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모토 노부유키의 걸작 『은과금』에서는 구루가 어떻게 사람들을 희롱하는지의 기제가 아주 잘 묘사된다. 물론 본작의 주인공인 히라이 긴지가 희롱의 의도를 가진 구루는 아니지만 그 방법론 자체는 정확히 파악해 활용한다.
사람들의 인정욕을 자극하는 것.
이것이 미디어 구루의 방법론이다.
평범한 소시민을 거악에 맞서는 무협지적 영웅인 것처럼 포장해줌으로써, 그렇게 성은을 입은 이들이 자기를 영웅으로 봐준 구루를 위해 충성을 바치게 되는 현실을 창출하는 것이다.
늘 똑같은 일만 반복되는 것 같은 자기의 인생을 무료하게 느끼는 이들이, 그 결과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서 귀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경험하는 이들이, 그만큼 세상의 중심에 서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정의의 용사와 같은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게 될 때, 바로 이 꿈을 구루는 공략하는 것이다.
미디어 구루가 미디어 구루인 이유는, 영웅을 탄생시키는 기제로 미디어를 활용하는 구루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순식간에 그 막강한 전파력으로 인해 개인을 영웅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 미디어 구루는 이 사실을 잘 안다. 본인도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영웅처럼 행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디어 구루가 활용하는 미디어에 의해 영웅으로 추대된 개인은 사실 영웅이 될 수 없다. 그 실제적인 위상은 그저 미디어 구루의 장기말일 뿐이다.
미디어 구루는 인정욕에 목마른 개인에게 미디어라는 주사기로 영웅약물을 도핑한 다음 그 뒤로 빠진다. 그렇게 자신은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고, 도핑된 그 가공의 영웅이 미디어 구루를 대신하여 미디어 구루의 적과 투쟁을 벌이며 흡사 마왕과 싸우는 용사게임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즉, 미디어 구루에게 남용되는 개인은 그저 정의의 용사라는 허울좋은 이름이 붙여진 놀이말에 불과하다.
심하게 말해, 미디어 구루의 장난감이다.
미디어 구루의 세치 혀 위에서 굴려지는 츄파춥스와 같다.
그래서 이 미디어 구루가 사람들에게 하는 행위의 본질을 희롱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다.
미디어 구루는 분명 게임의 감각으로 움직인다.
미디어 구루는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탁월한 지성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다는 점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지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방식이 바로 사람들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자기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만큼, 그는 자신의 지성에 대한 만족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이가 게임의 외견적 규칙을 파악하고, 나아가 버그와 같은 숨겨진 규칙까지도 통달함으로써, 자신이 그 게임의 전문가로서 게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신적인 힘의 실감을 누리고 싶어하는 모습과도 같다.
이러한 통제욕이 더 심화되면, 이제 그는 자신이 직접 게임의 판을 만들고자 하게 된다. 프로그래머처럼 자기가 만든 가상현실의 게임판 위에서 자기가 정한 규칙에 따라 사람들이 행동하기를 꿈꾸게 된다. 곧, 사람들을 놀이말과 같은 대상으로 취급하여, 그 놀이말을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자신이 갖고 있는 통제욕의 쾌락을 증대시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선동가로 거듭나게 된다.
현실에서 선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현실을 게임처럼 운용하고자 하게 되는 것이다.
게임의 감각으로 삶을 살아가는 이의 최종적인 형태다.
자기(그리고 자기와 함께 게임을 즐기는 동지들)만 게임 밖에서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의 위상을 점하고, 나머지는 다 유희를 위한 게임 속의 도구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현대판 신선놀음이다.
때문에 이러한 미디어 구루가 무엇보다도 먼저 챙기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안전이다.
자기가 안전해야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미디어 구루는 가공의 영웅을 만들어 자기를 향한 현실의 공격이 그 가공의 영웅에게 대신 향해지도록 만든다. 이러한 방식으로 콜로세움의 혈투는 펼쳐지고, 미디어 구루는 안전한 곳에서 자기가 시비를 붙인 싸움구경의 즐거움을 얻는 동시에, 그 싸움의 훈수를 두는 즐거움까지도 함께 얻게 된다.
학창시절에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힘센 친구 둘 사이를 이간질해 반의 1짱 자리를 놓고 그 둘이 싸우게 만든 뒤, 그렇게 자기 뜻대로 돌아가는 학급의 판세를 보며 스스로 천재라고 심히 뿌듯해하는 바로 그 모습과도 같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할까?
사실은 미디어 구루가 아주아주 겁쟁이라는 것이다.
그는 단지 게임을 지속하기 위해 안전을 확보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안전을 얻고 싶어서 끊임없이 게임을 펼치며 세상 모든 것을 게임판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가 게임의 감각으로 통제욕을 실현해 얻는 그 쾌락은 정확하게 생존의 쾌락이다.
자기 대신에 성공적으로 사람들을 죽게 했고 그 결과 자기는 살아남았다는 생존에의 쾌락감이다.
미디어 구루에게는 게임이라는 것이 분명 생존의 위협에 대한 해결책이자 방비책이다. 자기가 위협받는 것 같은 현실을 게임의 감각으로 바꾸어야만 자신이 그 현실을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힘의 문제와 연결된다.
게임을 잘 다룬다는 것은, 게임 속 세상과 사람들을 잘 통제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잘 희롱한다는 것이다. 즉, 잘 희롱할 수 있는 만큼, 미디어 구루는 자신이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에게 희롱은 힘이 행사되는 정당한 방식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아닌 다른 이가 힘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딘가에 숨어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힘을 가진 악마의 모습을 음모론적으로 계속 묘사해낸다.
그는 두렵기 때문이다. 힘을 가진 다른 이가 자신을 희롱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대체로 미디어 구루가 이러한 두려움을 내재하게 되는 데는, 그의 부모, 특히 그의 엄마가 주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엄마가 자기를 통제하려는 심리게임 속에서 희롱당하며, 나아가서는 통제를 위한 직접적인 물리력의 행사 속에서 희롱당하며, 그 희롱을 죽을 것처럼 두렵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자기를 희롱하기 위해 행사하는 그 힘이 정말로 죽을 것 같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미디어 구루가 희롱을 통해 얻게 된 것은, 무력한 수치심과, 커다란 죄책감과, 가장 서러운 분노다.
우리가 미디어 구루를 통해 받게 되는 바로 그것들이다.
곧, 미디어 구루는 자신이 희롱당함으로써 얻게 된 가장 비극적인 인간성 말살의 징후들을, 역으로 자기가 희롱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똑같이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비극에 비극을 더해,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미디어 구루는 게임의 운영자가 아니라 사실 지옥의 운영자다.
자신이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이 두렵게 경험되었던 그 희롱의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자기를 희롱한 이와 정확하게 똑같은 모습이 되어 그 희롱의 힘을 사람들에게 행사함으로써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게 되는 바로 그 장본인이 미디어 구루다.
즉, 미디어 구루가 우리에게 정의의 용사가 되기를 촉구하며 그 반대편에 등장시키는 거악의 마왕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소재가 아니라, 미디어 구루 자신이 바로 우리의 생존을 가장 위협하는 소재다.
모든 사이비교주가 그러하듯, 미디어 구루 또한 자신을 진지하게 구원자로 생각한다.
특히 악과 맞서 싸우는 원탁의 용사들을 뒤에서 격려하고, 지지하며, 그들에게 지혜를 제공하는 멀린 같은 대마법사의 포지션으로 자신의 입장을 상정한다.
자신이 구원자라는 이 착각 때문에 미디어 구루는 자신이야말로 사람들에 대한 위협자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이러한 망각의 크기는 그 자신을 가장 위협했던 유일한 존재인 그의 부모를 구원자처럼 기억하려는 착각의 크기와 동일하다.
곧, 자기를 위협했던 부모를 자기의 구원자로 생각하는 만큼, 사람들을 위협하는 자기를 사람들의 구원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 구루 자신의 몸은 안다.
적지 않은 수의 사이비교주들의 몸이 거대해지는 이유는 단지 잘 먹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몸의 크기는 힘에 대한 추구의 크기에 비례한다. 실증적으로도 자기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운동을 해서 몸을 키우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힘이 없다고 생각하여 힘을 추구하고 있는 이는 그만큼 두려움을 많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의 부피는 두려움에 대응하기 위한 갑옷의 두께와 같다.
심리상담의 활동에서 다루는 과식증 및 폭식증 또한 개인이 가진 생존에 대한 두려움,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아주 밀접한 유관성을 갖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미디어 구루는 왜 계속 두려워하는 것일까?
아주 단순하다.
그가 사람들을 희롱해 그의 적에게 대신 화를 내며 싸우게 하는 그 현실 속에서, 실제적으로 사람들은 미디어 구루를 향해 화를 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디어 구루 자신의 몸이 이미 알듯이, 사람들의 몸 또한 이미 안다.
몸이 안다는 것은 마음이 안다는 것이다.
속일 수가 없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정말로 두렵게 위협하는, 그럼으로써 자신들을 정말로 화나게 만드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이것은 미디어 구루에게 비호의적인 그의 반대세력들에 대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미디어 구루에게 영웅의 성은을 입은 그의 신도들일수록, 진심으로 미디어 구루에게 화가 나있다.
미디어 구루 자신이 그의 부모에게 화가 났던 것과 동일한 크기로, 아주 웅장하게 화가 나있다.
존재가 희롱당했는데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미디어 구루 자신을 향해 겨냥되어 있는 성난 화살의 갯수가 이미 직감되기에, 미디어 구루의 몸은 스스로를 더욱 크게 키워 자기를 보호하려는 유기체적 본능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 구루에게 예비되어 있는 이 최후의 지옥은 결코 미디어 구루가 상정하고 있는 악마가 마련한 것이 아니다.
미디어 구루 자신이 창조한 지옥이다.
미디어 구루가 이미 부모를 떠났음에도 계속 두려움을 경험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두려움의 현실을 자발적으로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미디어 구루 자신이 사람들을 희롱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희롱당할까봐 두려워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사람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죽을까봐 두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가공의 악마를 만들어내고, 이에 대적할 가공의 영웅을 함께 만들어냄으로써, 그 둘을 싸움붙이고 있는 동안 자기는 안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사람들은 악마와 싸우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만 악마가 없는 현실을 바란다.
음모론으로 가공되지 않은, 원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란다.
애초 악마가 없는 현실 속에 악마를 창조해낸 미디어 구루가 그래서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존재다.
이것은 마치 거짓말쟁이 소년의 이야기와 같다.
미디어 구루가 사람들의 인정욕을 효과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미디어 구루 자신이 누구보다 인정욕이 많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기를 지혜로운 현자로 보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디어 구루는 악마를 창조한다. 판타지소설 작가가 된다.
"우리의 아이들을 위협하는 악마가 또 나타났어요. 여러분이 정의의 영웅이 되어주세요. 제가 뒤에서 미디어의 마법으로 버프를 걸어 드릴게요."
이렇게 외치고 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며 자기를 대단한 존재로 인정해주는 것처럼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상의 용사게임에 취해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느끼며 행복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자신의 부모가 자기를 인정해줄 것 같기 때문이다.
자기를 가장 위협하던 부모에게서 가장 인정받고 싶었던 이 애달픔이 미디어 구루의 가장 깊은 핵심에 위치해있는 것이다.
그토록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해침받지 않고, 위협받지 않는, 안전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악마나 영웅이 아닌, 제발 그냥 내 자신으로 봐주세요."라는 온전한 존재의 외침 그대로 사랑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미디어 구루의 인정욕은, 그의 존재가 가장 희롱받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해야 할 일도 단 하나뿐이다.
사람들을 희롱하는 일을 멈추는 것, 바로 여기에 미디어 구루 자신의 구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