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신 신드롬 #2

"작은 마음의 신이 아닌 큰 마음의 인간을 말한다"

by 깨닫는마음씨




인간을 회복하기 위해 떠난 붓다가 결국 스스로 가장 자유로운 인간임을 깨달았을 때, 모든 신이 내려와 붓다 앞에 엎드렸다는 설화가 있다.


여기에는 입장의 전환이 있다. 그 전까지 더 큰 것으로 상정되었던 신이 더 작은 것으로 상정되었던 인간 앞에 엎드림으로써, 인간이 더 큰 것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인간의 크기다. 다시 찾은 인간의 크기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생생한 인간의 크기는 이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것이다.


그리고 신은 원래 작은 것이다. 그렇게 작은 신이 거대한 인간을 속박하고 있으니, 인간의 입장에서는 고통스러운 폭력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더 큰 것이 더 작은 것 안에 억지로 꾸겨져 있을 때, 그 더 큰 것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훼손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신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생활문화권을 공유하는 민족의 집단무의식이다. 하나의 신은 하나의 민족에게서 세습되어 온 민족정신, 곧 민족의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의 민족에게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당위적인 심리문법적 구조가 되어 굳어진 마음이다.


즉, 무의식은 구조고, 구조는 신이며, 신은 마음이다.


그러나 그냥 마음이 아니다. 우리가 무의식과 마음을 구분해서 쓰는 이유는,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과거의 마음을 지칭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이라고 하는 마음은 곧 과거의 마음이다.


과거의 마음은 기억을 통해 세습된다.


특정한 과거의 한때에는 그것이 생존에 효용을 제공해주었던 반응양식이 기억되어 전승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마음이 유용했던 때는, 인간의 경험의 다양성이 현재만큼 폭넓지 않았을 때다. 과거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늘날 다양하게 개방된 인간의 경험의 폭은, 더는 과거의 마음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유아기때 쓰던 젖병으로 이 지구의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의 경험은 크나, 과거의 마음은 작다.


나아가 인간의 경험은 점점 더 커지나, 과거의 마음은 늘 그대로인 상태이기에 상대적으로 점점 더 작아진다.


이처럼 인간의 경험보다 언제나 더 작을 수밖에 없는 과거의 마음이 지배적으로 인간의 경험을 포섭하려고 할 때, 곧 신이 인간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려고 할 때, 결국 고통의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성공적이라 믿어졌던 과거의 마음이, 지금은 결코 유효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항구적 구조로서 작동하고자 하는 일, 이것이 바로 신의 활동이며, 신의 폭력이다.


그렇게 신은 그 자체로 고통의 동의어다.


그런데 모든 신이 민족의 신이며 곧 민족정신이라고 하는 말은, 결국 모든 신은 조상신이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조상신은 고통의 근원이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오직 조상신뿐이다.


이 말은, 한국을 대표하는 신, 즉 유교적 민족정신에 동의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유교만이 아니다. 모든 민족정신, 즉 모든 조상신은 인간에게 고통을 제공하는 핵심적인 소재지다.


굴절된 샤머니즘의 이해가 말하는 것처럼, 조상신이 개인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조상신을 잘 섬기는 만큼 개인이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상신을 섬기는 만큼 개인은 조상신에 잠식된다. 자유를 잃고 빙의되어 조상신이 하던 행위를 타율적으로 반복하게만 되며, 그러한 모습을 자발적인 자유의지로 성립된 자기의 모습이라고까지 착각하게 된다.


이러한 일이 생기는 이유는, 거듭 말하듯이 신은 고통인 까닭이다.


더 작은 신이 더 큰 인간을 구속함으로써 고통을 발생시킨다는 그 이유만이 아니라, 실제로 신이 성립된 그 기원 자체도 고통이다.


하나의 고통이 있었고, 그 고통에 대해 유용하다고 믿어진 하나의 행동양식으로 이루어져 세습된 것이 신이다. 곧, 신은 고통에 대해 특정하게 반응된 그 결과다. 고통은 엄연하게 신의 시작점이다.


그래서 고통이 있는 곳에 신이 있는 것이다.


자극이 있는 곳에 반응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신이라고 하는 고통에 대한 반응양식은, 단지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는 반응양식이었을 뿐이다.


즉, 여기에는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고통만 거세시키면 된다는 투박한 반응양식만 있다.


그래서 만약, 거의 불가능한 경우로, 신으로 인해 고통이 제거된다 할지라도, 그 결과로 반드시 인간은 소외된다.


NLP와 같은 사이비심리학의 접근들이 아무리 고통제거에 대한 유효성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키게 되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인간의 소외로 인해 당연하게도 인간은 더 고통스러워진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신은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려 한 결과가 낳은 더 큰 고통이다.


분명하게 신은 가장 크게 느껴진 고통의 경험이며, 동시에 그 고통으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친 경험의 총체다.


그래서 고통받는 많은 이들이 여러 수행방편들을 통해 신이 되기를 꿈꾸는 것이다. 신이 되면 고통으로부터 멀어져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착각이다.


사실은 신이 되려 하는 바로 그 의도로 인해, 즉 신을 자기 삶에 끌어들이려는 그 의도로 인해, 고통은 더욱 증대된다. 오히려 없던 고통도 고통 그 자체인 신으로 인해 생겨나기까지 한다.


바로 이것이, 신이 왜 인간을 괴롭히는지에 대한 그 이유다.


고통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가고 싶은, 고통을 당위적으로 제거하고 싶은, 그만큼 고통 그 자체인 신은, 그 의도를 달성하기 위해 인간에게 고통을 전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을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신 자신의 고통을 망각하려고 하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왜 주장되는가?


민족의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고통을 '우리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에게 떠넘기고 싶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민족의 고통은 미국민족 때문이고, 일본민족 때문이며, 중국민족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위대한 한민족은 야만적이고 미개한 타민족이 아니라면 고통받을 일이 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민족주의는 차별과 소외를 낳는 병적 우월감의 병인(病因)이 된다.


그래서 모든 신은 근본적으로 병신(病神)이다.


늘 변해가는 새로운 현실에는 전혀 적응하지 못하면서, 시대착오적인 관점을 견지하며 자기가 제일 잘난 줄로만 알고 고집만 부리는 이를 향해 우리는 통속적으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야, 이 병신아."


이것은 정확한 지시어다.


결코 그 사람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빙의되어 그 사람을 병든 것처럼 아프게 만들고 있는 신에게 향해진 아주 정확한 지시어다.


흔히 신병을 앓는다고도 말한다. 조상신이 후손을 아프게 하는 이유에는 다른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프게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그렇게 자신의 아픔을 대신 전가시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그래서 이 민족의 신들, 조상신들로만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해 붓다는 전부 다 고통이라고 말한 것이다.


조상신을 섬기며, 그 과거의 마음의 구조를 유지하고자 하는 전통들은 하나같이 인간에게 다음과 같은 덕목을 요구한다.


'고통의 인내'

'버티며 사는 일'

'참고(忍), 참고(忍), 참기(忍)'


개인이 나뭇잎마을의 닌자수행처럼 그 자리에서 빙의된 조상신의 고통을 대신 참고 버티며 받아줘야만 조상신 자신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을 너무 고통스럽게 하는 세력 앞에서, 인내하고 인내한 끝에 우리가 결국 취하게 되는 모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세력과 동일한 모습이 되는 것이다. 동지가 되면 더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상신에 빙의된 이는 결국 자기 자식에게 가죽벨트를 들게 된다.


민족정신이라는 집단무의식이 세습되듯이, 이 신이라고 하는 이름의 고통의 폭력도 세습된다.


분명하게, 고통은 윤회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윤회하는 것은 고통뿐이다.


신은 인간의 몸을 빌어 윤회한다. 조상신은 후손의 몸을 빌어 윤회한다. 그렇게 고통은 끝없이 이 몸으로 윤회한다.


그래서 붓다가 우리에게 찾아왔다.


이 고통의 고리를 끊는 법을 들고 우리에게 새벽같이 맨발로 달려왔다.


붓다는 말한다.


"마음이 답이다."


그러나 과거의 마음이 아니다. 현재의 마음이다. 지금의 이 마음이다.


지금의 이 마음이란 곧 이 몸으로 느껴지는 생생한 느낌이다.


자신이 과거에 무엇을 했고, 또 어떤 누구인지와 아무 관계없이, 오직 지금 여기에서 느껴지는 바로 이 느낌이다.


그래서 지금의 마음은 곧 몸이다.


이처럼 이 몸이라고 하는 소재에 빙의되어 고통을 전가하는 쓰레기통처럼 쓰고 있는 조상신을 쫓아내는 소재 또한 몸이다.


이 지구에서 살아있는 개인의 몸은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우주에서 제일 큰 신보다 더 세다.


그래서 신들이 그토록 인간의 몸을 차지하려고 교묘하게 애쓰는 것이다. 인간으로부터 자발적인 동의를 얻지 못하면 신들 따위가 감히 범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한 것이 바로 인간의 몸이기 때문이다. 흡혈귀는 초대받지 못하면 들어올 수 없다는 속설은 분명 이러한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지금 이 몸의, 곧 자신(自身)의 느낌으로 사는 이는, 그 자체로 이미 상시 엑소시스트인 상태와 같다.


즉, 조상신을 쫓아내기 위한 여분의 행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행위의 요청 자체도 조상신의 또 하나의 계략이다.


이를테면, 합리적 이성을 가진 민주시민으로 살아가면 미신과 같은 낡은 부조리는 사라진다고 하는 식의 계몽의식의 요청이 바로 조상신이 활용하는 최고의 계략이다. 그렇게 자신이 가장 없는 것이 됨으로써, 은폐된 속에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이다.


오늘날의 신들은 분명 무종교시대를 밝히는 계몽의 빛 속에 숨어있다.


현재적 언어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과거의 세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몸만을, 몸이 알리는 느낌만을, 곧 우리 자신만을 신뢰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몸을 정말로 있는 것으로 발견할 필요가 있다. 바로 그 우리의 몸으로 살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 가장 있는 것 속에 숨어 '있는' 조상신을 포착할 수 있게 되며, 그렇게 정말로 있는 것으로서 회복된 몸으로 말미암아 현재에는 이미 '없는 것'인 조상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우리 자신의 몸이 된다는 것을 쉽게 말하면 곧 개인이 된다는 것이다.


조상신이, 즉 민족의 신이 요구하는 민족이 아니다.


우리는 개인이다.


그냥 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역사는 과거다. 그렇다면 이 말은 다시 이렇게 묘사된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너무나 아름다운 말이며, 너무나 효용있는 말이다.


이 말은, 개인이 어떻게 조상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될 수 있는지 그 방법론을 정확하게 묘사한 말이다.


과거를 잊으면 더는 민족으로 존속될 수 없다.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단순하게, 민족의 과거를 잊으면 된다.


이 민족의 과거는 민족이라는 말에 자신을 위탁하고 있는 우리의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몸에 빙의되어 있던 조상신의 과거다. 조상신이 된 하나의 주체가 생전에 그렇게 아팠던 하나의 기억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가 아프지 않기 위해 현재의 우리를 대신 아프게 하려고 하는 그 의도다.


신은 고통을 제거하고자 하지만, 인간은 고통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게 신은 자기가 고통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망각한 채 타자에게 고통을 전가하고자 하지만, 인간은 자기의 것이 아닌 타자의 고통도 망각 속에서 소외시키지 않고 이해하고자 한다.


즉, 민족의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고통을 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고통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과거에 타자의 고통이 있었으면 그 고통을 잊지 않고 더 이해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인간의 위대한 역량이다.


이와 같다. 이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민족의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곧 민족으로서의 자신을 잊는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민족 밖으로 나오게 되며, 민족은 우리에게 타자가 된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과거의 마음에 담긴 타자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면목을 보일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더는 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민족의 신의 지배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더는 조상신에게 빙의되어 대신 고통받지 않게 된다.


우리가 민족의 과거를 타자의 고통으로 상냥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됨에 따라, 고통의 고리가 끊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과거의 마음의 해탈이라고도, 또 구원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다.


실존심리학에서는 분명 자유(F)는 자극(S)과 반응(R)을 끊는 그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자극과 반응이 한 몸처럼 자동적으로 연쇄되는 과거의 마음을, 즉 신의 작용을 끊는 이 자리에 자유가 있다는 말이다.


붓다는 바로 이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바라보는 법'을 들고 우리에게 달려왔다.


모든 '바라봄'은 바로 '타자를 바라봄'이다.


이 바라보는 사건은 언제나 안팎을 향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이에 따라, 외부의 타자뿐만이 아니라 내부의 타자도 함께 알려진다.


바로 내가 정직하게 알려진다.


이것은 나의 고통이 아니었다. 나는 조상으로부터 어깨 위에 올려진 무거운 부채감을 짊어지고 광야를 헤매는 노새가 아니었다. 민족이라는 말에 위탁하지 않으면 텅빈 자신을 견딜 수 없는 부족하고 못난 존재가 아니었다. 민족의 의지에 따라 똑바로 살고 있지 않다는 커다란 죄책감을 면죄받기 위해 노예처럼 하루하루 버티고 또 버티며 비루하게 연명해야 하는 죄인이 아니었다.


나는 그 모든 민족의 과거와 아무 상관없이, 아니, 아무 상관없어도 괜찮은 이였다. 나는 지금 나인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이 온전한 존재였다. 민족의 사명이 아닌 이 몸을 위해 이 몸으로 살며 얼마든지 행복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정말로 더는 고통받지 않아도 되는, 이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소중한 생명이었다.


나는 그동안 민족정신 안에, 조상신 안에, 구조 안에, 과거의 마음 안에 갇혀 있었고, 그 갇힌 모습이 자신인 줄로만 알고 살았다.


그렇게 나는 작은 마음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에 결코 갇힐 수 없이 자유로운, 가장 큰 마음이었다.


나는 큰 마음이다.


이 큰 마음을 만나 큰 마음으로 사는 것이 곧 인간이다. 마음이 거대해서 인간이 거대한 것이다.


나는 바로 그 인간이다.


그렇게 나는 알려진다. 그렇게 인간은 알려진다.


나는 민족의 작은 구성원이 아니다. 나는 거대한 인간이다.


나는 과거에 매달려 있는 작은 마음의 신이 아니다. 나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큰 마음의 인간이다.


이처럼, 타자에의 이해를 통해 과거의 마음을 자유롭게 한 나에게, 곧 작은 과거를 잊은 거대한 나에게 민족의 미래는 없다.


민족은 미래가 없다.


신은 미래가 없다.


신은 나의 미래에 없다.


곧, 고통은 나의 미래에 없다.


이미 내가 있는 현재에 없기에, 미래에도 없다.


나만 있다.


큰 마음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인간만 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다시 찾고자 소망했던 바로 그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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