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짧은 마음생활백서 #1

"동의와 모방"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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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에서 기도나 찬양의 마지막에 붙이는 "아멘(Amen)."이라고 하는 말은 "동의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동의의 의미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그것은 "맞습니다. 바로 그대로 나에게도 될 것임을 내 자신이 받아들입니다."라고 하는 승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승인은 언제나 그것을 승인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승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은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해 애인이 없다고 생각하던 이가 "너, 애인 반드시 생기게 될 거야."라는 말을 듣고 "네, 진실로 동의합니다."라고 그 말을 승인했을 때, 이는 이제 그가 자신을 애인이 있어도 되는 괜찮은 존재로 승인한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이처럼 그것이 자신에게 이루어져도 될 만한 존재로서 자신을 승인했기에, 그것은 된다.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안되는 99%의 경우는, 우리가 스스로 그 일을 우리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부를 향한 모든 동의의 표현은 사실 우리가 정해놓은 우리 자신의 불가능성을 깨는 것이다.


자신을 더욱더 괜찮고 사랑스러운 존재로서 더 많이 허락하는 것이다.


더 많이 허락된 것은 더 많이 실현된다.


이처럼, 동의는 가장 많이 되는 길이며, 또한 가장 빨리 되는 길이다.


인간이 각자 저마다의 조건 속에서 파내려간 가능성을 통해 실현된 멋진 일들에 동의하는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인간의 일이었고, 나도 바로 그 인간이기에 그것이 나의 일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것으로 인정했으니 나의 것이 된다. 당연하다.


때문에 동의는 결국 인간에 대한 수용이자 자기에 대한 수용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외적인 형식으로는 이 동의와 비슷해보이지만 그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방이다.


동의와 모방의 핵심적인 차이는, 동의는 자기수용을 근거로 하지만, 모방은 자기부정을 근거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방은 그것을 겉으로는 인정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시기하며 질투한다. 배알이 꼴리지만 억지로 참으며, 그래도 일정 부분 좋아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 인정하며 따르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방은 자기를 누르며, 곧 자기를 부정하며, 자기가 아닌 것을 힘들여 얻어내고자 한다.


그렇게 무리한 힘을 기울인만큼, 조금이라도 성과가 있다면 그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이 또한 이 모방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모방의 대상이 된 이는 최대한 무시되며 홀대된다. 그래야만 모방의 주체는 자신이 모방으로 그것을 얻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는 까닭이다.


"카피레프트."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독점없는 민주적 평등을 위하여."


이러한 언어들로 모방의 주체는 자기의 모방을 정당화한다. 모방의 대상을 의도적으로 소외시키는 행위를 합리화한다.


그러나 모방의 주체가 결코 소외시킬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양심이다.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기능이다. 인간의 온전성이 망각되었을 때 그것을 아픔으로 알리는 것이 바로 양심의 기능이다.


모방을 하는 이는 모방의 출발점인 자기부정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인간을 부정하게 되기에, 모방을 하면 할수록 인간의 온전성은 망각된다. 그래서 늘 아프다. 아픈 만큼 성공의 향기에 도취되어 그 아픔을 잊고 싶어한다.


그러나 모방으로는 성공하지 못한다. 단순한 이야기다. 자기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드높이려는 일은, "앉으면서 일어나!"의 구령에 맞추어 열심히 PT를 하는 일과 같은 까닭이다. 이루어지는 것은 없으며 힘만 빠진다.


나아가 늘 "니가 했는데 내가 못할 것 같아?"라는 경쟁적인 태도로, 실상 모방의 대상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기 위한 의도로 움직이는 모방의 주체에게 협조적일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을 부정하는 이가 인간의 힘을 통해 인간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말이다.


이처럼, 동의는 가장 성공적인 인간의 방식이며, 모방은 가장 성공적이지 못한 인간의 방식이다.


이것을 인간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동의는 늘 인간을 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홀로 열심히 수로를 파고 있던 이가 있다. 그 결과로 물이 밭에 흘러들어와 생명이 자라게 되었다. 아름다운 역사다.


이 모습을 보고 동의하는 이는, 그가 뚫은 수로의 물이 자기의 밭에도 들어와 여기에서도 생명이 자라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이다. 즉, 그가 만든 아름다운 역사에, 바로 그 아름다움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가 정확하게 아름다운 인간으로 보이게 된다. 그의 온전함이 새겨진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말이 나오게 된다.


"아, 홀로 수로를 파느라 정말 고생많았겠구나."


이처럼 동의는 반드시 동감을 수반한다.


때문에 동의는 모방과는 전혀 달리, 동의되는 상대를 결코 소외시키지 않는다. 아니, 소외시킬 수 없게 된다. 인간은 결코 소외될 수 없이 가장 긍정된다.


그래서 동의하는 이는 인간이 그의 편이 된다. 그가 인간을 기억하듯, 인간이 그를 기억한다. 인간의 아름다운 실현의 역사가 그를 통해서도 발현될 채비를 마친다. 인간에게 동의하는 그 또한 인간으로 드러나게 된 까닭이다.


진실로 동의는 가장 인간을 기억하며, 가장 인간을 드러나게 하는, 가장 성공적인 인간의 방식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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