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의 의미

"파란 장막을 찢고 파란 하늘 속으로"

by 깨닫는마음씨




우리 편은 이유를 막론하고 맹목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극단적 가족주의에 빠져 있는 이들.


그렇게 "우리 편은 무조건 옳아."라는 또 다른 가족주의적 독재와 대립하다가 자기들도 똑같은 독재가 되어버린 이들.


아이들을 거대한 악마들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퍼터널리즘 및 머터널리즘이 낳은 몽상에 사로잡혀 영웅놀이의 연극을 펼치는 이들.


그렇게 자기의 모습을 투사해 사람들을 불쌍한 아이처럼 굴절시켜 보며 자신들이 최고로 좋은 엄마아빠로서 이끌어주겠다고 하는, 자기 어린 시절에 자기 부모에게 꿈꾸던 모습을 이루기 위해 기획한 자기네 가족연극의 배역을 사람들에게 강제시키는 이들.


진정한 엄마아빠가 너희를 위해 이 한 몸 다 바쳐 희생하면서도 얼마나 어벤져스처럼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고 있는지의 기록을 SNS에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업로드해가며 미소짓는 이들.


그렇게 연예인병에 걸려, 자기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보다는 사람들이 자기의 팬보이가 되도록 만드는 이들.


언제나 쇼를 위한 블루 스크린을 무엇보다 높게 거는 이들.


그렇게 파란 장막으로 하늘을 가리며, 하늘 대신에 자신들이 파란 하늘인 척하는 이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이들을 떠나야 하지 않을까.


정말로 이제는 그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가족과 외적의 이분법, 동지와 적의 이분법, 선량한 목자와 사악한 늑대의 유아적인 이분법으로는 살아나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오늘날, 마음을 이야기하는 심리학 콘텐츠들이 왜 이렇게 인기가 있을까?


바로 지금이 마음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마음을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눈치채서, 마음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알아가며, 그렇게 마음이 알리는 바를 살아가려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핵심은 역설이다.


역설은 적이 죽어야 내가 사는 이분법의 모순이 아니다.


역설은 하나가 죽으면 반대되는 것이 같이 죽고, 하나가 살면 반대되는 것도 같이 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적폐를 청산하면 순수한 자기가 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린이들이 모순의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할 때의 착각이다.


적폐라고 말해지는 자신이 소외시킨 자신의 그림자를 없애면 자신도 같이 몰락하게 된다. 이것이 역설이다.


이 역설이야말로, 실제의 이 모든 것이 돌아가는 원리 중의 원리다.


역설로 살아갈 때 우리는 인간으로 무르익었다고 말한다.


종교철학자 틸리히의 말처럼, 인간이 유아적일 때는 낭만적이고 무고한 순수성을 꿈꾼다. 때묻지 않은 결벽한 자기를 꿈꾼다.


그러나 인간은 성숙됨에 따라 그 더러운 때라고 하는 것이 분명 그 어느 순간에는 절실한 삶의 필요에 따라 생겨났던 정당한 삶의 자취라는 사실을, 곧 인간이 살고 또 살리고자 했던 간절한 몸부림의 흔적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인간은 인간의 때를 용서하게 된다. 인간 자신의 때와 화해하게 된다.


용서는 청산하는 것이 아니다.


청산은 청소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감은 애초 청소의 소재가 아니다. 하얀 캔버스로 되돌려야 할 소재가 아니다.


오히려 엎질러져 생겨난 그 물감의 흔적에 붓을 더해, 그 위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는 창조적인 전환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잘못된 것은 싹 다 청소해서 제로로 만든 후에, 그 위에서 좋은 사람들끼리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자."


이것은 히틀러 어린이의 기획이었다. 바로 이것이 청산이며 청소다.


그러나 진실로 인간은 청소의 소재가 아니다.


아무리 인간이 미워도 그것이 청소의 소재가 아니라는 사실만을 이해하면, 그 이해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미움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는 사랑이 된다.


그렇게 너무 밉지만, 우리는 인간을 아직 사랑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인간임을 사랑할 수 있다.


인간인 우리 자신을 미움으로부터 해방하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아직 희망할 수 있다.


때문에 파란색은 미움으로 가득찬 화가 고이고 고여 생겨난 우울의 파란색이 아니라, 그 미운 인간도 인간임을 다시 기억하는 희망의 파랑새가 되어야 할 것이다.


명작 에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의 엔딩곡인 'Blue'에서는 다음과 같은 노랫말이 나온다.


"No black and white in the blue."


파란색은 하늘의 색이다.


하늘에는 원래 흑백이 없다.


모순이 아니다.


이분법을 초월해있다.


자유롭다.


이처럼 이분법을 넘어선다는 것, 바로 자유롭다는 것, 이것이 파란색이 담고 있는 원래의 의미다.


그리고 이 자유가 바로 희망이다. 파란색이 희망의 색인 그 이유다.


끝없이 미움을 창조해내는 흑백의 모순적 이분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다. 파란색의 의미 그대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것이 진실로 우리의 희망이다.


파란색이 우울의 의미로 전락하게 된 이유는, 파란색을 절대선인 것처럼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 이분법을 넘어서는 자유의 의미의 파란색을 선악의 이분법 안으로 가둔 것이다.


그렇게 파랑새를 새장에 가두었기 때문에 파랑새는 우울해진 것이다.


우울해진 파랑새는 울지 않고, 우리도 희망을 잃었다. 함께 우울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기억해야 한다.


정치가 파란색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파란색을 선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의 자유를 파란 장막에 가두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 이들이다.


그러나 파란색의 의미는 선이 아니라, 선을 넘어서는 것이다.


선을 넘어서면 악도 넘어서게 된다. 역설의 원리다.


이와 같이, 자유의 희망은 모든 이분법을 넘어서있다. 역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모든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기에 그것이 희망인 것이다.


동지와 적으로 나뉘어 영원히 투쟁하는 그 전쟁터의 경계를 수직으로 높이 활공하여 초월하는 바로 그것이 파랑새의 비행이다.


'더는 이제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분명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파랑새의 속삭임을 듣고 있다.


이 파랑새의 이름이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우리의 가슴에 담겨있는 하늘이다.


파란색은 그래서 정치의 색이 아니라, 하늘의 색이며 동시에 마음의 색이다.


때문에 우리가 진정 우리의 동의를 행사해야 할 곳은, 파란 하늘을 가리는 이분법의 파란 장막이 아니라, 이분법을 넘어서 자기와 똑 닮은 파란 하늘을 다시 찾기 위해 날아오르는 우리의 파란 마음이다.


이러한 노래가 있다.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희망이 가득한."


보았다.


파란 장막에 비친 파란 왕국을 떠나가며 그 너머로 보았다.


우리가 결코 잃을 수 없는 우리의 마음 나라를 보았다.


인간이 아무리 못났어도 인간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꿈이 이루어진, 그래서 또 인간을 가득히 희망할 수 있으며, 내가 그 인간이라서 마냥 좋은 마음 나라를 보았다.


인간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나라를 보았다.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나라는 희망을 보았다.


파란색의 정치를 거부하고 파란색의 하늘을 선택함으로써, 미움의 사슬을 끊고, 그 파란 하늘 속으로 마음껏 날아오른 파랑새의 시선 끝에 비친 일들이다.


이것이 우리의 일들이기를, 우리의 마음은 희망한다.


자유를.






Yoko Kanno -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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