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일본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인기인물인 오다 노부나가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인간의 오십 년 인생, 굽이치며 흐르는 천하에 비한다면 사라질 꿈과 같구나, 한 번 태어나서 죽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人間五十年 下天のうちをくらぶれば 夢幻の如くなり ひとたび生を享け 滅せぬもののあるべきか)."
우리의 인생을 꿈으로 비유한 사유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없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꿈꾸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한편 이렇게도 말해집니다.
"깨달음은 꿈에서 깨는 것이다."
이 두 진술을 모순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염세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일견 우리가 깨달음이라는 언어에 대해 부여하고 있는 궁극성과 같은 속성으로 말미암아, 꿈에서 깨는 일이 제일 좋은 것이라면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깨달음과 꿈은 모순관계가 아닙니다. 그 둘은 정확하게 상호작용하는 역설의 한쌍입니다.
곧, 꿈이 커지면 깨달음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꿈이 커지면 깨달음도 같이 커집니다. 그 반대로 꿈이 작아지면 깨달음도 작아집니다.
깨달음과 꿈은 이처럼 상호적 역설관계인 까닭에, 꿈이 없다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현상과 그 의미는 애초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꿈이라면, 우리는 그저 그렇게 꿈꾸며 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꿈꿀 수 있다는 것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날을 기대하며 잠들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자체로 아름답게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미 이처럼 우리가 아름다울 때, 살아있는 가슴을 벅차게 느낄 때, 꿈이 정답게 내일로 흐르고 있을 때, 이럴 때는 우리가 자각할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나는 깨달음이 필요없습니다.
조금 더 표면적으로 형상화된 깨달음이 필요하게 되고 또 드러나게 되는 때는, 이처럼 잘 꿈꾸고 있을 때가 분명 아닙니다.
꿈의 세력은 왕성하나, 그 왕성함만큼 꿈이 강렬한 악몽이 되어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마치 파도타기처럼 꿈을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니라, 늪이 되어버린 꿈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이럴 때 깨달음은 그 악몽의 감옥벽을 깨고, 꿈을 다시 온전한 형상으로 회복시켜주는 인상적인 일을 합니다.
여기에서 '꿈'이라는 표현을 '마음'으로 바꾸어 이해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꿈꾸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라는 말은, 동시에 "우리는 마음을 느끼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체험의 의미입니다.
꿈꾸는 일은 꿈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마음을 느끼는 일은 마음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체험은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실시간의 현재적 경험을 우리는 체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현재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에 있으려면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시간의 속성입니다.
하이데거가 "존재는 시간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라고 말했을 때, 이 '존재'라는 표현을 '마음'으로 이해하면 정확합니다.
마음을 체험한다는 것은, 시간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곧, 단 한 번도 같은 형상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되며 흐르는 바로 그것을 지금 이순간의 현재에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흐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흐름이 막힌 것이 바로 악몽입니다. 늘 같은 시간 속의 장면만 반복되는 것 같은 정체된 감옥의 상황입니다.
악몽이 힘든 이유는, 같은 악몽만 반복해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닫혀서 반복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새로움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됩니다.
그러나 체험은 늘 다른 변화의 흐름을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체험 속에서는 언제나 동일성의 악몽이 깨어집니다. 체험하는 것만으로 이미 새로움의 가능성이 개화됩니다.
깨달음은 분명한 체험이며, 체험이라는 사건에 대한 순수체험이기도 합니다. 메타체험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흐름을 체험함으로써 흐름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흐름은 언제나 현재에 있기에,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흐름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현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현재에 있으려면 우리도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라고 하는 존재의 속성입니다.
곧, 우리가 흐르고 있지 않기에, 그렇게 우리가 현재에 있지 않기에, 곧 체험하려 하지 않기에, 우리는 악몽에 빠지게 되는 셈입니다.
이것은 꿈이 왜 악몽이 되는가에 대한 그 유일한 이유입니다.
악몽이 악마처럼 우리에게 악의를 갖고 돌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이 있는데, 그중에서 나쁜 마음이 우리를 감옥에 가두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악몽을 만듭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마음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해. 너무 괴로운데 빠져나갈 수가 없어."
이것이 착각입니다.
마음이 우리를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을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을 억압하려 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시간을 멈추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존재하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개인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 고유한 질량을 가진 몸이 이미 개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개별의 몸에 새겨지는 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거북이의 시간과 하루살이의 시간이 다른 이유는 그 몸이 달라서입니다. 몸의 고유성은 곧 시간의 고유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존재의 고유성입니다. 개인이라는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가둔다는 것은, 우리가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일을 봉쇄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그러한 봉쇄의 의도를 통해서도 또 존재하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는 또 개인이 됩니다.
이것은 마치 "너는 존재하면 안 돼."라고 하는 한 개인이 목소리를 크게 내는 만큼, 그 개인의 존재감은 더 강렬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 결과, 언행불일치의 내로남불이 됩니다.
다른 존재는 다 무시하고, 자기만 존재해야 한다고 외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2병입니다.
중2병은 자기만 고유하고 특별한 개인이고 싶어하며, 나머지는 몰개성적 들러리와 같은 집단으로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낳은 현상입니다.
비단 중학생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특히나 오늘날의 정치인들에게서 아주 만연하게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중2병도 물론 꿈입니다.
그 시작은 개인이 되고 싶어한, 곧 정말로 의미있게 존재하고 싶어한 아주 신성한 꿈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악몽이 되어버린 꿈입니다.
이 중2병의 꿈을 이렇게 다시 묘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되는 꿈."
이것은 가장 온전한 꿈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굴절되어 온 꿈입니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의 하나이기를 바라는 이들은 분명 이 '하나님이 되는 꿈'에 취해 있습니다.
정치를 위해, 정의를 위해, 민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역사를 위해 등과 같은 대의를 주장하는 이는 모두가 하나로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은 그렇게 모두를 하나로 만든 구심점으로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되려고 합니다. 하나가 된 님들 사이에서도 더욱 하나의 중심에 있는 님입니다.
마치 변신합체로보트의 가장 심장부에 위치한 주인공 로보트인 셈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되는 꿈'이 굴절되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이기를 바라는 의도 속에서, 자기를 제외한 모든 이는 더욱더 집단 속에 매몰되도록, 그리고 그 꿈의 주체인 자기는 더욱더 특별한 개인으로 거듭나도록 요청되는 악몽입니다.
곧, 전체주의의 악몽입니다.
바로 이처럼, 하나된 집단의 가치를 주장하지만 그 주장을 통해 자기만이 개인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중2병이, 마음을 가두고, 시간을 가두며, 존재를 가두는, 곧 사람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전체주의의 악몽을 낳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흐르지 않으려는 이유, 우리가 현재에 있지 않으려는 이유, 우리가 체험하지 않으려는 이유, 그럼으로써 우리가 마음을 가두려는 이유, 우리가 꿈을 억압하려는 이유, 우리가 시간을 멈추려는 이유가 아주 명확해집니다.
그렇게 해야 자기가 개인으로 특별하게 존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하나님이 되는 꿈'은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미는 굴절된 바처럼 모두 다 하나로 되는 전체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하나인 님'이 아니라, '단 하나인 님'입니다.
단 하나인 것이라, 그렇게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것이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하나밖에 없는 님'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를 이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님으로 보는 일, 이것이 '하나님이 되는 꿈'이 실현될 수 있는 정확한 방향성입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의 꿈을 무시하지 않는 일."
개인의 꿈을 무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과, 그 사람의 시간과, 그 사람의 존재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중2병의 전체주의는 이처럼 전적으로 개인의 존재를 무시하며, 그 꿈을 짓밟습니다.
"모두가 다 한 마음 한 뜻으로 광장에 나가 민족과 역사의 중대한 사명을 위해 한 몸처럼 불사르고 있는데, 너는 유채꽃보러 제주도로 자전거여행을 가겠다고? 팔자 좋다. 참 철없다. 사람되려면 멀었다. 진짜 실망이다. 그렇게 살아서 어디 잘 되나 함 보자."
여기에는 꿈의 우열이 규정되고 있습니다.
빨간휴지 귀신과 파란휴지 귀신 사이에 선악의 등급이 매겨지고 있습니다.
소위, 어제 내가 꾼 꿈이 진정한 꿈이고, 니가 꾼 꿈은 가짜 꿈이라는 폭력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민족, 역사, 정의, 국가, 겨레, 동포, 공동체, 진실, 사명 등의 고급언어로 수식된다고 해서, 어떠한 꿈이 다른 꿈보다 더 진정한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세계를 구하는 정의의 용사가 되는 꿈도 그냥 꿈이고, 개꿈도 그냥 꿈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꿈이라면, 우리는 그저 그렇게 꿈꾸며 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거대한 꿈이나, 작은 꿈이나, 똑같은 꿈입니다. 그 위상과 중요도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더 진중한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굳이 '제대로'라는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자신이 하나의 꿈을 정해진 형상에 가두어놓고 그 꿈을 진정한 꿈이라고 말하며 타인에게도 종용하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제대로 사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폭력입니다. 마치 제대로 된 삶의 형태가 있는 것처럼, 제대로 된 목표가 있는 것처럼, 즉 제대로 된 꿈이 있는 것처럼, 그 고정된 자의적 기준으로 타인의 꿈을 무시하는 것이 바로 폭력입니다.
제대로 산다는 것은, 삶을 삶답게 산다는 것입니다. 곧, 꿈을 꿈답게 꾼다는 것입니다.
꿈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은 변화무쌍하게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개인에게 찾아오는 꿈을 타고 함께 흐르는 일이, 다가오는 마음을 따라 함께 흐르는 일이, 바로 삶을 제대로 사는 일입니다.
곧, 고정된 형상의 꿈만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려고 고집부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새롭게 흘러온 현재의 꿈을 정직하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가두는 일이 아니라, 우리로부터 마음을 해방하는 일, 그것이 체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모든 체험은 깨달음입니다. 몰라도 그렇게 깨달아지며 흘러 갑니다. 물론 악몽에 갇혀 있던 순간이 정직한 현재의 체험을 통해 흐름을 회복하게 된 속에서는 조금 더 그 감동이 인상적으로 조명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순간 상대적으로 보다 잘 드러나게 된 깨달음의 현상일 뿐, 깨달음의 의미는 실상 모든 체험 속에 이미 녹아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잘 꿈꾸는 일이 곧 잘 깨닫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잘 꿈꾼다는 것은, 꿈을, 마음을, 시간을 잘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체험한다는 것은 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잘 개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단 중2병의 꿈만이 아닙니다. 모든 꿈은 '하나님이 되는 꿈'입니다.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님이 되는 꿈입니다.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그 모든 꿈, 그 모든 마음, 그 모든 시간은 우리를 정확하게 이 개인이 되는 현실로 안내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개인은 절대적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개인은 절대적입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의 맨 위라는 말이 아닙니다. 중2병의 꿈이 그러하듯이, 대다수의 몰개인적 집단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기만이 개인으로서의 특별한 위상을 점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적인 개인과 집단의 구분은 상대적인 양적 척도를 적용해 이루어진 표현입니다.
그러나 존재는 양적인 측량이 불가합니다. 불가능이 아니라 불가입니다.
존재라고 하는 표현을 생명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의 손 위에 올려진 작은 생명의 의미는 양적인 기준에 따라 객관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평가 이전에, 평가를 불허합니다.
이와 같이, 내 삶의 의미는 그 어떤 평가도 불허합니다.
이 측량될 수 없는 생명의 의미가 곧 존재의 위상입니다. 바로 개인이라고 하는 우리 존재의 위상입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은 절대적입니다.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님입니다.
하나님입니다.
무수한 묘사가 간곡하게 알리듯, 하나님은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개인은 절대적입니다.
거대한 꿈이나 작은 꿈이나 똑같이 평등한 꿈이듯이, 만 개의 생명이나 하나의 생명이나 그 무게는 같습니다.
개인은 결코 집단을 위해 희생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모독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어떠한 이를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로 체험하게 될 때, 아마도 그 사람을 향한 사랑 속에서 그렇게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우주가 그 사람 하나로 다 찬다는 사실을.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는, 바로 하나의 개인이 우주만큼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사랑입니다.
단 하나인 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꿈꾸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깨닫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 둘은 같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을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이라는 가장 귀한 이로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아무리 현재에 작고, 초라하고, 모자라게 느껴져도, 이것을 정당한 그 크기만큼, 바로 우주만큼 사랑하기 위해 이 현재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과, 이 사람의 시간과, 이 사람의 존재를 사랑하기 위해, 그렇게 우리 자신의 인생이라고 하는 이 정다운 꿈을 사랑하기 위해 나인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