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온전함이다

"다 이루었도다"

by 깨닫는마음씨




온전함이라는 단어는 사랑, 삶, 자유, 종교, 영성 등과 같이 모종의 고급현실을 지시하던 단어지만, 이제는 가장 평면화되어 더는 감동이 없어진 대표적인 단어 중 하나다.


특히 오늘날 영성과 온전함의 결합은 상시적인 슈퍼마켓 판촉상품과도 같다. 365일 내내 "오늘만이 기회!"라고 써있는 전단지 맨 위를 장식하고 있는 상품의 소개문구는 아마도 이러할 것이다.


"이것만 얻으면 당신이 킹왕짱짱맨! 어떤 자극에도 흔들림 없이 늘 평온한 정서상태가 유지되며, 당신이 원하는 것에 정신을 집중하기만 하면 끌어당김의 법칙에 따라 그것은 당신의 것이 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에 늘 하하호호 즐거움이 넘치게 되는 이 마법은 바로 영성! 당신이 그 주인공입니다. 영성을 통해 당신이 주인공으로 살게 되는 온전함의 세상을 누려보세요."


지난 싸이월드 일기장이나 카톡 프로필과 동격이다.


동등한 충격으로 우리에게, 우리가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찬연하게 알려준다.


때문에 우리는 왼팔에 봉인된 흑염룡의 저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할 필요가 있다. 남들과 같은 선량한 왼팔을 돌이킬 필요가 있다. 곧, 온전함의 의미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온전함이라고 하는 것이 무협지 속 주인공의 상태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온전함이 중2병을 앓는 애어른들의 망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이해다.


온전함은 실제적인 상태다.


살아가고 있는 누구라도 최소 한 번은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실제적인 상태다.


너무 놀라지 않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온전함은 죽음의 상태다.


죽음의 다른 이름이 온전함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고통과 비극의 그림이 아니다. 또한 형이상학적 우주관의 설명을 위한 추상적 개념도 아니다.


죽음은 삶이 완성된 순간의 실제적인 상태다.


곧, 죽음은 우리가 삶에서 완성감을 느끼는 그 순간의 상태다.


우리가 하루를 재미있게 보낸 어느날, 아 참 좋았다, 라고 말하며 부족할 것 없는 충만감으로, 그렇기에 더 원할 필요도 없는 경쾌함으로 잠이 드는 순간, 우리는 분명하게 죽음의 감각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곧, 온전한 느낌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온전함은 의미와 관련된다.


의미있는 결과로서 삶을 돌이켜 이해하게 될 때 경험되는 것이 곧 온전함이다.


의미있다는 것은, 그것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삶이라고 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아주 아름답게 완결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희극이었든 비극이었든 간에, 분명한 감동으로 이 우주에 그 자취가 별자리처럼 아로새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 이루었도다."


그래서 이것은 정확한 온전함의 목소리다.


해낸 것이다.


도달한 것이며, 만나진 것이다.


그렇게 온전한 것이다.


온전함이라고 하는 것은, 곧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삶이 성공적으로 완수된 그 의미다


때문에 의미는 언제나 하나의 삶의 끝에서야 알려진다. 특정한 좌표를 미리 목표로 정해놓고 모든 여정을 거기에 맞춰 억지로 끌어가고자 하는 가치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의미는 늘 결과로서의 의미다.


우리는 삶의 끝이 죽음이라고 통속적으로 말하곤 한다. 그렇다면 삶의 끝은, 살펴본 것처럼 의미며, 또한 온전함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삶의 과정은 재미고, 삶의 결과는 의미다.


재미는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 즉, 재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완성되면 재미가 없다. 이것은 재미의 핵심적인 속성이다.


그렇게 우리는 일견 온전한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삶에 대해, 우리가 살아감으로써 최종적으로 그것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해낸다. 이 말은, 우리로 인하여 이 모든 것의 온전함은 개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아니면 이 우주는 미완이다.


재미있지만, 아직 의미있게 드러나지는 않은 것이다.


"다 이루었도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대체 어떠한 것을 멋지게 해내고 있었는지에 대한 그 이야기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진 거시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평생 우리가 살아가다가 그 끝에 가서야 한 번 깨닫고 뿌듯하게 죽게 되는 일생일대의 과업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이것은 물론 궁극적인 이야기지만, 동시에 대단히 미시적인 이야기다.


우리가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마음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음을 체험해가는 일을 우리는 곧 삶이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삶의 끝이 죽음이고, 의미며, 온전함이라면 마음 역시 같다. 마음의 끝은 죽음이고, 의미며, 온전함이다.


또한 삶과 같이, 마음의 과정은 재미며, 마음의 결과는 의미다.


마음은 우리가 그 마음을 산 결과로서 반드시 온전함으로 드러나게 된다. 모든 마음은 마음의 체험자를 통해 절대적으로 온전하게 알려지게 된다.


여기에서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작과 끝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즉, 동반의 의미다.


때문에 마음을 체험한다는 것은,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여여한 도사연의 미소를 띠고 마음을 관조하는 일이 아니다. 또는 온전함과 같은 것을 가치로 정해놓고, "괜찮아, 그것도 괜찮아, 온전해." 등의 주문을 반복적으로 발화하며 그 가치에 따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특정한 방법론을 숙달되게 실천하는 일도 아니다.


마음을 체험한다는 것은 다만, 지금 경험되는 마음과 같이, 즉 다른 마음으로 바꾸지 않고 지금 이 마음으로 죽겠다고 하는 것이다. 운명공동체로서 끝까지 함께 가겠다는 것이다. 지금 이 마음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것은 다 의미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이 마음의 의미를 향해서만 가장 개방되어 움직이는 일이 바로 마음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무슨 무협지 주인공이 진정한 진리를 위해 심각하게 열중해야 하는 그러한 일이 결코 아니다.


지금 이 마음으로 죽겠다고 하는 태도가 실제적으로 작동할 때, 그것은 필사적이고 치열하며 인내하는 태도와는 대단히 거리가 멀다. 그러한 모습은 오히려 마음을 체험하려 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려는 부모와 같은 입장을 취할 때 생겨나는 모습에 가깝다.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를 어떻게든 참고 버텨내며 이 아이를 좋은 아이로 만들겠다는 식의, 특정한 가치를 목표로 삼아 생겨난 고행의 모습이다.


마음을 동반하여 정말로 체험하는 이는 오히려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마음을 재미있게 느끼게 된다. 가볍고도 경쾌하다. 심각함이 빠지고 장난기가 밀려온다. 마음의 과정은 재미고, 그 결과는 의미인 까닭이다. 당연하다.


이를 아주 쉽게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그저 재미있게 살고 있으면, 그 끝에 의미가 알아서 찾아오게 된다.


삶의 끝은 죽음이듯, 재미의 끝은 의미다. 이 또한 당연하다.


우리는 재미있게 살지 않기에, 죽음의 다른 이름인 의미를, 곧 온전함을 체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즉, 정말로 살지 않기에, 정말로 죽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살지도 죽지도 않은 모습을 바로 좀비(living dead)라고 부른다. 재미도 의미도 없는 모습이다.


좀비는 특정한 가치를 따라서만 맹목적으로 움직인다. 이데올로기는 좀비를 양산하는 가장 효율좋은 주술이다.


그래서 좀비에 대한 진단은 온전함의 상실이며, 그 처방은 재미의 회복이다.


좀비에게는 제대로 죽을 수 있는 기회가 회복되어야 한다. 즉, 제대로 의미있고, 제대로 온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재미가 회복되어야 한다. 즉, 제대로 살 수 있는 기회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삶을 있는 그대로의 과정으로서 체험할 필요가 있다. 바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특정한 가치지향적 태도로 기만하지 말고, 동반의 태도로 정직하게 체험할 필요가 있다.


이를 돕는 가장 좋은 이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온전함을 죽음의 다른 이름으로 알아듣는 감을 잡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러하다.


우리가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좀비가 되어 있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그 가치를 따르도록 종용하는 공갈과 협박이 작동하고 있다. 이 공갈과 협박에 못이겨 우리는 결국 온전함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 모든 공갈과 협박의 핵심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다.


"너 그렇게 살면 죽을 줄 알아!"


특정한 가치를 따르지 않으면 우리를 죽일 것이라고 우리에게 죽음에의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압박 때문에 우리는 마음놓고 살지도 못하며, 마음편히 죽지도 못하는 좀비의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감을 잡고 이를 다르게 알아들을 수 있다.


"너 그렇게 살면 온전할 줄 알아!"


우리의 삶을 공포로 지배하고 있던 모든 진술이 변화된다.


"엄마 말 안 들으면 너 고아원에서 혼자 온전해질 거야."

"그렇게 계속 말썽부리면 결국 온전하게 될텐데."

"너 같은 놈은 뭘 해도 온전할 팔자다. 에이, 퉤."

"너 내가 반드시 온전하게 만들 거야!"

"쯧쯧, 제 분수 모르고 온전할 놈 같으니."


이것이 다다.


다 이루었다.


재미도, 의미도, 여기에 다 있다.


재미가 이끌어 의미가 찾아진 곳, 그 자리가 다 이룬 곳이다.


삶과 그 삶의 끝이, 곧 삶과 죽음이 하나인 자리다.


거기에서 피어오르는 한 조각의 가벼운 웃음을 우리는 온전함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반드시 그 끝에 만나게 될 실제적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가장 끝에서도 온전할 것이다.


어디에서도 웃을 수 있는, 늘 온전한 존재일 것이다.


"다 이루었도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대체 어떠한 존재로 멋지게 만들어져 있었는지에 대한 그 이야기다.


해낸 것이다.


도달한 것이며, 만나진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인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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