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하향평준화의 기준을 깨며"
깨달음이라고 하는 현상 및 의미에 대해 작동하는 가장 흥미로운 통속적 반응은 바로 깨달음을 검증하려는 모습이다.
아주 쉽게, 누군가가 깨달았다고 말하면 거기에 달려들어 검증하려고 든다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못깨달은 이만이 깨달음의 검증을 요한다.
그렇게 못깨달은 이가 깨달은 이를 검증할 수 있다고 믿는 이 희극적인 상황이 성립되는 이유는, 못깨달은 이가 이와 같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깨닫지 못했어도, 객관적으로 깨달았다고 평가할 만한 기준을 적어도 나는 알고 있다."
여기에는 착각과 오만이 작동한다.
착각은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착각이며, 오만은 그 평가기준의 적용가능성에 대한 오만이다.
한국의 종교적 문화 속에서, 쉬이 깨달음을 검증하는 데 쓰이는 대표적인 기준은 바로 유교다. 곧, 이상적인 유교적 인간상의 모습이 깨달은 이를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 다시 한 번, 깨달음에 대한 착각과 오만이다.
이를테면, 유교는 동양의 NLP 같은 것이다. 모방의 기제다.
성인군자라는 이상적 인간의 모델을 정해놓고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 유교다. 그리고 이러한 유교가 깨달음을 검증하는 기준으로 쓰일 때, 그 모방의 성공적인 결과가 곧 깨달음이라고 평가된다.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착각이 낳은 결과다.
이 세상에서 절대로 모방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그 자체로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것인 까닭이다.
흔히 깨달음의 성인으로 불리는 붓다나 예수 자신들도 누군가에 대한 모방체가 아니었으며, 또한 그들을 모방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깨달음이 아니다.
착각은 오만을 낳는다.
애초 착각으로 만들어진 기준을 깨달음에 적용하려고 하니 오만이 된다. 이것은 마치 더 하위의 것이 더 상위의 것을 측정하려고 하는 모습과도 같다. 모방된 복제품이, 그 모방의 기준으로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오리지널리티를 감히 평가하려고 하는 것이다. 색칠공부책에 그려진 도형을 따라 그리던 아이가, 자신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나리자의 예술성을 잴 수 있다고 의기양양하게 구는 일이다.
물론 깨달음을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그 기준은 이것 하나다.
"자신이 스스로 깨달은 줄 알면 깨달은 것이다."
이를테면, 100층 건물의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죽는지 안죽는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깨달음은 사실 중에 가장 근본적인 존재의 사실에 대한 것이다.
모를 수가 없다.
깨달음은 수상한 능력이나 상태가 아니다. SF 영화에서 묘사되는 특수한 초능력자들의 모습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한 능력 및 상태적 특수성을 꿈꾸는 이들이 그 수상해보이는 이들을 모방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고 싶어하며, 유교-NLP적 기준에 비추어 자신이 이제 그 경지에 도달했는지를 평가해보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이 100층 건물의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죽는지 안죽는지를, 자신이 모방하고 있는 남의 기준에 따라 살피지 않고는 알 수 없어 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못깨달았다는 정확한 증거가 된다. 즉, 유교-NLP적 모방의 기준에 따라 깨달음을 검증하려고 하는 만큼 깨달음은 자신에게서 더욱 멀어진다.
깨달음이 밝히는 존재의 사실이란 추상적인 말이 아니며, 표현 그대로 존재를 사실적으로 실감하는 것이다. 특정한 대상들을 추구하며 그것들 없이는 자기가 존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이가, 그것들 없이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존재감을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반석처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있으며, 가장 있다. 그 어떤 규칙과 논리로도 부정될 수 없이 절대적으로 있다.
이를 실감하는 자리에서, 늘 자기가 부정되는 것만 같아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마음 편히 숨쉴 수 없었던 비루한 죄인의 입장은 완벽하게 해체된다. 경전들의 표현처럼, 부활하는 것이며, 다시 태어나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존재를 억압하던 감옥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상이 가장 아름답게 확인된다. 그 인간이 바로 자신임이 확인된다.
그래서 깨달음은 인간에 대한 일종의 상향평준화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은 자신만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가 본원적인 상급의 존재로 알려지는 것이다.
반면, 유교-NLP는 분명하게 인간에 대한 하향평준화다. 상급의 인간상을 모델로 삼아 그것을 모방한다고 하지만, 이미 그러한 일을 하는 자체가 인간을 근본적으로 하급의 존재로 보는 시각이 내재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만약 개인을 본래적인 상급의 존재로 보고 있다면, 게다가 그 존재적 위상이 결코 부정될 수 없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까지도 이해하고 있다면, 성인군자 같은 것을 모델링할 이유는 전혀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사실 모방의 기제는 모방되는 대상과 똑같이 될 수 있는 기제가 아니라, 그 대상보다 늘 열등한 위상으로 추락하게 되는 기제다.
존재의 차원에서는 분명하게 모방하면 할수록 열등해진다.
성인군자의 모범적 덕목들을 모방해서 얻는 것은 열등감이다.
그 열등감 속에서, 인간존재의 본원적 고귀함에는 결코 닿을 수 없이, 기껏해야 성인군자가 되려는 자신의 노력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자평하면서 그만큼 대단한 존재에 가까워진 양 그저 자기를 위로하게 될 뿐이다.
이 우주에서 가장 존귀하게 존립된 인간이라는 존재가, 고작 자기 위로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초라한 존재로 탈바꿈되는 셈이다.
사실의 왜곡이며, 존재의 몰락이다.
이것이 깨달음의 기준인 척하는 유교-NLP의 하향평준화가 만드는 현실이다.
나아가, 깨닫지 못해도 백성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유교적 가치는 대의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선비들로 인해 이 하향평준화의 현실은 더욱 심화된다. 그러한 대의의 주체인 선비들 자신은 자기들이 계도하고 계몽할 백성들과는 다른 상급의 위상을 독점하게 되는 까닭이다.
자신들을 제외한 대다수를 하향평준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론적 위상을 드높이는 이 기만은, 결국 깨달음을 마치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학습과 진보의 기제처럼 상정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좋은 것을 모방함으로써 학습하고 그 학습을 통해 진보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물론 빵을 만들거나 고기를 굽는 등의 기술적인 차원에서는 아주 유효하게 작동하는 이야기다.
기술은 모방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기술이 아니다.
기술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라면, 깨달음은 '하지 않는' 감수성에 입각한다.
존재는 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고 존재가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무기질덩어리와 같은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존재하기 위해, 곧 존재 그 자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존재는 구걸하지 않는다.
스스로 존재한다.
원래 스스로의 정당성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원래 존귀한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탁월하게 선택받거나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한 소수의 이들만 깨달을 수 있으니 깨닫지 못할 다수의 이들을 위해 유교가 필요하다는 식의 선비들의 주장은, 또한 성공적인 소수의 이들이 이루어낸 마음의 법칙을 모방함으로써 성공적이지 못했던 다수의 이들도 위대해질 수 있다는 식의 NLP 보급자들의 주장은, 원래 존귀한 인간의 위상을 자의적으로 하향시켜 취급하려는 커다란 오만이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이 기술이 아니라는 말은, 마음은 기술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음을 기술로 취급할 때, 그 결과는 마음으로 사는 인간의 실종이며, 곧 인간소외다.
마음의 기술화로 인해 생겨난 것은 바로 마음의 분열이다. 기술에는 우열이 있다. 좋은 기술과 나쁜 기술이 있다. 이에 따라 기술화된 마음은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으로 분열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좋은 마음은 더욱더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고, 나쁜 마음은 더욱더 다스려서 없애야 하는 것이다.
유교-NLP적 방법론들에서 늘 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더 굴절된 형태는, 더 큰 좋은 마음으로 나쁜 마음을 끌어안아 그것을 좋은 마음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마치 자신이 더 큰 신과 같은 입장으로 마음을 포용하려는 일이다.
조금 세게 말해서, 단언컨대, 이러한 일을 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다.
모방으로 만들어진 자의적 기준으로 마음을 분열시키고, 나아가 그 기준의 담지자인 자신을 신처럼 자임하고 있는 동안에는,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은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
이 상황을 다시 묘사해보면 이러하다.
좋은 자신과 나쁜 자신이 있으며, 좋은 자신은 한층 대단한 것으로서 나쁜 자신과의 갈등 속에서도 어떻게든 나쁜 자신을 좋게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른바, 좋은 오른손과 나쁜 왼손이 매일같이 서로 싸우며 때리는 가운데, 그래도 조금 더 인생의 진리를 깨친 좋은 오른손이 나쁜 왼손을 가득히 감싸줘야겠다며 왼손을 가득히 감싸쥐고 있는 모습과 같다.
그래서 이것은 그저 자신이 늘 자신과 싸우는 쉐도우복싱이며, 그 결과는 오른손이 왼손을 봉쇄하는 그 일만을 하느라 결국 오른손도 왼손도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되는 불구의 현실이다.
자신의 아주 일부라도 부정하고 있는 한, 더 좋은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심지어 그러한 생각을 행위로 옮기고 있는 한, 그렇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가 부정되고 있는 한, 깨달음은 요원하다.
그렇다고 제대로 해야 할 깨닫는 방법이 달리 있는 것은 아니다.
모방의 기준을 채택하여 그 기준으로써 자신을 부정하는 일을 그만 멈추는 것,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즉, 위대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더 쉽게 말하자면, 모방을 하지 않는 것이다.
유교-NLP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적인 모방의 기준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으며, 검증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글에 따라서도, 자신이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검증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검증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측량될 수 없는 미지수고, 무한수며, 심지어 숫자 자체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저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나열될 수 있는 숫자들 사이에서의 그 어느 상대적인 순위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1위도 아니고, 꼴찌도 아니다.
그러나 굳이 말하자면, 나는 늘 1등이다. 나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늘 1등이다. 유일한 존재다.
그래서 나는 그저 절대적이다. 그 모든 상대를 떠나 있다. 그 모든 기준을 떠나 있다.
누가 나인 것을 막을 것인가?
진실로 아무도 없다.
이 우주에 지금 이 모습으로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단 한 번뿐인 고유한 오리지널리티의 것들이다.
이처럼 저마다 누구에게나 가장 유일한 나로 사는 것들 말고는 이 우주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나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의 동의어다.
지금 이 모든 것이 이미 부정할 수 없이 존재하고 있는 이 우주는, 이처럼 원래 가장 나로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가장 존재의 상향평준화가 실현된 곳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 사실이, 지금 이 사실적 존재가, 이미 이 우주적 사실에 대한 검증이다.
나는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까닭에, 나로서밖에 잴 수 없다.
그 결과가 보란듯이 우주만큼이다.
보란듯이 나는 그 모든 기준을 깨고 가장 거대하게 닿아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깨달아진 것이다.
모방의 기준을 통해 내가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위대한 기준조차도 넘어서는 나를 깨닫게 된 것이다.
가득하게도, 자신이 가장 소중한 것인 줄 알게 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