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민주주의 그리고 선비

"민주주의를 꿈꾼다면"

by 깨닫는마음씨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


이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잠정적인 답은 다음과 같다.


'기득권 세력이 자기들의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반민주적인 모습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맞는 답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문제의 대상이 착각된 답이다.


여기에서의 기득권 세력이란 추상적 대상으로서의 자본가, 추상적 대상으로서의 강남상류층, 추상적 대상으로서의 보수집단이 아니다.


한국의 진짜 기득권 세력은 바로 선비들이다.


지금까지 60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이 선비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포기한 적이 없다. 구렁이처럼 처신과 외연을 바꿔오면서 기득권을 수호해왔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통해서도 이 선비들의 기득권 유지의 의지는 이어져왔다. 놀랍게도 오늘날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들은 노골적으로 자신들을 선비로 자임하기까지 하며, 이들에 대한 기대와 평가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된 모습으로 착각되는 대표적인 방식은, 고결한 성군 아래에서 뜻있고 깨끗한 선비들이 백성들을 위해 치세를 이루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교주의 국가인 조선이 꿈꾸던 이상적인 왕정의 모습이다.


민주주의와는 사실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장 반민주적인 원리를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위장해 선비들은 왕정 국가의 모습을 지속하려고 한다.


왕이 투표로 결정된다고 그것이 민주주의인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모두를 잘 다스려줄 왕을 뽑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왕처럼 잘 모실 시종장을 채용하는 것이다.


"쟤가 덩치 좋고 무거운 거 잘 옮길 것 같아 난 쟤가 좋은데."

"그래도 쟤 생긴 게 우락부락해서 우리 여행갔을 때 집 잘 지킬 것 같지 않아?"

"쟤가 눈치는 있는 것 같아서 장보기 같은 잔심부름 잘 할 것 같아."


민주주의에서 투표를 한다는 것은 이처럼 사용인을 뽑는 것과 같다. 곧, 사용인으로서의 능력을 봐야 할 일이지,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봐야 하는 일이 아니다.


사용주와 사용인의 관계는 철저한 필요의 관계다. 필요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확하게 딱 필요만큼을 채우기 위한 관계다.


때문에 사용주가 사용인에게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사용주-사용인 관계가 아니라 굴절된 양육 관계와 같은 것이며, 나아가 사용주가 오히려 사용인을 절대선으로 보고, 그 말을 하늘과 같은 정의의 가르침으로 따르며, 유일신처럼 섬기는 일은 이미 그 관계성의 파괴를 의미한다.


즉, 민주주의의 파괴를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를 잘 다스려줄 진정한 왕을 우리의 손으로 뽑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이미 왕에 경도된 그 생각 자체가 민주주의가 파괴된 현실을 지시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민주주의가 진정한 왕을 뽑는 일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 것이 바로 선비들이다.


이들이 민주주의의 제도를 왕권다툼의 제도로 둔갑시켜 왕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유는, 왕이라는 자리가 있어야 선비라는 자신들의 자리가 담보될 수 있는 까닭이다.


선비들은 왕을 그 자체로는 텅빈 플랫폼으로 본다. 그 플랫폼의 내용으로 기능하는 것이 바로 선비들 자신이다. 곧, 왕정에서의 실권자는 바로 선비들이다. 플랫폼으로서의 왕이 있어야만 자기들은 안전한 구조 속에서 실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 호가호위하는 권력이 바로 선비들이 결코 놓지 않으려고 하는 기득권이다.


이것은 마치 강직하나 우둔한 아빠의 슬하에서 자식이 세상 제일 잘난 줄 알고 똑똑한 척하는 모습과 같다.


똑똑한 척하기 위해서는 투쟁을 부르는 말을 많이 해야 한다. 적을 상정하고 그 적을 제압해야 자기의 잘남을 증명할 수 있는 까닭이다.


오늘날 소위 킹메이커들이 말이 많은 이유다.


왕정을 옹립하기 위해 활동하는 기획자들, 연출가들, 선동가들, 구루들, 정치인들, 더욱 노골적으로는 이들의 자식들까지 대단히 말이 많은 시대다.


들어보면 다 자기가 얼마나 잘났는지에 대한 말들이다. 심지어는 아빠가 아니었어도 자기는 잘났다고 하는 말들이다.


이처럼 킹메이커가 왕의 뒤에 서고, 자식이 아빠의 뒤에 서는 이유는 자기의 잘남을 더 강렬히 주장하기 위해서다. 옹립된 기준을 하나 놓아야만 그 기준에 대응되는 여러 태도들로 자기의 잘남을 드러내는 일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실상 왕으로 추대된 이도 소외되고 그를 왕으로 보며 자신의 힘을 양도한 이들도 소외된다. 오직 킹메이커인 선비들만이 그 모든 주인공이 된다.


조선이라는 망국에서 일어났던 일 그대로다.


조선이 망하게 된 이유 그대로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선비들에게 희롱당해야 할까? 우리의 인생도 조선처럼 망할 때까지일까?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필요의 문제다.


"나는 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왕의 불필요함을 이해하는 것이, 곧 왕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시동하는 첫 걸음이다.


왕을 필요로 하는 것은 선비들뿐이며, 아빠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그의 아이들뿐이다.


선비는 아주 정확하게 아이들이다.


아무리 잘난 척해도 아빠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고 무기력하기만 한 헛똑똑이 아이들이다.


근엄한 척 예의범절을 갖추고 성숙한 태도를 형식적으로 연출한다고 그것이 아이가 아닌 것은 아니다. 많은 책을 암송하고 고풍스러운 시조를 읊으며 한자어로 된 고급지식을 학습했다고 그것이 아이가 아닌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인 나이가 중년을 넘겼다고 그것이 아이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최루탄 냄새를 조금 더 맡고, 화염병을 다양한 구질로 던질 수 있으며, 구치소에서 보낸 달 없는 밤의 비극을 노래한다고 그것이 아이가 아닌 것은 아니다.


어른은 엄숙한 경험의 누적과 이에 바탕을 둔 진중한 학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군대의 병장이 일병보다 어른이 아닌 것과 같다. 둘은 그저 계급놀이를 하는 똑같은 아이일 뿐이다.


아이를 어른으로 전환시켜주는 것은 학습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연속성의 학습이 아니라 불연속성의 깨달음이다.


바로 나의 깨달음이다.


"나는 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바로 그 깨달음이다.


왕이라는 개념이 담고 있는 성인군자, 지도자, 대통령, 군주, 리더, 아버지, 신, 로고스, 구조, 규칙, 도덕, 정의, 민족, 조상 등과 같은 그 모든 함의가, 나로서 존재하는 데 있어 애초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그 깨달음으로 사는 이가 어른이다.


나는 오직 스스로 존재한다.


그 어느 위대한 왕이 존재하지 말라고 해도 존재한다.


위상으로 치자면 언제나 왕은 나의 밑이다.


나보다 더 존귀한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존재하는 이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나의 존귀함의 위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실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때문에 민주주의는 아이가 아닌 어른의 길이다.


그러나 이 어른이라고 하는 것은 유교에서 말하는 인의예지의 덕목을 잘 학습해서 체화한 군자의 모델이 결코 아니다. 어른은 유교적 모델의 정반대편에 있는 깨달음의 모델이다.


공자가 노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삽화는 유명하다.


도덕적 학습의 절대적 중시는 깨닫지 못한 열등감의 표현이다.


이 열등감은 바로 아이의 열등감이다.


아이는 자신이 어른이 되지 못한 미숙한 존재라는 사실에 늘 열등감을 갖는다. 그래서 열심히 경험치를 쌓고 학습을 강화하면 그 결과가 누적되어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마치 RPG의 레벨업의 개념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는 계속 아이로 머무르게 된다.


즉, 어른인 척하려 하기 때문에 아이는 계속 아이의 상태로 남는다. 그래서 어른이 되지 못하게 된다.


가장 깨달음의 반대편으로 가는 방법은, 깨달은 척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는 절대로 깨닫지 못하게 된다.


자신들은 이치를 깨우친 척하며 사람들을 계몽하려고 하는 일, 이것이 바로 선비가 하는 대표적인 일이다. 그렇게 깨달은 척하고 있기 때문에 선비들은 결코 깨달을 수 없게 된 이들이다. 그 결과, 깨달음에 대한 열등감이 심화되어 더욱 깨달은 척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진 이들이다.


깨달은 척하는 선비들이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는 명백하다.


이들이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왕을 계속 옹립하려고 한다는 것, 그렇게 자신을 세우기 위해 왕이라는 대상을 계속 의존하려고 한다는 것, 그것이 결정적인 증거다.


"물론 나에게는 왕이 필요없지만, 아직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왕이 필요해. 그래서 왕을 세우려는 거야."


이러한 말은 선비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장 기만적인 말이다.


바로 이 말 자체가 선비들이 깨달은 척하지만 실은 깨달음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나에게 왕이 필요없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모든 인간에게 진실로 왕이 필요없다는 사실이 같이 확인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인간이라는 운명 자체를 나로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은 이는, 곧 어른으로 사는 이는, 그 자신이 인간의 대표자로 우뚝 선다. 다른 대표자를 세워야 할 일이 없으며, 그러할 이유가 없다.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자신이 지금 인간의 대표라는 명백한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 또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각이 전부 고귀한 인간의 대표다. 그러한 우리를 또 대표해줄 더 위대한 아이콘이 필요한 것이 결코 아니다.


깨달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우리가 각자 자신만의 길로 인간을 대표하는 모험을 떠나는 동안, 그 뒤에서 우리의 여행물자를 지원해줄 시종장일 뿐이다. 그렇게 따듯한 밥을 전송함으로써 인간의 모험을 응원해줄 유능한 행정보급관일 뿐이다.


밥그릇도 챙겨주지 못하면서, 오히려 자기가 인간의 대표자인 것처럼, 나아가서는 절대선의 신인 것처럼 굴고 있는 시종장은, 곧 주제파악 못하고 있는 시종장은 결코 우리의 필요가 아니다.


그러한 왕은 그저 선비들의 필요다. 깨닫지 못한 이들의 필요며, 의존할 아빠 없이는 못산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의 필요다.


민주주의는 파파스머프의 온후한 인품과 현명한 지혜의 통치 속에서 모든 스머프 아이들이 순수하고 해맑게 까르르 살아가는 스머프 마을의 그림이 결코 아니다.


동화책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왕국의 모습이 전혀 아니다.


정의의 기사가 사악한 용과 싸워가며 더 많은 피를 흘려야만 그 피의 댓가로 도달할 수 있게 되는 저 먼 요정나라가 아니다.


은하영웅전설의 양 웬리가 살아 있어야만 비로소 이룰 수 있는 꿈이 아니다.


그 반대로, 왕을 꿈꾸는 그 모든 아이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서 발견되는 것이 민주주의다.


꿈에서 깨어난 그 깨달음의 자리에서 만나지는 것이 민주주의다.


때문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꿈꾼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민주주의에 대한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다.


선비들이 민주주의라고 이름붙인 그 왕의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가 왕의 꿈에서 깨어남으로써, 왕 또한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일이다.


그 왕을 통해 진정한 실권자인 자기의 모습을 꿈꾸던 선비 또한 꿈깨게 하는 일이다.


이 선비의 기득권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 곧 왕의 꿈을 끝내기 위해, 그래서 우리는 투표장에 끝내 가거나, 또는 결코 가지 않는 것이다.


시종장이 없어도 우리는 인간의 대표로서 모험할 수 있는 까닭이다.


시종장 없이도 아무 문제없이 모험이 가능하다는 사실만큼, 시종장의 필요를 진지하게 되묻는 강력한 방식이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왕으로서 행세하려는 시종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나아가 보험판매원처럼 당근과 채찍의 기제로 왕을 우리에게 강매하려는 선비는 가장 필요없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왕을 뽑는 거룩한 대의의 권리 따위를 행사한 것이 아니다. 필요에 따른 20리터짜리 생활폐기물용 봉투를 주문하거나 주문하지 않을 자유의 권리를 행사한 것이다.


생활의 필요에 유용하지 않은 그 모든 대의는 전부 선비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수작임을 이해하며,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인생을 살아간다. 전자레인지와 같은 유능한 사용인이 있으면 조금 더 편리하지만, 전자레인지가 없어도 결코 못 살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왕이라고 하는 것이 고작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우리는 오늘 하루도 인생이라는 모험을 시작한다.


왕이 필요하지 않은 우리 자신만을 신뢰하며.


왕이 필요하지 않은 우리 자신만을 왕처럼 귀하게 존중하며.

우리는 오늘도 깨어난다.


인간의 대표로 깨어난다.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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