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령의 상자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

by 깨닫는마음씨



아이들은 늘 적을 필요로 합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이 어른인 척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그러합니다.


삶의 모든 것을 딱딱 나누어 떨어질 수 있는 이분법으로 보는 것은 자기를 어른으로 착각하는 아이들의 핵심적인 특성입니다. 그래야 자신이 불안하지 않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아이들의 근본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어른은 현실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다는 오해입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도저히 파악하고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의 미지성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만이, 곧 불안을 자유로 살아냄으로써만이 스스로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합니다.


어른은 불안과 친밀해진 존재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실제의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이분법적으로 현실을 보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어른인 척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은 오히려 이분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자신이 똑바로 살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닐까 늘 혼날 것 같이 두려워하는, 또한 자기 삶을 의존할 모종의 가치 및 규칙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늘 불안해하는 자신의 상태를 극복하려고 하게 됩니다. 극복될 수 없는 사실을 허구의 방법론으로 부정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임수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적은 필수입니다.


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분법을 통해 규정되어, 아이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측면의 속성을 모두 다 갖고 있는 것으로 상정되는 나쁜 대상입니다. 곧, 이분법의 아이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상자와 같습니다.


적이 있는 만큼, 아이들은 자신을 착한 존재로, 곧 똑바로 살고 있는 존재로 인식하며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적을 창조하고 또 처벌하는 이 작업에 노련해지는 일을, 이분법의 아이들은 자신이 어른이 된 증거라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화형대에 매달린 마녀에게 돌을 던지며, 자신이 한 걸음 어른에 가까워진 것 같은 뿌듯한 흥분감을 느끼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정말로 아이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힘에 대한 도취일 뿐입니다.


어른을 동경하는 아이들에게 어른이란 힘의 주권자입니다. 그렇게만 보입니다. 이 아이들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더욱 전능하게 행사할 수 있게 된다는 것과의 정확한 동의어입니다.


모든 권력에 대한 추구는 이처럼 어른이 아니라, 어른에 대한 착각의 굴절상을 동경하여 어른인 척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역동입니다.


그렇게 얻은 권력으로 이 이분법의 아이들이 집중하는 활동은 바로 적의 규탄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결코 정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안심하기 위해서입니다.


안심할 수 있는 현실이란 물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적을 찾아내어 완벽하게 물리치면 자신이 안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이는 분명 착각입니다. 적을 물리칠 수 있는 힘으로 인해 우리가 안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는 정말로 안심하게 됩니다.


적이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는, 이 아이들이 이분법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우리 편과 나쁜 놈의 평면적 구도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적이 정말로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분법의 시선이 끝없이 적을 투사해내어 이분법의 주체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이분법에서 벗어나 이 모든 것을 바라본다면, 다 필요의 문제로 보입니다. 안심을 얻기 위한 정당한 인간의 필요들이 서로 교류되고 있는 현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의 발견 자체가 우리에게는 안심이 됩니다. 여기에는 안심을 얻고자 하는 나와 같은 마음만 있지, 적이란 없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주제의식을 작품 전체에서 관통하고 있는 『빈란드 사가』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적이 있다고 착각하는 아이에게 그의 아버지가 이러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우리에게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아주 쉽게 이해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 또한 필요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적을 필요로 합니다. 나쁜 적이 있어야 우리가 좋은 존재처럼 안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은 분명하게 우리의 안심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그렇다면 적은 이미 우리에게 적으로 불릴 만한 나쁜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좋은 대상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다양한 정치적 견해에서 상정되어 온 우리의 주적들도 적이 아님은 분명해집니다.


먼저 미국은 분명 우리의 주적이 아닙니다. 반미무력시위를 하다가 전경에게 잡히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뉴발란스 운동화를 통해 안심을 제공해주는 소재지인 미국은 결코 적일 수 없습니다.


일본 또한 우리의 주적이 아닙니다. 반일불매운동을 하다가 성나고 지친 심신을 환기시켜줄 플레이스테이션5를 통해 안심을 제공해주는 소재지인 일본은 결코 적일 수 없습니다.


아마도 북한 역시 우리의 주적이 아닐 것입니다. 북한을 한 민족이라고 부르며 표용할 수 있는 인격적 성숙의 만족감과 함께, '나는 그래도 저렇게 밥도 못먹고 살 정도는 아니라서 참 다행이다.'라는 안심을 제공해주는 소재지인 북한은 결코 적일 수 없습니다.


이렇듯 살펴보면 정말로 적인 것이 잘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주적을 찾아야 한다면 아마도 이것이 우리의 주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안심을 제공해주지 않는 것, 그것은 바로 '적이 있다.'라고 하는 우리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뿌리내리고 있는 그 생각만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즉, 적이 있다는 망상이 바로 우리의 주적입니다.


망상은 망령이 만듭니다.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고 떠도는 것이 망령입니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까닭에 살지도 죽지도 않은 것이 망령입니다. 이처럼 이분법이 봉착하는 것은 언제나 이도저도 아닌 모순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망령을 따라 살며 망상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됩니다. 모순 속에서만 시름하며, 도무지 왜 사는지를, 나아가 어떻게 사는지를 모르게 됩니다. 삶이 실종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망령(亡靈)은 망(亡)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삶이 망했습니다.


그렇게 자기들만 망하기 억울하니 남들의 삶도 망하게 하려는 것이 망령입니다. 자기가 망했던 것과 똑같은 삶의 방식을 여러 수사학으로 예찬하여 남들도 그 방식을 채택하게 함으로써, 다 같이 망하게 하려는 것이 망령의 유일한 의도입니다. 같이 망하면 덜 불안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망령, 선비의 망령, 우국지사의 망령 등, 민족주의와 집단주의가 낳은 이 망령들은 어벤져스와 같은 영웅의 서사를 입고 끝없이 부활합니다.


태극 문양을 가슴에 단 K-수트를 입고 아이언맨은 남산타워 위를 날아다니며, 캡틴 아메리카는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독립만세의 절규와 함께 광화문 광장을 달려갑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이 나란히 함께 달려갑니다. 엄복동의 자전거 소리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노랑나비가 날아다니는 봄날의 하늘 아래, 빼앗긴 들을 거닐었던 지난 근현대사의 특정 정치인들과 특정 문화예술가들도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넥타이를 이마에 질끈 동여맨 독수리 180형제도 은하계를 지키는 일을 잠시 멈추고 선배 히어로들의 뒤를 밟습니다.


이 대인파로 인해 아마도 교통문제가 있을테니, TBS에서 그 지부인 스타벅스 현장회의실을 활용해 독점중계합니다. 민족의 정기를 담은 아메리카노처럼 그윽하게 이 현실을 전파합니다.


그 향기를 따라, 『대망』의 오다 노부나가도, 『은하영웅전설』의 양 웬리도, 『삼국지』의 유비 삼형제도, 우리 꿈많은 586 운동부 소년소녀들의 탐독서에 나오던 허구의 인물들도 하나둘 왠지 모르게 등장해 함께 이 길 위를 달려나갑니다.


어쩌면 예수도 입장할지 모릅니다. 특정 정치인과 그 가족들이 골고다에서 같이 막걸리를 나눈 동지로서 예수와 십자가도 나눠 짊어진 채 베로니카의 천 대신에 하얀 물티슈로 깨끗하게 닦인 길로 들어설지 모릅니다. 다행스럽게도, 여기저기 소환되느라 아물 새 없는 예수의 상처에 발라드릴 빨간약을 사용할 수 있는 전문적 자격을 갖춘 이들입니다.


모두가 다 우리 편입니다. 같은 뜻의 동지들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것은 다 우리 민족이었을 것 같습니다. 환단고기가 아마도 맞을 것입니다.


도무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그 실체없는 주적을 향하여, 그저 이 영원한 우리 편의 맹진만이 웅장하게 펼쳐집니다.


끝없이 펼쳐집니다.


성스러운 이 집단주의의 기운에 잔뜩 도취되어 비틀거리면서도, 그래서 가끔 발을 헛딛어 넘어지면서도, 다시 또 일어섭니다. 불굴의 의지입니다.


자꾸만 일어서는 좀비와 같습니다.


너무 촌스럽고 민망해서 이제 좀 누워 있었으면 좋겠는데, 바득바득 우기며 일어나 벌거숭이 패션쇼를 감행하는 임금님과도 같습니다.


하나의 디오라마처럼 전시된 상자 속에 그려진 장면입니다.


그 상자의 이름을 쿄고쿠 나츠히코의 명작의 이름을 살짝 변주해서 이렇게 명명해보겠습니다.


'망령의 상자'


망령의 상자 속에서는 늘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지붕뚫고 이불킥을 하게 될 형태로 망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지금 이 망령의 상자 속에 놓여 있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처럼, 망령의 상자 또한 그 상자 안의 것이 관찰되기 전까지는 그것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중첩되어 있는 상태의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즉, 살지도 죽지도 않고 다만 망한 상태를 창출해냅니다.


그래서 이제 바라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정직하게 직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상자 안의 우리 자신을 결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지금 망령의 상자 안에 있는 것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기에 곧 죽어가는 것이지, 살지도 죽지도 않은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이 곧 살고 싶은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망(亡)한 것이 아니라, 망(望)하고 있습니다.


안심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적이 없는 현실에서 정말로 안심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그 소망대로, 망령의 상자를 열고 고양이를 밖으로 빼내면 됩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가상의 적에 의거한 가상의 전쟁과 가상의 축제만 반복하는 망령(妄靈)든 곳에서 나와, 살아 있는 것을 살고 싶은 대로 살아 있게 하면 됩니다.


우리를 살고 싶은 대로 살아 있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망령의 상자입니다. 곧, 망상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적(籍)을 두고 있는 적(敵)입니다.


그래서 이 적은 싸워 이겨야 할 적이 아니라, 그 밖으로 다만 도망쳐 나와야 할 적입니다. 가스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독한 가스는 싸움의 대상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상자 안이 가스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는 그 가스가 우리를 살게 하는 호흡의 소재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렇게 가스실을 우리의 고향처럼 삼아, 망령이 내뿜는 가스를 우리 자신의 숨결처럼 호흡하는 동안, 우리는 그 가스에 실린 망령의 생각을 우리 자신의 생각이라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망상의 정체입니다.


우리가 가장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또 우리가 가장 속해있는 뿌리라고 생각해온 그것이, 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라보고 이해할 때, 상자의 문은 열립니다.


고양이는 적이 없는 현실을 향해 튀어 나갑니다.


적(籍; 敵)이 없어서 자유롭고, 그 자유가 이제야 찾게 된 진짜 고향일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아 있게 되는 당연한 축복으로 가득할 곳입니다.


민족의 명절을 맞아, 민족주의의 망령으로부터, 망상으로부터 해방되는 뜻깊은 새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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