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글리 선데이와 어글리 슈즈

"예쁜 세상 속 못난 나의 자유"

by 깨닫는마음씨




다들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리라 믿었던 때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만 열심히 하면 세상이 늘 웃어주리라 기대했던 때도 있을 것입니다.


서로를 향해 넘치는 친절과 호의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으리라 보고 싶었던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빛나는 일요일의 세상을 그렇게 꿈꾸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글리한 나날입니다.


모든 것이 사랑스러울 것만 같던 그 예쁜 세상은 아직도 집밖 어딘가에 있는 것만 같은데, 어쩌면 자신이 그 예쁜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화창한 일요일에도 피곤하고 무기력한 이 몸이 그 심증을 강화시켜줍니다. 못난 몸이고, 못난 자신입니다.


이처럼 왠지 모르게 못나게만 느껴지는 우리 자신이 밖으로 나가면, 이 세상 예쁜 일요일은 우리의 독으로 인하여 나빠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못남을 전염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글리 선데이의 경험은 우리만으로 충분합니다. 세상은 계속 예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현관 앞에 놓인 어글리 슈즈는 우리를 유혹하고 있을까요. 기어이 이 못난 존재가 밖으로 나가 자신만큼이나 추하고 나쁜 일요일을 만들어야 되는 사명이라도 있는 것처럼, 왜 관심의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을까요.


어글리한 마음에 늘 지는 자신은 정말 못난 존재 같습니다. 어글리하게 자신만 생각하며 결국 밖으로 나가고야 맙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가 어글리 슈즈를 신고 밖으로 나가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한때의 예쁨의 소재로 작동하는 유행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무리 주사위를 굴려도 우리가 그것들을 얻을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 사랑과 인정, 배려, 지지, 공감 등의 단어들에 이제 그만 속고자, 위악적으로 조금 삐뚤어진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즉, 우리는 좋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인 예쁨을 계속 추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좋은 것들에 관심없는 척하며 일부러 못나지는 반동을 이루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자유롭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지향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죄인된 상태가 있습니다.


좋은 것들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잘 못한 일이 아니라 잘못한 일을 의미합니다. 잘못한 죄인입니다.


이처럼, 예쁘지 않은 것은 잘못이 됩니다. 예뻐야만 얻을 수 있는 좋은 것들로부터 소외된 바로 그 결과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듭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못생긴데다가 죄인이기까지 한 존재가 출현합니다. 추함과 나쁨은 동의어가 됩니다. 못남이 됩니다. 우리가 결코 얻고 싶지 않은 그 모습입니다.


예쁨이라고 하는 것을 규정하는 사회적 기준이 그렇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예쁨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외적인 특성만이 아닙니다. 하나의 구조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모든 미덕의 총체입니다.


착하고, 예의바르고, 유순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고, 동료애가 깊고, 투표권을 잘 행사하고, 정부의 말을 잘 듣고 하는 등의 그 모든 덕목이 바로 예쁨이라고 하는 가치를 구성합니다. 즉, 예쁨이란, 하나의 구조가 유지되는 데 유용한 개인의 기능적 목록들을 의미합니다.


예쁨으로 평가되는 미덕들은 분명하게 기능입니다. 그래서 예쁨은 정치적 미학입니다.


이에 따라, 예쁨과 못남을 구분하는 기준 또한 구조에 봉사될 수 있는 기능적 차원에서 결정됩니다.


때문에 예쁨은 결국 교환가치인 셈입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구조에 기능적으로 잘 봉사하면, 세상은 개인이 원하는 좋은 것들을 제공해준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게 예쁨은 수단으로서의 도구가 됩니다. 이로 인해, 예쁨을 추구하는 이는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도구로 추구하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인간이 도구가 되는 이 현상을 정확하게 소외라고 부릅니다.


한 번 소외가 생겨나면 이제는 멈출 수 없습니다. 쳇바퀴를 계속 굴려야 합니다. 세상을 더욱 예쁘게 밝힐 에너지만을 끝없이 생산해내는 발전활동에 인생을 바쳐야 합니다.


소외라고 하는 것이 바로 죄인의 상태인 까닭입니다.


아무리 일정 부분 예쁨의 기준을 충족시켜 구조에 기능적 인력으로 편입되어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외로 말미암아 개인은 자신을 못난 존재, 즉 죄인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이 더는 예쁘지 않고 못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개인은, 예쁨을 다시 회복하고자 자신을 보다 유용한 도구로 향상시키려는 노력에 더욱 매진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노력하면 할수록 더 죄인이 되는 악순환을 이룹니다.


이처럼 예쁨의 기준에 의해 선택되지 못해도 죄인이고, 선택되어도 죄인이 됩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이 구조 앞에 모두는 죄인으로 남습니다.


세상은 예쁘고, 개인은 못난 현실만이 끝없이 유지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글리 슈즈를 신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통해, 못난 것이 잘못이고, 죄인으로서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만 같은 부자유를 깨려는 것입니다.


세상이 규정하는 예쁨과 못남의 기준에 대해, 그 기준 바깥의 더 못난 것을 적극적인 나의 모습으로 실현함으로써, 그렇게 그 어떤 논리로도 규정될 수 없는 나의 존재감을 사실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바로 그 죄인됨의 기준을 무화시키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기준 자체를 초월해버리려는 것입니다.


예쁨의 1과 못남의 0으로만 기준이 정해져 있는 이진법의 세상에 -1을 선보이는 이는 분명 규격 외의 초월자입니다. 사실은 더 못난 것이 아니라, 못난 것을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곧, 영영 못나지 않은 것입니다.


자유는 이처럼 감옥과 같은 구조 속에서 더 좋은 입장을 확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의 법칙으로는 도저히 포섭할 수 없는 존재의 면모를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때문에 이 자유 속에서, 구조는 힘을 잃고 허술해집니다. 나만 빼고 좋아보이던 세상의 색채는 희미해집니다. 예쁨을 위한 발전(發展)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대한 발전(發電)만을 하고 있던 노예가 사라졌으니, 세상의 빛이 흐릿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흐릿해진 그 빛만큼이나, 가장 빛나는 진짜라고 믿었던 것들이 허구로 느껴지며, 그 허구의 기준만을 신경쓰던 의식도 희미해집니다.


그 대신, 나에게 자꾸만 관심이 갑니다.


이렇게 더 못나서 못남을 초월한 이의 모습에 계속 웃음이 나옵니다.


이 몸을 향한 친절과 호의 속에서 그렇게 나는 걸어 나갑니다.


나를 향한 관심의 빛 속에서 이 하루가 밝혀집니다.


자유로운 내가 빛나던 일요일의 일입니다.


어글리해서 러블리한 나날입니다.


어글리해서 러블리한 나의 날입니다.





Mark Lanegan - Ugly 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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