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욕망을 악마화시키는 집단주의의 억압을 벗어나"
『아웃사이더』, 『종교와 반항인』과 같은 문화종교학적 명저를 집필한 콜린 윌슨은 실존이라고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상태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종교적 경지와 직결된다고 말하면서, 그 실존이 몰락하게 된 최후의 형태가 바로 정치라고 지적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생존을 조력하기 위한 기능적 장치로서의 정치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세력확대를 위한 공학적 구조의 게임으로 바뀐 정치에 대한 이야기다.
오늘날의 정치는 게임이다. 어떤 게임일까?
'우리 편 만들기'의 게임이다.
가상의 적을 만들어놓고, 그 적에 대항할 수 있는 우리 편의 군세가 얼마나 모아질 수 있는지를 겨루는 게임이다. 유튜브 채널에서 구독자 늘리기를 경쟁하는 모습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때문에 이러한 게임의 논리 속에서 사실 실제적인 생존의 조력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실제적인 생존의 문제보다 더욱 우리 편이 모일 수 있는 유용한 미끼를 구성하는 문제가 중요해진다.
무엇이 되었든 아군의 세력만 양적으로 더욱 강대해지면 된다. 그러면 역으로 생존이 담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패싸움의 논리처럼, 양적으로 거대해진 집단이 될수록 그 안에서 생존은 더욱 보장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게임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집단주의로 귀결된다.
집단주의가 가장 희생시키고 싶어하는 것은 개인이다.
그러나 개인이 희생된다는 것은 바로 인간이 희생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반드시 개인으로서만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존의 의미다.
이를테면 "사람이 먼저다."와 같은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말이 "개인이 먼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반대로 개인이 집단을 위해 희생되어야 인간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즉 집단을 위해 희생하는 개인의 모습을 인간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그러한 말은 그저 아름답게 포장된 폭력일 뿐이다.
인간은 곤충이 아니다.
곤충이 이루는 군집의 구조가 마치 인간의 본래적인 속성인 것처럼 간주하며, 집단이 있어야 개인이 있을 수 있다는 논리를 통해 개인이 자기보다 더 귀한 집단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일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모습은, 인간에 대해 철저하게 착각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은 바로 자기의 욕망으로 산다는 점이다.
이것을, 개인은 자기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마음은 욕망이다.
몸의 필요가 충족되지 않을 때, 그것은 마음의 욕망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욕망은 언제나 욕망이 출현한 그 원점을 돌아보게 하는 작용을 갖는다. 그렇게 욕망은 개인이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즉, 욕망은 개인을 비로소 개인으로 존재하게 하는 기제인 것이다.
물론 집단도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집단은 구조이기에 그 중심이 없다. 즉, 돌아볼 수 있는 원점이 없다. 발견되는 것이 없다. 그저 겉으로만 활력있는 공허한 구조일 뿐이다.
때문에 집단의 욕망은 결코 개인의 욕망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막연하게 관습적으로 늘 그래왔으니까 어떠한 집단이 짜장면을 먹고 싶어하는 일이, 개인이 절실하게 지금 짬뽕을 먹고 싶어하는 일보다 우선될 수 없다.
이를 정치적 용어로 표현해보자면, 집단의 욕망에 따라 다같이 짜장면을 먹으면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개인의 욕망에 따라 혼자 짬뽕을 먹으면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같이 올바른 진리의 짜장면을 먹어야 한다고, 짬뽕을 먹는 이탈자가 생기면 우리 집단의 세력이 약해지기에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일이 바로 전체주의다.
그렇다면 알 수 있다.
혼자서 짬뽕을 먹더라도, 안심할 수 있으며, 누군가로부터 공격받지 않을 수 있는 현실이 바로 민주주의의 현실이다.
즉, 개인의 욕망이 존중되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세력들은 대체로 이 개인의 욕망을 하대하고 무시한다. 개인의 욕망보다 더 신성한 대의가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개인의 욕망을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과자 사달라고 떼쓰는 이기적인 욕구 정도로 취급하며, 때문에 이 철부지들을 잘 달래고 계몽시켜 이들이 장차 더 거룩하고 숭고한 대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진정한 어른이 되게 하는 일을 자기들의 정치적 사명쯤으로 여긴다.
이것은 진실로 희극이다.
그 자신이 가장 어린아이 같은 이들이 근엄하고 진중한 어른 흉내를 내며, 발달심리학적 차원에서 사실 자기보다 더 발달된 이들에게 성장해야 한다고 훈계를 하는 모습과 같은 희극이다.
실존한다는 것은 개인으로 산다는 것이며, 곧 집단주의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집단의 욕망을, 곧 집단주의를 벗어나는 만큼 인간은 성숙해진다.
성숙하다는 것은 무르익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르익는다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욕망이 무르익는다는 것이다.
더 쉽게도 말할 수 있다.
우리를 정말로 가슴뛰게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이러하다.
"내 자신으로 살고 싶다."
우리는 나라고 하는 것을 진실로 욕망한다. 나라고 하는 것은 궁극의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우리가 가장 무르익어 성장한 형태가 바로 이 나라고 하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은 곧 가장 성숙한 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이처럼 개인의 욕망은 가장 성숙한 인간을 이루는 정도 중의 정도다.
그렇다면 이 개인의 욕망을 무시하며, 그 대신에 집단의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 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대체 어떠한 이들일까?
정확하게 이들이 바로 어린아이들이다.
억압된 아이들이다.
자신의 욕망이 억압된 아이들은, 다른 이들의 욕망을 똑같이 억압하려고 하게 된다.
그렇게 모두가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고 집단의 욕망을 추구해야 한다며 핏대를 세우게 된다.
한국의 문화적 문법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두 원리, 유교와 샤머니즘은 모두 다 이 욕망 억압의 전통들이다. 개인의 욕망 대신에 집단의 욕망을 내세우는 전통들이다. 아빠의 유교와 엄마의 샤머니즘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개인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면 안 되고 늘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하던 부모의 목소리가 담고 있는 그 집단정신이다.
이 집단주의의 정신을 세습받아, 자기가 어른인 줄 아는 어린아이들이 늘 주장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욕망대로 살게 되면 세상이 지옥이 된다는 것이다. 유교와 샤머니즘을 대변하는 자기 부모에게 그렇게 듣고 자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이 억압된 아이들만이 갖게 된 환상이다.
모든 것은 억압되면 과잉된다.
이 아이들에게 자신의 욕망이 억압되었기에, 그 욕망은 과잉된 형태로 이들에게 경험되는 것이다.
즉, 억압한 만큼 거세게 이들의 안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이, 이들 밖으로 나가면 세상을 지옥으로 바꾸기라도 할 것처럼 이들에게는 악마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욕망에는 끝이 있다. 욕망에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것이 억압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억압된 반동으로 거칠게 튕겨 나가는 용수철과 같은 움직임이 끝없이 일어나는 이유는 계속 억압하기 때문이다. 용수철을 계속 누르기 때문이다. 즉, 끝없이 억압하기에 끝없이 욕망하는 것 같은 구조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억압의 아이들 자신이 바로 자기의 욕망을 억압함으로써, 욕망을 마치 거칠고 위험한 야생동물처럼 만든 장본인들이다.
그렇게 자기가 나쁜 악마처럼 만들어놓고, 그것을 나쁜 악마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억압의 아이들이 하는 치사한 일이다.
한국의 위인전은 이 억압을 좋은 일로서 끊임없이 묘사한다. 개인의 욕망을 잘 억압하고, 집단의 욕망에 헌신하며 산 이들을 우리는 위인이라고 부른다. 과거나,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존경하는 이들을 살펴보면 다 이 억압의 달인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존경하지 않으나, 실제로는 대단히 멋있게 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억압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 자신을 억압하지 않는 만큼, 이들은 다른 이들도 억압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과 타인을 억압하는 데 힘을 쓰지 않으니, 이들에게는 힘이 넘쳐난다. 그래서 그 힘으로 아주 멋진 일들을 해낸다. 인류사에서 인간을 풍요롭게 해준 그 모든 것은, 이 멋진 이들이 그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음으로써 실현될 수 있었던 것들이다.
남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이로 사는가, 스스로 아주 멋진 이로 사는가, 이것이 실존의 물음이며 선택이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남들 앞에 그럴듯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는 아이들은, 그렇게 개인으로 무르익지 못했기에 늘 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가득하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중심으로 서지 못했기에 늘 만사가 두렵다. 나아가 늘 억압하기 위해 힘을 써야 하기에 가용할 힘도 없어진다.
두려운데다가 힘이 없기까지 한 이 상태가 결국 정치라는 게임에 빠지는 이유가 된다.
우리 편을 많이 모아서, 두렵고 무력한 자신의 생존을 집단 속에 위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반대로, 개인으로서 자기 욕망을 통해 무르익어간 멋진 이들은 힘이 있기에, 집단에 자기 자신을 위탁할 이유가 없다. 집단주의의 게임을 유지하는 데 힘을 쓰느니, 그 여력으로 자신의 인생을 더욱 꽃피운다. 그리고 그렇게 꽃피운 자신의 인생의 결과는 그대로 인류를 위해서도 유용한 자산이 된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
개인으로 사는 일이 곧 인간 모두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반면, 땅따먹기와 같은 집단주의의 게임 속에 빠져 있는 일은, 자신의 힘도 억압하고 타인의 힘도 억압함으로써, 인간 모두에게 있어 가장 무기력한 결과를 창출한다.
억압의 아이들이 착각하듯이, 가장 개인의 욕망으로 살고자 하는 일이 이기적인 것이며 독재를 낳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욕망으로 사는 이는 독재하려는 일에 아무 관심이 없다. 누군가를 통제하려고 하면 그 자신이 노예의 변증법에 빠지게 된다. 시간 낭비며, 에너지 낭비다. 이 한 번뿐인 인생은 그렇게 낭비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개인의 욕망으로 사는 이는 독재의 정반대편을 힘차게 달려간다.
독재는 억압의 아이들만이 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금지한 것을 남에게도 금지하는 것, 그리고 그 금지 속에서 자기가 했던 방식을 남에게도 종용하는 것, 이것이 독재다. 나아가 타자를 향한 폭력이다.
이를테면, 과거 학생운동을 하던 이들이 공익적인 대의를 내세운 활동의 이면에서는 그 개인을 위한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향락을 실제적으로 얻었으면서, 마치 자신들은 개인이 아닌 집단의 대의만을 위해 활동한 금욕적 도덕주의자인 것처럼 스스로를 내세움으로써, 젊은 세대가 향락을 얻으려는 모습을 한심하게 여기며 자기와 똑같은 대의의 도덕주의자로 살 것을 종용하는 모습이 바로 그러한 모습이다.
이는 집단의 욕망을 신성한 의무로 먼저 실현해야 그 다음 개인의 욕망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집단주의의 전제를 강화하려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억압의 강화일 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개인의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못한다. 그래서 늘 공허하게 대의만을 부르짖으며, 그럴수록 스스로를 더욱 부족한 존재로 경험하게만 될 뿐이다. 독재의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억압 자체가 곧 독재다.
인성에 문제있는 나쁜 이들이 독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의 논리로 살아가는 이가 그대로 독재자다.
그리고 이 독재는 세습된다.
사회적으로는 하나의 집단주의적 세력에, 또 가정에서는 자기의 부모에게 억압된 아이들이, 그에 대항할 집단을 구성함으로써 그 집단의 힘을 통해 이제 자신들이 억압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억압하게 된다.
억압의 논리로 사는 억압된 아이들 자신이 바로 또 하나의 독재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개인이라는 실존의 의미를 망각함으로써 생겨난, 정치라는 집단주의의 게임 속에 빠져 있는 한, 이 억압의 역사는 반복된다.
그래서 실존의 종말은 정치며, 실존의 정말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실존을 깨닫는 일이다.
곧, 깨달음은 바로 나를 깨닫는 일이다.
인간이 개인임을, 바로 인간이 나임을 깨닫는 일이다.
집단을 자신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그 집단을 사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바로 나를 중요하게 여기며 그 나를 사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이 깨달아 사는 아주 멋진 이의 모습이다.
그런데 집단주의에 빠져 있는 억압의 아이들 중에서도 그 수장격에 속하는 더 억압된 아이들은 깨달음에 대해서도 정치논리를 펼치곤 한다.
"영성수준이 높을수록 진보적 정치 성향을 갖는다."
"깨달음은 이기적인 자기를 없애고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사는 것이다."
"올바른 정치를 위해 행동하는 깨달음만이 진짜 깨달음이다."
억압의 아이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깨달음마저도 억압하려고 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사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위처럼, 태양처럼, 들꽃처럼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바위는 진보적 정치 성향을 갖지 않으며, 태양은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하며 살지 않고, 들꽃은 정치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전혀 하지 않더라도, 바위가 바위인 것에, 태양이 태양인 것에, 들꽃이 들꽃인 것에 아무 손색이 없다. 그 모든 것을 전혀 하지 않더라도, 이것들은 절대적으로 온전하다.
실존은 온전하다.
정치와 절대적으로 무관하게, 실존은 절대적으로 온전하다.
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해도 된다.
깨달음은, 정치의 집단주의적 논리와 절대적으로 무관하게, 내가 존재하고 싶은 내 자신으로 존재하는 일이 가장 온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실존은 정말이다.
정말로 사는 일이다.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 정말로 살기 위한 실존의 발걸음은 붓다의 모습으로 이렇게 묘사된다.
"이 삼천대천세계에 오직 한 사람만이 존귀하게 걸으며 남에게서 배우지 않고 스스로 도를 증득하여 분명히 걸었다."(『불본행집경』 「향보리수품」)
여기에서 붓다가 증득한 '도'라고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며 욕망이다.
깨달음은 가장 큰 욕망이다. 스스로 걷고자 하는 가장 큰 욕망이다.
이 가장 큰 욕망은 결코 집단주의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집단주의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 나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
나로 살아가는 일은 나에게서만 배울 수 있다. 나를 향하고 있는 나의 욕망에서만 배울 수 있다.
억압은 나의 욕망을 흐리는 일이다.
욕망을 분명히 하면 나는 드러난다.
욕망을 분명히 하고 있는 지금 그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이 욕망이 악마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온전한 것으로 인간이 당당하게 누려도 되는 것임을 분명히 할 때, 나는 모든 것이 허락된 그 인간이 바로 나임을 발견한다.
분명하게 우뚝 서서, 분명하게 걸어 나간다.
정말로 멋진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