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같은 세상

"주인공을 찾아서"

by 깨닫는마음씨




우리는 세상에 빠져 산다. 오늘날에는 특히나 그러하다.


세상이라고 하는 것의 속성은 영화와 비슷하다. 그래서 세상에 빠져 사는 우리는 곧 영화에 빠져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왜 요즘 세상 사는 일이 이토록 재미없는가?"


영화가 재미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무척이나 재미없는 영화를 정확하게 닮아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재미없는 영화에 빠져 있게 되는 이유는, 상영하는 영화가 이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재의 스크린쿼터제다.


여기에는 다른 재미있는 문화적 소재들은 모두 다 시공간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금지하고, 억압하고, 봉쇄한 채, 자신들이 제공하는 영화만을 관람하라고 요구하는 주체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강제적으로 봐야만 한다.


관람을 종용하는 주체 자신들이 독점적인 주인공으로 나와 모범적이고 교훈적인 정의의 용사로 활약하는 그 대한뉴스 같은 영화를, 유치하고 구태의연한 중2병 보유자들의 그 만년 대장놀이 군상극을.


오늘날 포탈사이트와 신문, 라디오, TV 등지의 뉴스를 보면, 다 이 재미없는 영화의 주인공들이 모든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다. 관람자들의 호감과 비호감,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이들에게만 관심이 집중되도록 판이 짜여지고 또 돌아간다.


"그치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오카상, 나한테 관심도 없는 걸!"이라며, 각종 사건사고의 소재를 총동원하여 끝없이 엄마의 관심을 얻어내려는 아이의 모습과도 같다. 질리는 일이다. 질릴 정도로 반복되는 지루한 일이다.


이럴 때 펼쳐지는 우리의 삶은, 끝없이 반복재생되는 이 남의, 남에 의한, 남을 위한 재미없는 영화 앞에서, 지루하나 지루하지 않은 척, 마치 재미있는 것을 하고 있는 척 우리 자신을 속이는 영화관 속의 삶과 같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해해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는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속도록 만들어졌으니 속을 수밖에 없다. 곧,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게 되는 결과까지가 이 재미없는 영화의 보급자들이 의도한 효과다.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는 '자발적 거짓말' 속에 있을 때, 그 거짓말은 진실화되며, 우리는 그 진실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인지부조화의 현상이다. 그것이 진실이라서 그것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고 있으니 그것이 진실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재미없는 영화의 보급자들이 뻐꾸기처럼 우리의 삶의 터전에 남긴 그들의 알은 마치 우리의 알인 것처럼 수호된다. 우리는 지루함을 감수하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물며 남이 낳은 알의 수호자가 된다.


혹시나 자리를 떠나게 되면 알이 도둑맞거나 상처를 입게 될까봐 커다란 죄책감을 경험한다. 그 죄책감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알의 수호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끈덕지게 버티며 앉아 있는 모습을, 선비같은 인내의 미덕이라고, 버티는 삶의 가치라고 말한다.


남이 낳은 알을 위해, 남의 자식을 위해, 남이 주인공인 현실을 위해, 이처럼 우리는 지루함을 감수하며 영화관에 자발적으로 앉아 있다. 다만 죽지 못해 사는 권태로운 삶을 자발적으로 살아간다. 재미없는 영화의 보급자들이 의도한 이 '자발적 노예화'의 효과를 성공적으로 달성한다.


남이 주인공이고 자신은 노예인 세상, 이것만큼 우리에게 재미없는 현실은 없다.


심지어 남이 항상 독점적인 주인공이기까지 한 세상, 이것은 절망의 다른 이름이다.


나아가 세상을 사는 일이 이토록 절망적으로 재미없는 본질적인 이유, 이는 동어반복의 이유다.


세상을 사는 일이 재미없는 이유는 바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곧, 세상을 진짜로 여기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허상이다. 텅 빈 광장과 같다. 다만 거기에 커다란 스크린이 걸려 있다.


세상을 진짜로 여기며 산다는 것은, 모두가 그 광장에서 반복재생되는 동일한 영화만을 관람하며, 그 영화가 실제의 현실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재미없는 허구의 영화에 몰입함으로써, 영화에 담긴 남의 의도를 따라, 남이 독점적인 주인공인 현실을 더욱더 우리 자신의 실제적인 현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나의 세계'를 잃게 된다.


'나의 세계'를 마음이라고도 부른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으니, 우리는 더는 중요한 존재일 수 없게 된다.


주인님에게 복종하는 자동기계와 같다. 여러 매체들에서 자주 '예언되는' 디스토피아의 모습이다. 우리가 '나의 세계' 곧 마음을 잃음으로써 얻게 되는 현실이다.


세상에 빠져 산다는 것은 곧 남을 주인공으로 추인하며, 그 남을 주인님으로까지 섬기게 되는 현실을 유도하는 영화에 빠진다는 것이다. 영화의 보급자들이 의도하는 이 세뇌의 효과에 자발적으로 깊게 동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을 뜨고 똑바로 보면 그 실체는 그저 텅 빈 광장이다. 빛과 소리의 현란한 마술도 불꺼진 무대의 적막함을 감출 수는 없다.


세상에는 공허함만이 있다.


이 공허함을 가장 크게 느끼는 이들이, 주인공이 되려는 의도를 갖게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관심을 얻어내어 자신을 주인공으로 세우고자 한다. 그렇게 광장으로 사람들을 모은 뒤, 죄책감을 자극함으로써 사람들이 광장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만든다. 사람들이 떠나가면 자신이 더는 주인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금 커다란 공허함 속에 홀로 남겨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곧, 공허함을 가장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사람들을 이용해 주인공을 꿈꾼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대신에 세상 사는 일이 공허해지도록 만든다.


그러니 빨리 정직하게 인정될 필요가 있다.


세상은 원래 공허한 곳이다. 세상에는 내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나일 수 있는 그 누구도 없다. 그저 텅 빈 구조다.


이러한 의미의 세상을 다시 풀어 말하면 바로 '보편적 세계'다. 이에 대비되는 '나의 세계'란 바로 '상호주관적 세계'다.


보편적 세계란 것은 없다. 그것은 최고의 허상이다. 모든 세계는 그 세계를 체험하는 이를 통해서만 상호적으로 개방될 수 있는 철저하게 주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개인의 수만큼 세계가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각기 고유한 체험을 가진 개인인 만큼 세계는 가능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개인이 된다는 것은 또한 마음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 산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체험하며 사는 이가 바로 개인이다. 곧, 개인은 '나의 세계'를 체험하는 동시에, 같은 의미로서 마음을 체험하며 사는 이다.


이처럼 '나의 세계'를, 곧 마음을 살지 않는 이들이 그 대신에 집단주의적 대체재로서 만들어낸 구조, 그것이 세상이다.


그래서 세상을 살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내가 있는 나의 세계를 산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가 있어야 재미있어진다. 내가 빠져 있기에 세상은, 텅 빈 광장은, 관심을 강제로 착취하는 남이 주인공인 영화는 근본적으로 재미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는 재미를 회복하기 위해 이 나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허상의 영화관 밖으로 나가면 진짜 나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러한 요청은, 결국 우리를 집 밖의 광장으로 나오게 만든 재미없는 영화의 보급자들과 동일한 목소리다.


"밖으로 나오면 진짜가 있습니다! 다들 지루한 가짜에서 벗어나 진짜를 찾으세요!"


그러한 선동의 목소리를 따라 광장에 모여든 우리가 경험하게 된 것은 더 큰 지루함이다. 그 선동자들만이 재미를 보는 별[인기스타]이 되며, 우리는 더욱더 자신을 별로 볼 것 없게, 즉 별볼 일 없게 느끼게 된 현실이다.


진짜를 찾으려고 하면 언제나 재미없는 일은 반복된다.


선후관계를 뒤집을 필요가 있다.


재미있는 것을 하면 거기에서 진짜가 찾아진다.


세상, 즉 '보편적 세계'를 진짜라고 믿으며 거기에 머물러 있으니 지루해지는 것이다. 이 영화관 속 삶이 대단히 재미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며, 지금 우리 자신에게 재미있는 것을 바로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그 재미 속에서 어느새 우리는 나로 서 있게 된다.


재미있는 것이란 곧 관심가는 것이다. 관심은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다. 즉, 현재 마음이 향하는 쪽으로 움직이면, 그것이 재미를 낳는다. "아, 재미있다."라며 삶을 실감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자연스럽다.


억지로 세상 밖으로, 즉 영화관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관 속에서 터지는 하품을 의식하고, 그 하품에 정직하면 행위는 일어난다. 영화관 밖을 향한 아주 작은 행위라도 실현된다면 거대한 자각은 순식간에 찾아든다.


우리는 영화(映畵)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화(榮華)가 되기 위해 온 것이다.


영화로운 이 삶을 누리러 온 것이다.


삶에서 가장 귀하게 빛나는 주인공으로 온 것이다.


자기 어린 시절의 축제와도 같은 영웅놀이의 향수에 사로잡혀 있는 다 늙은 광장의 광대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광대자리를 세습한 그들의 자식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내가 주인공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언제나 나다.


자신이 주인공임을 망각하고, 지루한 광대들을 주인공으로, 나아가 주인님으로 모시고 있는 이 영화관 속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심정은, 캣츠 영화를 보고 있는 고양이의 심정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를 의심하게 될 정도로 절망적이다.


영화같은 세상에서 펼쳐지는 일이다.


재미없는 영화가 펼쳐내는 일이다.


나 없는 세상의 비극이다.


빠져 산다는 것은 중독이다. 중독은 반드시 그것을 해야만 한다는 당위다. 그래서 최고의 중독은 책임감 중독이다.


재미없는 영화를 책임감으로 보고 있는 일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없다.


우리 자신보다 더 정의롭고 인품있는 남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줘야 하며, 그래야만 우리도 그들을 통해 더 좋은 세상에서 살게 되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식의 이 세상이 부과한 책임감은 전부 다 허상이다.


"저 훌륭하신 양반님네들과 그 분들의 고매하신 자제님들의 뒤치다꺼리를 해드리면, 하모, 그 분들이 알아서 우리에게 안 잘해주시겄나."


경제적 낙수효과는 기필코 부정하려고 하는 이들이 이 유교주의의 낙수효과는 기어이 세뇌하려고만 한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을 살짝 변주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살아야 세상이 사라진다."


예수가 그러했고, 붓다가 그러했듯이, 나는 인간의 마음을 억압하는 세상[허상]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온 것이다.


단 한 편의 재미없는 영화만을 끝없이 상영하며, 모두가 관람석에 앉아 버티는 일을 강요하기까지 하는 이 독재의 영화관을 문닫게 하기 위해 온 것이다.


세상은 재미없는 것이다. 동시에 세상은 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재미와의 동의어다.


나와 관련된 것은 언제나 재미있다. 혈액형, 별자리, 심리검사 등을 우리가 좋아하는 이유다. 나를 알아가고, 나로 살아가는 일은 그 무엇보다 재미있다.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처럼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실감하며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저 무수한 나의 세계들을 열어내기 위해 온 것이다.


"재미있게 살아야 재미없는 것이 사라진다."


자연스러운 이야기다.


자연스럽게 찾아진 주인공의 삶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람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