 도취를 지속시켜주기 위해, 피라미드는 건설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아이의 현실입니다.
모든 심리상담의 접근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과잉된 유능감의 좌절과 함께 정직한 무능감을 자기의 것으로 수용함으로써만이 성장한다."
곧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할 수 없다."가 사람을 발견하게 해주는 촉매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앎의 설명서대로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원래 삶은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능감을 자기 비난의 소재로 갖고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라고 하는 가장 겸손한 태도를 출현시킵니다.
그리고 이 "할 수 없다."의 거대한 모름의 태도로 말미암아, 삶이 감동으로 화합니다.
감동의 실존심리학적 이해는 바로 '경외감(awe)'입니다. 『종교없는 삶』의 저자인 필 주커만은 이 경외감이 삶의 핵심이자 종교성의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종교가 제도화되어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게 되면서 그 안에서 경외감은 실종되어 왔고, 이제 사람들이 더는 종교를 찾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그는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은 종교가 아니라 종교성, 바로 이 경외감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 놀라운 자연풍경을 보며 감동받는 핵심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거대한 자연에 대해 자신들이 "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다만 아름다울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나아가 이 "할 수 없다."의 감각은 사람들이 책임감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애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현재 스스로 일어나고 있는 저 엄청난 일들과 자신의 능력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책임질 것이 없습니다. 그 자체로 온전한 것들입니다. 이 사실 앞에서 사람들은 해방감을 경험합니다.
경외감이란 이처럼 삶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사건에 대해, 더욱 개방되고, 더욱 겸허해짐으로써, 온전한 자유를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외감을 느끼는 만큼, 삶은 한없이 감사한 것이 됩니다.
"할 수 없다."가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감사함의 감각을 개화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이 이 세상에 온 이유입니다.
곧, 이제야 발견된 사람의 의미입니다.
사람은 감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할 수 있다."로 자신이 이룬 삶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속에서 자신에게 이루어진 삶에 감사할 때, 그때서야 개인은 자신이 사람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예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던 이의, 또는 반려동물의 죽음 앞에 서게 되었을 때, 한 개인은 정말로 실감하게 됩니다.
자신이 이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역량껏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는 일은 원래 없었다는 사실을.
그것은 그저 흐르는 눈물이 알리는 신비였다는 사실을.
그 신비를 향해, 사랑한다고 말을 건네고,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살내음을 맡고, 뺨을 비비고, 가득 안을 수 있었던 그 모든 것이 정말로 기적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이 기적의 감동을 누리기 위해 자신이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온 것이라는 사실을.
할 수 없는 것들 앞에서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 속에서 아이의 자기도취가 깨어지고, 감사의 눈물이 눈을 맑게 씻어줌으로써 눈앞의 신비를 보게 됩니다. 문득 거대한 모름의 미소를 만나게 됩니다. 그 미소가 이 우주의 전부라는 것을 왠지 모르게 그냥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한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려고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사랑하고 싶어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가장 나중의 것입니다. 가장 마지막의 피조물입니다. 마지막의 것은 그 앞선 것들을 통째로 돌아봅니다. 그 모든 창조된 것들에 감동받으며 더없이 상냥한 시선을 전합니다.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법칙으로만 돌아가는 이 회색빛의 기계론적 우주에, 이 냉엄하고 척박한 세상에, 그렇게 사람이 마지막으로 온 것입니다. 사람이 최종적으로 이 모든 것을 긍정하는 미소를 전하러 온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신비였다는 것을 이해하는 시선으로, 이 모든 것의 의미를 밝히러 온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 우주에서 헛되고 헛되이 사라져갈 먼지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러 온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이었다는 그 의미를 전하러 온 것입니다.
그 모든 당위의 구조에 균열을 내고, 그 모든 운명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사람은 사랑이라고 하는 절대적 치트키를 들고 피조물의 최종형으로서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그렇게 온 것입니다.
더욱 정확하게는, 사람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움직이면 사랑이고, 사랑이 멈춰서 형상을 갖추면 사람입니다.
사람은 사랑의 명사형이고, 사랑은 사람의 동사형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사람이 가장 나중의 것입니다.
사랑이 언제나 가장 나중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짧은 심리적 우화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주변으로 완벽한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자신의 세계에 들어오지 말라는 눈빛으로 모든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은 그가 그린 원 밖으로 더 큰 원을 그려, 그가 그저 그 안에 있게 했다."
사랑은 가장 마지막에 그려진 원입니다.
사랑이 가장 나중의 것인 이유는, 앞선 모든 것을 그 안에 담기 위해서입니다.
그 품에 가득 안긴 가장 사랑스러운 것으로서 그 모든 것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은 스스로가 무엇인지를 밝힘으로써, 그 모든 것을 밝힙니다.
사랑은 위대한 가치가 아니고, 갈등과 대립으로 꽃피는 변증법의 영웅주의가 아니며, 설명서를 따라 실천할 수 있는 자기역량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저 스스로인 것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그저 스스로인 사람의 의미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그 뜻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또한 이 모든 것의 의미입니다.
이 모든 창조된 것의 희망이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은 가장 거대한 원을 그려 이 우주를 완결하는 존재입니다.
"사랑만이 있었다."
시간의 끝에 이렇게 영원한 미소를 남길 그 이름이 사람입니다.
"나는 왜 태어나서, 왜 살아가고 있을까?"
태어난 것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살아가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할 수 없어서, 사랑합니다.
할 수 없어서, 사랑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너무 좋다.
이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할 수 없이 사람이라서, 사랑스러운 일입니다. 좋고 좋아서 가장 좋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