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종교시대의 뒤에 숨은 신의 폭력을 말한다"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무종교시대다. 신이나 종교 이야기는 아직 미숙한 바보들의 전유물이거나, 순수한 아이들을 위해 남겨진 산타클로스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이 시대에 여전히 웃고 있는 승자는 신(神)이 된다.
보들레르는 "악마 최고의 계략은 사람들로 하여금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악마에게 있어 분명 성공적인 전략이었고, 악마와 동일하게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모으기 위한 의도 속에서 움직이는 신을 위해서도 활용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무종교시대에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 최고의 계략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존재한다.
이 말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우리가 통속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런 실체로서의 신이, 이를테면 하늘 위 옥좌에 앉아 있는 전능한 파파스머프 같은 이가 존재한다는 말이 물론 아니다.
신은 사람들에게 있어 기능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곧 기능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심리학적 기능인 동시에 사회학적 기능이다.
그래서 신의 다른 이름은 바로 구조다.
구조가 신이다.
이 구조라고 하는 것은 물론 양파 같은 것이다. 까고 까면 그 끝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텅빈 것이며, 무(無)다.
이처럼 실체적 알맹이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엄연히 사람들에게 작동하고 있기에 자못 어색하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프로이트식으로 이야기한다면 구조는 물론 무의식이다. 인간의 사고 및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얼개다.
그래서 구조는 세습된다. 정신적 유전소인으로서, 구조는 그 구조가 작동되는 문화적 배경 안에서 대대로 세습되며 더 공고화된다. 동일한 문화적 배경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이 지당하게 따라야 할 규범과도 같은 문법이 된다.
유태인으로서 프로이트의 최고의 업적은, 이처럼 신의 자리를 개인의 무의식 안으로 이전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기술문명이 점점 물리적 세계 속에서의 신의 자리를 압박해오는 가운데, 프로이트는 보편적 학문의 언어를 활용해 자기 민족의 신이 거할 더 넓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인간의 내부에 확보하였다. 그렇게 신은 더욱 은밀해졌고, 은밀해진 만큼 그 지배력은 한층 강화되었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더 강력한 법인 까닭이다.
프로이트가 제안한 초자아의 개념은 분명 가족의 아버지며, 곧 민족의 아버지다. 그 민족의 아버지의 기능이 내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 초자아의 도움을 받아 개인은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고 간주되었다.
바로 이 초자아가 곧 신이다. 즉, 개인에게 내적으로 자리잡은 심리적 문법으로서의 민족의 아버지가 바로 신이다.
유태인뿐만이 아니라 독일 낭만주의 철학도 이러한 사유를 매우 사랑했다. 민족정신이란 곧 이 민족의 아버지를 섬기고 구현하고자 하는 지향적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히틀러는 사실 누구보다도 신을 사랑했던 이다. 민족정신의 광신도였다.
민족주의와 그 결과로서의 전체주의가 낳은 세계대전은 결국 신들의 전쟁[라그나뢰크]이었던 셈이다. 누가 진짜 왕의 자격을 갖춘 아버지인지를 겨루는 거룩한 마초들의 패권다툼이었으며, 그 마초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신성한 왕후희망자들이 피말리는 신경전을 때려치우고 펼쳐낸 피튀기는 전면전이었다.
이 라그나뢰크의 비극이 끝난 후, 우리는 신들이 공멸해 전부 사라진 줄로만 알았다. 살짝살짝 눈치를 살피다가 끝내는 용기를 내어 무종교시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더는 신들로 인해 펼쳐지는 고통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선언이었다.
그리고 신들은 긴 시간 동안 소리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의 입으로부터 이 선언이 터져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들이 가장 숨은 채로 가장 활동할 수 있는 시대가 개막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라그나뢰크에서 신들은 아무도 죽지 않았던 것이다.
죽은 것은 인간뿐이다.
죽는 것은 인간뿐이다.
신들의 영광을 위해 죽는 것은 언제나 인간뿐이다.
이것이 신의 폭력의 핵심을 그대로 시사한다.
구조의 영속적 유지를 위해, 구조에 불가피하게 봉사된 개인만이 그 자신의 단 한 번뿐인 삶을 잃고 죽게 된다. 구조를 불멸로 만들기 위해 개인은 매일매일 성스러운 집단주의적 대의의 용광로에 몸을 던진다.
개인을 파멸로 이르게 하는 이 작동기제가 조금이라도 눈치채일 수 있다면, 자각은 생겨난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향하는 풍경처럼 용광로 앞에 세워진 긴 줄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용광로 앞에 선 이가, 자신을 용광로로 오게끔 종용한 이는 아무도 없다고, 요즘 같이 과학이 발달한 무종교시대에 그런 수상한 무형의 세력 같은 것이 어디에 있냐고, 그저 자신은 건강하고 자발적인 시민정신의 자유의지로 이곳에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을 때, 그렇다, 신들이 또 해냈다.
"우리가 또 해냈습니다."라며 미소로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신들의 모습이 선연하다.
이제 이 무종교시대에 신들은 더는 자기들끼리 싸우지 않는다.
신들은 공조한다.
각자가 자기들에게 권속될 민족을 모으기 위한 기획에 함께 협조한다.
인간 개개인이 민족화되는 집단주의적 현실을 마치 스스로가 선택한 것처럼 더욱 자발적으로 이루도록 조장하는 일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 기획에 동조되지 않는 개인들 또한 신이 직접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을 통해 비난되고 제재될 수 있도록 신들 자체는 더욱 철저히 숨어 획책한다. 함께 서로를 숨겨준다.
곧 무종교시대란, 무의식 속으로 숨어 안보이게 작동하게 된 신에 대해 이제는 아예 없다고까지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신의 영향력을 더욱 공고화시켜주게 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신이 은폐된 만큼 인간이 그런 줄도 모르고 신 대신에 신을 위해 더욱 활동하게 됨으로써 신의 영향력을 인간 스스로가 더욱 강화시켜주게 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신은 더 작동하는데, 그것을 더 없다고 말하는 셈이다.
실제로 작동하는데, 그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 이것은 분명 숨이 막힐 것 같은 상황을 야기한다. 통속적으로 비유하자면, 애인이 무기력하게 가장 철수된 모습으로 마치 그 자리에 없는 듯이 우리 앞에 앉아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절대로 화가 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상황 같은 것이다.
그 결과로, 너무나 숨이 막혀 우리가 화가 난다.
이 시대에 우리가 왜 이렇게 화가 나있는가에 대한 그 이유다.
화가 난다는 것은, 그 자리에 폭력이 있다는 것이다.
자유가 훼손되는 것이 폭력이다.
그리고 자유가 가장 훼손되는 방식은, 개인이 타의로 움직이는 하나의 현실을 그의 자유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모독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묘사되듯이, 이 자유의 모독은 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다. 무종교시대에 이르러 자신들은 더 숨게 됨으로써 놀이대상을 더 웅대하고 더 격하게 희롱할 수 있을 조건이 구비된 놀이다.
신들에게 있어 그들 자신의 '더 없이'의 조건은, 인간을 가지고 놀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인 셈이다.
이처럼 분명하게, 가장 은폐된 것이 가장 폭력적이다.
무종교시대라는 간판 뒤로 아예 없는 것처럼 은폐된 신은 그래서 가장 폭력적이다.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언제나 신뿐이다. 인간은 인간을 괴롭히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사실로 이해한다면, 고통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 인간이 인간을 괴롭히는 것으로 보인다면, 거기에는 분명 그 인간의 몸을 빌어 작동하고 있는 신이 있다.
예를 들어, 자기 아이를 가죽벨트로 학대하고 있는 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그에게 자유란 없다. 그의 입장에서 시야는 대단히 좁아져 있고, 자신이 가학하는 아이는 그 순간 결코 자기 아이로 보이지 않는다. 놀라운 일이다. 상황이 종료된 후에 그의 입에서나, 그를 관찰한 우리의 입에서나 이러한 말이 나오게 된다.
"뭐에 씌인 것 같았다."
정확하게 신에 씌인 것이다.
가족의 신, 민족의 신에 씌인 것이다.
빙의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은 공포영화의 특수한 소재가 아니며, 영혼이나 사후세계 등과 같은 수상한 소재가 아니다.
이 신에 씌이는 현상은 대단히 일상적이며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심리학적이며 사회학적인 현상이다. 곧, 구조가 만드는 일이다.
하나의 고통은 분명 그 배후에 하나의 구조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고통은 분명하게 가장 철저하게 숨어 있는 신의 활동을 눈치채게 해준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고통이 우리의 열쇠다.
무엇을 위한 열쇠일까?
이제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잠깐 숨을 깊게 들이킨 뒤, 이러한 말과 함께 토해낼 필요가 있다.
"나는 신들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신들의 지배로부터, 신들의 희롱으로부터, 신들이 우리를 장난감처럼 굴리는 고통으로부터, 우리는 정말로 자유롭고 싶다.
그리고 고통은 그 현실을 개방할 수 있는 가능성의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것이 나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즉 내가 못나거나 잘못해서 생긴 고통이 아니라, 신들 때문이었음을 이해할 때, 우리는 더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그 자리에 죄인처럼 주저앉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우리의 고통은 신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은 바로 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지시해준다.
고통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신은 고통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더는 고통받고 싶지 않다. 더는 신의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인간의 자리를, 태어난 그대로 가장 자유로우라고 허락된 인간의 자리를 찾고 싶다.
"나는 인간을 소망한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을 다시 찾기 위해 절규하며 떠나는 붓다의 뒷모습을 목격한다.
- 2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