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과 탐구"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그 어떤 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
특히나 삶을 더 제대로 살 수 있게 해줄 것 같은 진리라고 하는 것들은 더더욱 숨겨져 있지 않다.
진리는 로버트 풀검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에서처럼 유치원생도 알고 있는 것이며, 수지 베커의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고양이에게서 배웠다』에서처럼 고양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진리 중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뻔하게 묘사해보자면 이러할 것이다.
"마음대로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 진리가 뻔해지고, 심지어 진리도 아닌 것처럼 취급받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이렇게 살면 혼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로 모를 수가 없는,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생생히 기억하는 이 진리를,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 무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오 진리여,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탐구라고 말한다.
이 탐구를 위해, 위대한 스승을 찾아 다니고, 유튜브를 보며 연습하고, 자기계발서를 수집하고, 정치인들을 추앙하고, 숨겨진 음모론적 정보를 가르치는 지적 리더처럼 활동하는 미디어 구루들의 이야기를 학습하는 식으로 진을 홀딱 뺀다.
그렇게 먼저 진이 빠진 뒤에 남은 기력을 겨우 끌어모아 우리가 이어서 하게 되는 활동이 있다.
그것은 추구다.
'진리의 실천'이라는 미명으로, 탐구는 추구로 이어진다.
이제 위대하신 분들의 말씀에 따라 진리를 획득했으니, 그 진리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기 위한 추구를 이루려는 것이다.
그 위대하신 분들 자신도 정작 살지 않는 그 진리의 말씀에 대해, 우리는 매일같이 반성하고, 자책하고, 스스로를 경계하며 열심히 그 말씀대로 살 것을 추구하고 있다.
진리의 담지자처럼 행세하는 위대하신 분들은 7인의 사무라이처럼 비장한 공의로 한 자리에 모여 우악스러운 마스크보다는 우아스러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함께 누리고 있는 동안, 우리만 홀로 외로이 카페에서 훅훅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열렬히 진리의 규칙을 지키려 하고, 혹여나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거나 커플끼리 붙어앉은 이가 있다면 충혈된 눈으로 그 사람을 노려보며 마음속으로 웅장하게 비난하느라 괜한 힘을 쏟게 되는 모습과도 같다.
그렇게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우리의 남은 기력은 전부 소진되며, 그 결과 우리는 호구가 된다.
탐구, 추구, 호구로 이어지는 3단계의 프로세스다.
인류의 역사에서 무수하게 일어난 비극들은 사실 단 하나의 비극이다.
그것은 인간의 호구화다.
인간을 우습게 보는 일이다.
그리고 인간을 가장 우습게 보는 일은, 자기는 마음대로 살면서, 다른 이들은 마음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즉, 자기와 자기의 친밀한 아군들에게는 "마음대로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는 진리대로 사는 일을 권장하면서, 자기의 경계 밖에 있는 남들에게는 거짓 진리를 제공함으로써 진리대로 사는 일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다.
인간을 호구로 만드는 이 거짓 진리가 바로 탐구되며 추구되는 진리다. '앎의 진리'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우리가 더 알아야 필요도 없이 이미 이 세상에 올 때부터 알고 태어난 정말로의 진리는 '삶의 진리'다.
이 '삶의 진리'는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할 앎의 영역이 아니다.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만 탐험하는 감수성을 가진 자신의 면모를 일깨운다.
곧 '삶의 진리'는 탐험의 자신이다. 그 자신 자체가 진리의 존재로서 우뚝 서는 것이다.
이미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마음대로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하는 진리를 자신의 존재로 체험해나가는 것이 바로 탐험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탐험은 우리가 기꺼이 마음대로 살아도 좋다는 것을 그렇게 삶으로써 확인해가는 것이다. 마음대로 생겨먹은 지금의 자신인 대로 살아도 좋다는 것을 그렇게 삶으로써 이해해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진리가 정말로 진리였음을 우리의 삶에서 다시 기억해가는 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는 왜 이토록 화가 나있는가?
화의 목소리는 이러하다.
"왜 니들만 마음대로 해?"
우리는 마음대로 살면 나쁜 존재인 것처럼,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제대로 살아야 할 진정한 정답의 모습이 있는 것처럼 각종 쇼를 통해 '앎의 진리'를 장엄하게 전시해놓고, 그 전시자들은 마트에서 떼쓰는 아이의 모습과 같이 유치할 정도로 노골적인 제 마음대로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화가 많이 나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앎의 진리'의 전시자들은 왜 이러한 일을 벌이게 되는가?
"마음대로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하는 진리를 진리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진리에 대한 불신은 곧 인간에 대한 불신이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애초 마음대로 살도록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존재가 대단히 불편하다.
곧, 자유로운 인간이 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이는 아마도 제 마음대로 사는 것 같은 다혈질의 엄마아빠에게 호되게 혼나면서 컸을지 모를 이들의 과거가 크게 작용하기도 할 것이다.
이른바, 이들은 마음대로 산다고 하는 일에 대해 철저하게 오해해버린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아는대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는대로 세상을 보게 된다. 부처 눈에는 다 부처로 보인다는 말과 같다. 자신이 부처를 알기에 부처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부처로 살기에 부처로 보이는 것이다.
때문에 마음대로 삶으로써 행복함을 체험한 이의 눈에는, 다른 이가 마음대로 삶으로써 행복할 수 있는 현실이 보이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의 마음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마음도 전적으로 존중하게 된다. 다른 이가 마음대로 살 수 있는 현실을 적극 권장하게 된다. 그 현실이 자신에게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앎의 진리'가 아닌 '삶의 진리'로 사는 이는 결코 자기만 생각하며 살 수가 없게 되며, 자기만 마음대로 하고 남은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일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이와 같다.
"더 숨겨진 것이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더 숨겨진 것을 더 알아야 하는 일에 매진하게 함으로써, 곧 음모론적 진리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일에 매진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호구로 만드는 일이 바로 '삶의 진리'를 탐험하는 그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곧, 인간에 대한 조종과 통제의 현실이다.
인간이 두려운 이들만이 숭고한 음모론적 기제를 내세워 인간을 격렬하게 조종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의지를 펼치게 된다. 그 의지를 통해 자신들의 두려움은 은폐하고, 사람들이 대신 두려워하도록 만들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두려움 많은 '앎의 진리'의 전시자들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억압한다. 그리고 그 결과, 자신들도 필연적으로 억압된다.
그래서 사실 이들도 마음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모습이 그렇게 드러난다 하더라도 실감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들은 하고 싶은 것을 꾹꾹 참으며 청렴결백하게 대의를 위해서만 살아왔다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이를 다시 표현하면 이러하다.
"저는 평생동안 다른 욕망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사람들을 억압하고자 하는 그 욕망만을 한결같이 추구해왔습니다."
그렇게 모두를 억압하는 일이 '앎의 진리'의 전시자들이 해온 사실적인 모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가진 이 억압의 의지가 약해지는 순간이 분명 있다. 그것은 이들의 가족과 동지가 관여될 때다. 그러할 때 이들은 크세르크세스 왕처럼 관대해진다.
이것은 아주 교묘한 기만책이다.
마음대로 살고 싶은 소망을 강렬하게 억누르는 동안, 남에게도 그것을 종용한 만큼 자기도 차마 그 소망을 직접 이룰 수는 없기에, 이들은 자기라고 하는 것이 연장된 실체로서의 가족 및 동지를 통해 그 소망을 대신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자기는 사욕으로 살지 않는 척하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자기의 주변은 하고 싶은대로 이룰 수 있는 일거양득의 현실을 창조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일을 펼치는 이 또한 그가 속한 지지세력 속에서 결국 누군가의 가족이자 동지인 까닭에, 동일한 원리를 통해 그 자신도 결국 하고 싶은 바를 이루게 된다. 서로가 고결한 정체성도 지키고, 서로를 통해 내실도 얻는 식으로, 상부상조하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앎의 진리'의 연합체를 향해, 대단히 기만적인 이 이익집단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니들만 마음대로 해?"
다수의 사람들은 억압한 채 자기들끼리만 교묘한 방식으로 자유를 누리는 모습이, 결국 '삶의 진리'를 다수의 삶으로부터 소외시킴으로써 균열을 야기한다. 또한 '삶의 진리'가 제공하는 이득은 비밀스럽게 자기들만 향유하며 사람들에게는 허깨비 같은 '앎의 진리'를 종용함으로써 헛된 시간을 보내게 만드는, 소위 진리의 혜택을 독점하려는 의지가 이 균열을 더욱 공고화한다.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는 탐험이 필요한 것이다.
탐험은 세계에 나있는 균열을 향하는 것이다. RPG로 비유하자면 탐험의 소재가 되는 던젼은 분명 균열의 장소다.
균열을 탐험한다는 것은 균열로 더욱 깊게 파고드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탐험의 주체인 자신이 우뚝 세워져 그 균열에 침투하는 쐐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쐐기로 말미암아 결국 세계는 붕괴된다.
이 억압적인 '니들만의 세계'가 붕괴된다.
'니들만 마음대로'인 것이 더는 아니라, 마음은 원래 그러했듯이 나의 것으로 확인된다. 나도 얼마든지 가져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으로 분명하게 확인된다.
결코 숨겨져 있던 것이 아니다.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이처럼 숨겨져 있지 않았다.
언제나 바로 그러한 나였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유로운 나였다.
이처럼 균열은 우리에게 알리고 있었다.
우리가 진정 마음대로 자유롭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마음의 자유가 결코 특정한 이들에 의해 독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사실 위에 서있는 이는, 더는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진리다."
마음대로 살아가는 나라고 하는 이 진리가, 마음대로 살아가는 너 또한 진리임을 함께 개방시킨다.
그래서 모든 탐험은 나를 진리로, 동시에 너를 진리로 함께 확인해가는 일이다.
그 어떤 억압과 소외가 낳은 균열 속에서도, 내가 자유롭고 네가 자유롭다는 인간의 자유를 쐐기처럼 우뚝 세워 그 균열 자체를 통째로 무화하는 일이다.
이처럼 마음대로 사는 일이 균열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균열에 대한 회복책이 바로 마음대로 사는 일이다.
마음대로 사는 인간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방종이라는 문제다. 그러나 방종은 자유의 결과가 아니다. 방종은 정확하게 억압의 결과다. 곧, 마음대로 사는 일이 억압된 이가 결국 가게 되는 길이 방종이다.
인간이 두려워서 인간을 조종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이 '앎의 진리'의 전시자들을, 우리는 이와 같이 분명하게 알아본다.
이들이 자기의 가족 및 동지에 대해 드러내는 모습이 바로 방종이며, 다른 누구가 아닌 이들이 바로 방종자들임을.
인간의 자유를 자신이 직접 걸어 스스로 확인하고자 하는 일, 그것이 탐험이다.
그래서 탐험하는 이는 결코 방종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초코파이를 먹는 일이 억압되었던 이가 초코파이 1억개를 자기와 자기 가족 및 동지들끼리 독점하여 먹고자 하는 일이 방종이다. 곧, 방종은 억압으로 인해 축소되어 비루해진 자유의 모습이다.
그러나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탐험은 초코파이가 없어도 가장 충만한 인간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초코파이로부터도 자유로운, 그 무엇에 의해서도 갇힐 수 없이 더욱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향하는 것이다. 곧, 탐험은 인간의 자유를 가장 거대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처럼 가장 거대한 자유를 향하고자 하는 이는, 가장 작은 자유에 결코 만족할 수 없다. 탐험자에게 방종은 진실로 불가능하다.
탐험하지 않는 탐구자들만이 방종한다. 남들을 호구로 만드는 방종을 행한다. 정의의 진리를 찾아 자유로워지자는 전시문구를 통해, 사람들을 자기의 것과 같은 크기의 비루한 자유 속에만 가두는 것이다.
그래서 "왜 니들만 마음대로 해?"라는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이렇게 옮겨져야 할 것이다.
"왜 니들만의 작은 자유를 자유라고 해?"
우리는 자유의 크기가, 곧 우리 자신의 면모가 이들에 의해 부정당해서 그렇게 화가 난 것이다.
자유의 크기는 존재의 크기다.
마음대로 사는 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욱 크게 존재해도 되는 정당한 존재로서 느끼게 된다.
탐험은 바로 이 자신이라고 하는 가장 온전한 존재의 크기를 확인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