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사이비교주가 된 유교 구루들

"마음의 시대와 깨달음의 세대를 억압하는 것"

by 깨닫는마음씨




온라인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사이비의 의미가 묘사된다.


"사이비(似而非)는 공자의 말에서 유래했다. 만장이 그의 스승 맹자에게 물었다. 「온 고을이 다 그를 향원(鄕原: 점잖은 사람)이라고 하면 어디를 가나 향원일 터인데 공자께서 덕(德)의 도적이라고 하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비난을 하려 해도 비난할 것이 없고 공격을 하려 해도 공격할 것이 없다. 시대의 흐름에 함께 휩쓸리며 더러운 세상과 호흡을 같이 하여 그의 태도는 충실하고 신의가 있는 것 같으며 그의 행동은 청렴하고 결백한 것 같다. 모든 사람들도 그를 좋아하고 그 자신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는 함께 참다운 성현의 길로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덕의 도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꼬집어 비난할 구석이 없으며 언뜻 보기에는 청렴결백한 군자와 같으나, 실인즉 오직 세속에 빌붙어서 사람들을 감복케 하고, 칭찬을 받으며, 자신도 만족한 삶을 누리는 것뿐 결코 성인(聖人)의 도를 행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사이비는 진짜가 아니면서 그런 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자의 정의에 따라, 유교는 정확하게 깨달음에 대해 사이비가 된다.


선비는 자기가 하늘의 섭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하며, 또는 적어도 하늘의 섭리와 일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까닭에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자기의 노력을 통한 권위를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하늘의 섭리를 가르치려는 유교의 구루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선비라고 하는 유교 구루들은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보급하는 스승을 꿈꾸는 이들인 셈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이비가 된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현상과 그 의미에 대해 이들은 근본부터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 구루들은 학문을 통해, 즉 글공부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그렇게 자기의 노력으로 가장 이상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이것은 이미 깨달음이 일어날 수 없는 조건을 3가지나 만족한다.


첫째로, 깨달음은 학문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선(禪)의 4대 기제가 굳이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통해 깨달을 수 없다), 교외별전(敎外別傳: 경전을 통해 깨달을 수 없다), 직지인심(直指人心: 직접 마음과 만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 견성성불(見性成佛: 점진적인 노력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인 것이 아니다.


둘째로, 깨달음은 자기의 노력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깨달음은 노력에 비례해서 이루어지는 자력구원의 기제가 아니다. 혼자서 열심히 노력한다면 문화적으로 구성된 특정한 종교체험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깨달음인 것은 아니다.


셋째로, 깨달음은 이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소위, 유교에서 성인군자의 모델로 곧잘 묘사되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잘 인내하며, 얼굴에는 늘 온후한 표정을 띠고 있는 후덕한 호인과 같은 인물상은 깨달음과는 절대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저 유교적 이상형일 뿐이다.


여기에서 특히나 세 번째의 착각이 생겨난 이유는, 프로이트만큼이나 유교 또한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며 통제의 기제를 발달시킨 것이며, 그 결과 깨달을 수 없는 지평으로 스스로를 내몬 것이다. 마음을 다스리면, 마음의 자유로만 가능한 깨달음은 성립조차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이 3가지의 착각은 결국 자아의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는 강력한 자아팽창의 논리다.


지식적 앎과, 자구적 노력과, 부동적 실체를 꿈꾸는, 삶이 지극히 두렵고 두렵기만 한 자아가 신봉하는 통제의 논리다.


그래서 유교 구루들은 늘 화가 나있다.


두려움으로부터 자기를 방비하기 위해 풍선처럼 스스로를 부풀린 자아팽창 속에서 화가 가득 나있다. 풍선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분명하게 분노의 대기다.


겉으로는 온후한 척하는 유교 구루들의 모습은 사실 억압이다.


그렇게 억압하면 억압하는 만큼, 이들의 주변에는 더욱 화가 만연하게 된다.


자기 대신에 다른 이들을 화나게 하는 감정의 쓰레기 투기와 같은 일이다.


이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대부분 이 유교 구루의 제자들이다.


아버지 컴플렉스가 있는 이들이, 유교 구루들에게 진정한 아버지를 투사하여 이들의 제자가 된다. 그렇게 제자가 되어 이들과 근접거리에서 접촉함으로써, 이들이 억압하고 있는 커다란 화를 전달받아 대신 화를 내게 된다.


이처럼 실제로는 자기가 스승으로 모시는 그 유교 구루의 화가 자기에게 전이된 것이나, 겉으로 보이기에는 앞에 있는 유교 구루의 물리적 외모가 온후해보이기에, 이 제자들은 자기가 화난 이유가 유교 구루에게 배운대로 잘못된 세상 때문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렇게 유교 구루들로부터 시작된 화는, 그 제자들을 통해 다시금 세상으로 넓게 뿌려진다.


그리고 이제 유교 구루들과, 그 제자로서 이 구루의 세력에 합류하게 된 이들은 교묘한 술책을 펼치게 된다.


자기들이 뿌려놓은 화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자기들이 구원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원래 없던 병을 전염병처럼 퍼트린 뒤, 자기들이 그 병에 대한 유일한 의사인 척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유교 구루들이 사람들의 스승인 것처럼 권위를 얻는 방식이다.


유교 구루들은 구원자 컴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다.


강하고 듬직한 아버지를 꿈꾸던 피구원자의 입장을 과거의 자기들이 고통스럽게 경험해 생긴 아버지 컴플렉스가, 이제는 이들 자신이 사람들을 불쌍한 어린 양과 같은 어린 시절의 자기처럼 보며 구원하려고 하는 구원자 컴플렉스로 발전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고통을 예찬한다. 고통을 인내하고 극기하는 것이 깨달음이고 인간의 완성이라고 말한다. 철저한 가학주의자들이다.


나아가서는, 그 고통을 끝없이 창조하는 자신의 모습을 동시에 고통에 대한 구원자로서 존립시킨다.


한쪽에서는 뺨을 때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약을 발라주는 이 행태는 정확하게 야쿠자가 정부를 조교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폭력의 구조다. 가학 중에 가장 비극적인 가학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폭력을 당하는 자는, 자기를 폭행하는 그 주체를 신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의 깨달음은 이러한 고통의 구조를 즉각적으로 해체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고통의 극기가 아니라, 고통의 포기다.


고통을 극기함으로써 대단한 존재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존재가 되기 위해 고통받으려는 의도를 포기하는 것이다.


극기를 통해 자기를 완성하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자아다.


그러한 자아의 의도가 실은 자아가 극기하고자 하는 그 모든 고통을 낳은 시발점이다.


그래서 이것은 자기를 위해 자기가 만든 고통의 소재를, 모두를 위해 자기가 극복하겠다고 하는 자아의 기만적인 쇼다.


이 고통받는 구원자의 기만적인 쇼를 포기하는 것이 바로 자아의 포기다.


고통의 포기는 곧 자아의 포기다.


그래서 자기가 창조한 고통에의 의도를 포기하면 바로 깨닫게 된다.


그러나 고통도 쾌락인 까닭에, 특히나 그것이 자기성장이나 인격도야라는 달콤한 이름으로 포장될 수 있는 쾌락인 까닭에, 유교 구루들은 쉽사리 이 고통에의 의도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유교 구루들에 의해 사람들은 늘 맞고 있는 상태가 된다.


이들은 '맞음(right)'을 주장함으로써, 사람들의 '맞음(attacked)'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유교 구루들이 사람들을 폭행하기 위해 애용하는 빠따의 이름은 도덕이다.


거기에 도덕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그것이 올바른 것인 줄로만 알고, 얻어 맞아서 아프면서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일이 폭력이라고 말하지 못한 채 인지부조화에 빠져 어리둥절한 상태가 된다. 그 어리둥절한 상태로 계속 얻어 맞게 된다.


이것이 늘 아프고, 늘 화가 나있는 것 같은 오늘날의 우리의 상태다.


감수성이 살아있는 젊은이들은 이 폭행이 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자각한다.


그래서 화를 내며 통증을 호소한다.


자기만 괜히 예민하게 이상한 사람인가 싶으면서도, 이 실제적인 고통을 억압하기에 이들의 감수성은 너무나 생생하다.


이 감수성은 분명하게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다.


유교 구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둔감한 감수성으로 자기폐색되어 고통을 잘 참을 줄 아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이 아니라, 실제의 깨달음이 알리는 것처럼 섬세한 감수성으로 개방되어 고통을 잘 느낄 줄 아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이다.


그러니 이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확신해도 된다.


분명히 맞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기들의 이상적인 고통의 왕국을 만들기 위한 명분으로 유교 구루들에게 명백히 폭행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깨어있는 선비 행세를 하는 정치인들, 연출가들, 선동가들, 연예인들, 작가들에 의해 정말로 얻어 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하는 것, 폭력을 폭력이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자유며, 이것이 깨달음이다.


내 생명을 무엇보다 고귀하게 여기는 것, 이것이 깨달음이다.


유교 구루들은 이렇게도 말하곤 한다.


"깨달음은 관계다."

"깨달음은 더 진보된 구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깨달음은 더불어 사는 성인군자가 되는 것이다."


전부 다 자신을 억누르고 집단의 대의를 위해서 사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야기들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깨닫는 체험을 한 이들이 들으면 "아, 모르는구나."라고 할 이야기들이다.


모르는데 아는 척하며, 즉 깨닫지 못했는데 깨달은 척하며, 깨달음을 자기들의 좁은 틀 속에 넣어 규정하려는 이들이 바로 유교 구루들이다.


이들이 특히 깨달음을 이렇게 환원시키려는 이유는 깨달음에 대한 열등감이 있는 까닭이다.


유교 구루들은 깨달음을 가장 높이 있는 완성된 인간의 모습인 것처럼 자기들이 규정해놓고 이를 신격화하고 있기에,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열등감으로 인해 늘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있는 이들이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상정한 가장 위대한 아버지의 모습과 닮지 못했다고 자기를 증오하는 모습과 같다.


그래서 이들의 핵심적인 본질은 분명하게 아버지 컴플렉스다.


유태교와 같으며, 기독교의 구약정신과 같다. 그래서 한국에 기독교가 보다 수월하게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유교 구루들의 아버지 컴플렉스가 구약의 가부장적 민족주의의 구조와 공명되기 좋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진정한 아버지 및 진정한 구원자가 되는 것과 단 1도 상관이 없다.


태양을 본 적이 없다면 그냥 못봤다고 말하면 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태양을 자기가 꿈꾸던, 자기를 지켜줄 수 있는 강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일은 거짓말이다.


나아가 그러한 자기 꿈속의 아버지의 모습을 저 하늘에 떠있는 태양처럼 모두가 우러러보며 존경해야 한다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도리라고 말하는 일은 지독한 전체주의의 폭력이기까지 하다.


태양은 만인을 비추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태양을 닮아 우리 모두가 만인을 비추어야 한다는 구원자 컴플렉스를 당위적 규범처럼 내세워, 그 유아적인 도덕의 잣대로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은, 진실로 자기가 쓴 소설을 진리로 삼아 세상이 그 소설대로 되어야 한다며 고집부리는 생떼에 불과하다.


이 생떼는 분명 이 유교 구루들이 유아적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이들이 이상적인 아버지와 같은 모델을 설정해 그것을 우상화하려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고 싶어서다.


아버지를 신격화함에 따라 계보적으로 그의 아들인 자기 또한 신성한 왕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왕자가 되고 싶어하는 미숙한 아이의 상태가 유교 구루들의 상태다.


자신은 무슨무슨 혈통이라는 식으로, 핏줄에 의존하지 않고는 자기를 존귀하게 경험하지 못하는, 실상 자존감이 바닥에 가까운 아이의 상태가 바로 이들의 상태다.


이와 같이 자존감이 낮기에, 이 유교 구루들은 대단히 고집이 세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원래 반비례하는 까닭이다.


유교 구루들이 대쪽같이 보이는 이유는, 결코 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쉬이 무너질 것 같기에 이를 악물며 고집으로만 버텨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내라는 이름의 고집은 사실 미덕이 아니라, 단지 심리적 취약성의 증거일 뿐이다.


이 취약성으로 말미암아, 결국 유교 구루들의 고집은 자기가 어른인 척 보이기 위해 작동하는 고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기의 유치하고 미숙한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 과잉된 형태로 어른 행세를 한다.


고답적인 말투와 한껏 격을 갖춘 예의의 형식을 통해, 더 쉽게 표현하자면, 진중하면서 가끔 고풍스럽게 시조도 읊고 하는 무협지 같은 모양새를 통해, 자기들의 본질인 아동의 모습을 숨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 은폐의 의도로 인해 출현하는 것이 물론 내로남불의 현상이다.


이들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용어를 남용하는 이유 또한 이 은폐의 의도 때문이다. 자신이 성숙하고 완성된 인간인 척하려는 의도로 이 유교 구루들은 깨달음을 남용한다. 실제 그 현상과 의미로서가 아니라, 고작해야 '책과 인간관계를 통해 새로운 지식의 통찰을 얻는다.'라는 앎의 의미로 깨달음을 환원시킨다.


이처럼 깨달음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을, 나아가 깨닫는 일을 가장 억압하는 것을, 이들은 자꾸만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전술했듯이, 이는 다시 한 번 유교 구루들이 깨달음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환원시켜 남용함으로써, 깨달음을 하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기의 열등감을 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 깨달음보다 더 높이 있는 주체인 것처럼 행세하고 싶은 것이다.


여우가 바라보는 신포도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유교 구루들은 이 깨닫지 못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더 진정한 구원자인 스승처럼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게 된다.


아들러의 말처럼, 이것은 열등감으로 인해 생겨난 병적 우월감이다.


이들의 근본적인 착각, 즉 책을 읽고 위대한 스승의 말씀을 듣는 학문의 수양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자아의 착각이, 결국 자기들이 아직 학문적으로 탁월하지 못해서 깨닫지 못했다는 자기평가에 의한 열등감으로 이어지며, 이제 그 열등감을 보상하고자 오히려 사람들을 무지렁이로 보며 그들을 계도하고 계몽하고자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는 이 유교 구루들의 오만한 의도의 손쉬운 타겟이 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시대의 선비가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스마트폰에 대해 가르치려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또는 지동설이 이미 상식으로 자리잡은 시대에 젊은이들을 상석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천동설을 가르치려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이처럼 유교 구루들의 이 시대착오적인 행각은 지금의 시대에 만연하다.


그런데 이는 이 유교 구루들이 사실은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직감하기 때문이다.


비단 유교 구루들뿐이 아니다.


지금이 마음의 시대며, 곧 깨달음의 시대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직감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의 시대에서 자신의 전성기를 살아가는 주역인 젊은 세대는 분명 깨달음의 세대다.


자기들이 아무리 고통을 극기해도 얻지 못한 깨달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접촉해 살고 있는 것 같은 이 깨달음의 세대가 유교 구루들은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깨달음을 부정하고 또 억압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온갖 기만으로 깨달음을 굴절시키고, 자신들의 유학적 구조로 깨달음을 둔갑시키며, 때에 따라서는 깨달음을 웃음거리로 만들며, 이처럼 모든 방안을 동원해 깨달음이 인간에게 전면화되는 일을 막고 싶은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이 원래 아무 노력없이도 마음대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봉쇄하고 싶은 것이다.


조국을 위해 피땀을 흘린 자만이 그 정당한 댓가로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는, 그 자신이 억압되어 자란 아이의 비틀린 주장을 진리의 기득권으로 유지하기 위해, 더욱더 젊은 세대를 못살게 구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마음과 깨달음이 드러나있는 이 시대에, 이 유교 구루들은 시대에 대해 점점 더 사이비가 되어가는 것이다.


마음에 대한 사이비는 반드시 마음을 통제하려고 한다. 자유롭도록 주어진 마음을 조종하려고 한다.


더욱 교묘하게는, 든든한 신적 부모와 같은 시선의 주체로 자기들을 상정함으로써, 그 돌봄의 시선 속에서만 마음이 안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사이비교주의 출현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독재다.


독재는 자유의 정확한 반대어다.


자유는 스스로 자유롭기에 자유다.


부모, 왕, 선비, 신, 민족, 국가 등과 같이, 사이비교주로 성립될 수 있는 그 모든 위대한 대상에 의존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자유라면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노예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한 상태는 자기가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자발적인 노예의 상태다.


사람들을 이 노예의 착각에 빠지게 함으로써, 사이비교주로서 마음을 통제하려는 유교 구루들의 기획은 완성된다. 그렇게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자기들만이 가장 고귀한 자리에 오르게 된다. 허허허, 아빠미소를 띄우며 황희처럼 초연한 척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아가 가장 신격화된 상태다. 자아팽창이며 나아가 자아폭발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절대적인 오만의 상태다.


정말로 자기를 신처럼 생각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이 사이비교주의 상태는 가장 깨달음을 억압하는 상태며, 때문에 가장 깨달을 수 없는 상태다.


깨달음은 유교 구루들이 착각하듯이, 인간이 신[하늘]을 점차 닮아가 신이 되는 상태가 아닌 까닭이다.


깨달음은 오히려 인간으로부터 신을 잘라낸 상태다.


신이라는 허구의 환상을 깬 상태다.


자기 부모를 투사한 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유아적인 아이의 꿈이었는지를 발견하며, 미소로 그것을 떠나보내는 상태다.


그래서 깨달은 이는 구원자가 되려 하거나, 더 좋은 부모가 되려 하거나, 신이 되려 하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저 위대한 신적 이상에 가까워지려는 일은 깨달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가 걸음마를 하며 아빠를 닮아가려는, 표현 그대로 아이의 일이다.


그렇게 실제로는 아이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 자기는 어른인 척 행세하는 이중적인 쇼를 펼치는 일이 바로 유교 구루들의 일이다.


"내가 바뀌어야 한다."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상습적으로 하는 이는 이 모든 것의 부족함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시각에서 이 모든 것은 온전하지 않다.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온전하지 않다.


때문에 늘 반성하고, 자책하고, 성찰하며, 자기 자신을 더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시켜야 한다.


동시에 사람들을 늘 반성시키고, 자책시키고, 성찰시켜야 한다.


그렇게 자기는 가장 높은 심판자가 되어 사람들을 정죄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그 결핍감으로 인한 죄책감을 사람들에게 떠넘기려고 한다.


"내가 아니라 니가 잘못했잖아. 너 우리 아빠 대따 무서운데 인제 죽었다. 우리 아빠가 빠따 들고 너 혼내주러 올 거야. 너 똑바로 안 살았지? 우리 아빠한테 오늘 3000만큼 혼나봐라."


이러한 철없는 아이의 꿈에서 깨는 것이 깨달음이다.


위대한 누군가의 말씀에 따른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아도, 또 위대한 누군가와 같은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자기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실감하는 것이 또한 깨달음이다.


자기들이 구원자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심판자가 되어 있는 유교 구루들은 이 깨달음의 반대편에서, 늘 더 이상적인 인간상과 자기를 비교해가며 그 기준에 따라 화를 낸다. 사람들에게도 화를 낸다. 모두가 위대한 누군가의 기준에 따라 살아야만 이 세상이 똑바로 될 수 있다고 외친다.


그렇게 유교 구루들은 자신에게 기준을 제공해줄 위대한 누군가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다.


본질적으로, 부모의 품을 떠나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러한 아이들이다.


그러니 유교 구루들은 사실 그 정직한 소망에 따라, 유아용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들어가, 젖병을 안고, 응애응애 소리를 내는 편이 차라리 낫다. 광장에서, 방송에서, 책 속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진정한 스승인 것처럼 힘쓸 시간에, 이케아로 유아용 침대를 사러가는 일이 진실로 낫다.


이것은 빈정거리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이들에게 핵심적인 이 마음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실현될 때, 그때 이들은 깨달음의 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 조선시대의 후예들이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 현대인들을 자기가 계도하고 계몽해야 할 미숙한 제자로 봐야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만 그렇게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르는 미숙한 아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 이들은 정말로 깨달을 수 있다.


지적으로 통찰한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적 현상으로서의 진짜 깨달음을 영접할 수 있다.


그 순간 이들은 이 시대가 진정 마음의 시대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가 진정 깨달음의 세대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더는 자신들이 사이비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음을 같이 이해할 것이다.


진짜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이루어진 까닭이다.


진짜를 얻었으니 진짜인 척하던 고된 노력을 이제 그만해도 된다.


정말로 단 하나, 진짜를 모른다고만 하면 되는 일이다.


거기에서 마음의 자유는 시작된다.


자유로워진 마음은 그 마음을 살아가는 이를 자연스럽게 깨달음으로 안내한다.


그 또한 깨달음의 세대가 된다.


너무나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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