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의 심리학

"철이 들었다는 말은 잘 세뇌되었다는 뜻이다"

by 깨닫는마음씨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유교주의의 맥락에서, 철이 들었다는 것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좁은 관점에서 벗어나, 자기보다 더 중요한 국가와 민족 그리고 역사를 생각할 줄 아는 넓은 도량을 지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유교는 바로 이러한 상태가 성숙한 어른의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존심리학에서는 그 반대로 말할 수 있다.


유교적 방식으로 철이 들면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잘 억압된 아이가 된다.


억압의 결과는 굳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유교가 활용하는 도덕주의라는 콘크리트로 잘 굳어진 아이는 생동하는 유기체로서의 활력이 사라지고, 다만 뻣뻣한 자세로 남은 자신의 모습을 어른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신체검사를 받을 때 키를 커보이게 하려고 자기의 몸을 뻣뻣하게 세우며, 그렇게 뻣뻣하게 세워진 높이를 자기의 성숙도라고 생각하는 모습과 같다.


뻣뻣함은 억압이 낳은 경직의 상태다.


이 경직과 성숙을 연결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처럼 억압된 아이의 심리다. 성숙이라는 이름뿐인 보상이라도 챙기지 않으면, 삶의 활기찬 동세를 취하지 못하고 경직되게 사는 일이 억울해지기 때문이다.


철이 들었다는 말은, 몸 안에 철이 들어갔다는 말과 같다. 그것은 철심을 박아 존재가 뻣뻣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사실은 아이인데, 노년에 뼈가 약해져 이를 보완하기 위해 철심을 박은 노인처럼 되어버린 상태가 바로 이 철이 든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사실은 아이인데, 가장 어른인 것처럼 연기하며 경직된 이 상태를 우리는 꼰대라고 말한다.


그래서 꼰대를 대표하는 특성인 고집은 결코 자기 주장이 아니다. 그 고집은 남의 주장으로 세뇌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무심한 절대군주인 아빠와, 그 절대군주를 뒤에서 교묘하게 조종하는 절대신인 엄마로 구성되는 가부장제가 이 세뇌를 반복적으로 활성화한다.


세뇌는 피험자가 자발적으로 동의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 이 가부장제의 세뇌에 대한 꼰대의 동의를 이끌어낸 것은 바로 더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엄마의 강박적 신경증과, 그 신경증에 부응하기 위해 더 좋은 엄마가 존립될 수 있는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소진된 아빠의 무거운 표정이다.


엄마의 눈치를 보고 엄마의 기분을 맞춰주어야, 아빠도 이완되고 가족의 분위기도 평온해지기에, 그렇게 아이인 자기가 이 세상에서 안심하고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 같았기에, 아이는 엄마를 피곤하게 하지 않을 형식적인 어른의 모습을 엄마가 바라는대로 빨리 갖추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유교주의적 가부장제의 세뇌에 자발적으로 동의함으로써 꼰대로 새로이 태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가족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정체성으로 아이가 거듭나는 순간과도 같다.


꼰대는 그래서 가족과, 그 가족이 연장된 동지, 민족, 국가의 구원자를 노골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자처하게 된다.


때문에 입장의 역전이 일어난다.


엄마를 성가시게 하는 아이처럼 경험된 자기가 이제 철이 들어 꼰대로 거듭나게 됨으로써, 역으로 엄마가 성숙한 존재인 자기를 성가시게 하는 아이인 것처럼 그 입장이 바뀌게 된다.


꼰대 자신이 마치 엄마아빠의 부모와 같은 위격, 즉 조부모와 같은 노인의 위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구태한 노인의 모습이 된 꼰대는 이제 가족과 민족과 국가의 큰어른 행세를 하게 된다.


자기가 제일 높은 존재로서 훈장질을 하고, 밥숟가락의 숫자를 챙긴다. 가족과 민족과 국가의 관리자가 된다.


그렇게 관리가 자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었기에, 꼰대는 필연적으로 자유를 애증하게 된다.


특히나 자유로운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을 가족과 민족과 국가에 대한 의식이 부재한 채 그저 철없이 구는 한심한 존재로 여기며, 세상이 똑바로 되어야 한다는 분노와 함께 이 나라의 미래를 격하게 염려하는 웅장한 품세를 취한다.


이 꼰대의 분노는 배에서 나온다.


내장에서부터 솟구치는 분노다.


자유로운 아이들을 보면 내장이 뒤틀리기 때문이다.


질투가 나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도 사실 아이인데, 자기는 자유로운 아이를 누리지 못하고 가부장제 앞에 반납한 채 정신적으로 노화되어 버린 늙은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가 누리지 못한 그 자유를 질투하게 되는 것이다.


질투는 질투하는 상대처럼 되고 싶다는 의도를 알리는 마음이다.


자유로운 아이들은, 젊은 세대는, 그래서 꼰대가 숙청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또는 꼰대가 부모와 같은 입장이 되어 돌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실은 꼰대가 부러워서 닮고 싶어하는 대상이다.


꼰대도 내심 이러한 자기의 마음을 안다.


꼰대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아이들이 자기와 놀아주는 일이다.


자기도 젊은이로 알아봐주며, 젊은이들이 자기와 함께 놀아주는 일이다.


그런데 그 놀이가 쉽사리 성사되지 않는 이유는, 꼰대가 생각하는 놀이의 형식이 선비질인 까닭이다.


꼰대가 훈장처럼 앉아 젊은이들을 학동으로 보며, 민족과 국가의 사명에 대해 가르치는 일이 바로 꼰대가 유일하게 아는 놀이의 방식이다.


이 놀이를 하려고 이 시대의 꼰대들은 젊은이들을 못살게 굴며 여러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꼰대의 선비질을 잘 따라 논 젊은이들에게는 제약을 풀고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을 일부 허용하는 식으로 당근의 논리를 구성하려는 것이다.


나아가 꼰대는 일부러 밉보이려고 하기까지 한다. 젊은이들이 차라리 자기를 적으로 삼아주기를 위악적으로 바라기도 한다. 그렇게 자기를 적으로 상정하는 동안에는 젊은이들의 관심이 자기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차마 자기를 좋아해줄 수 없다면, 자기를 미워하는 형태로라도 자기의 옆에서 자기와 놀아달라고 하는 식이다.


이처럼 꼰대는 사실 극화된 연예인병에 걸려 있다. 자기를 정신적 차원에서의 GD라고 간주한다.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월드스타다.


연극적이며, 동시에 필사적이다.


그리고 그만큼 꼰대는 다시 한 번, 자기가 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낸다.


학예회에서 자기를 바라봐줄 우호적인 시선을 연극적이며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는 아이다.


이와 같이, 진실로 철이 없어서 아이가 아니라, 철이 있어서 더욱 아이다. 자기가 아이인 줄을 망각했기에, 끝없이 아이며, 영원히 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은 이 아이가 재미도 없는 아이라는 사실이다. 생동감도 없고, 매력도 없고, 놀 줄도 모르는 아이다.


기껏 논다고 해도 선비질이라는 자기 방식으로만 놀아야 한다고 고집부리는 아이다. 남들은 다 자기 밑이라며 남 가르치는 일만을 놀이라고 하고 있는 아이다.


그래서 아무도 같이 놀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다.


때문에 이러한 꼰대들은 자기와 비슷한 꼰대정신의 소유자들을 만나, 유튜브나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자기들만의 서당놀이극을 펼친다. 그중에서 제일 꼰대인 이가 교주와 같은 훈장님 역할을 맡아 그를 중심으로 다들 자기들이 얼마나 철든 어른이고 이 시대의 뜻있는 선비들인지를 주장하며 신나한다.


그렇게 자기들끼리 모여 자기들이 대단히 젊은 정신의 소유자인 것처럼 서로를 지지하는 또 하나의 세뇌를 이루어간다.


오래전 해병대를 전역한 할아버지들이 모여 아직도 자신들의 정신이 파릇하게 깨어있는 젊은이와 같음을, 껍데기볶음과 막걸리 한 사발의 의기로 펼쳐내는 컨테이너 가건물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본질적으로 같은 일이다.


이처럼 꼰대들이 함께 모이는 이유는 자기들의 젊음을, 자유로운 아이의 마음을, 좋은 시절을 아직 잃지 않은 것처럼 서로 증언해주기 위함이다.


그러니 이 꼰대들끼리는 동지애가 싹틀 수밖에 없다.


동지를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동지가 사라지면 자기가 젊다고 증언해줄 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동지가 없어지면 그만큼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하고 있는 집단세뇌의 기운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꼰대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커다란 대의를 수호하려는 목적으로 동지를 수호하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니다.


놀 사람이 없어지는 외로움을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 환상에 취해 자기를 잊을 수 있는 축제가 끝나게 되면 찾아올 맨 얼굴 그대로의 자기의 모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 이들은 동지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자각할 때, 꼰대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것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릴적 동무들과 뛰어놀던 동산에서 어느 날 자기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라져간 것들을 깊은 눈빛으로 자신의 따듯한 가슴에 담아 동산을 나서는 일이 바로 어른의 일이다.


즉,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을, 늘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철이 든다는 것은, 어떤 것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늘 그래야만 한다고, 강철로 만들어진 불변의 것을 공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철이 든 아이는 어른이 아니라 실은 가장 아이다.


꼰대는 가장 아이인 이들이다.


자기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에 대한 상실과 이별을 지금까지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이며, 자기는 철이 든 어른으로서 그 상실과 이별을 이미 극복한 척하기에 더욱더 애도가 힘들어진 이들이다.


아빠엄마가, 어린왕자가, 둘리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 그래서 마냥 현실을 잊고만 싶은, 그저 꿈속의 동산에 영원히 머물고만 싶은, 주름살 가득한 늙은 피터팬들이다.


가장 소중한 것의 상실이 도무지 애도되지 않아, 결국 애도가 된 척 자기를 세뇌해서 속이기 위해 자신에게 마취침을 놓으며, 광장과 스튜디오에서 마당놀이 한마당처럼 함께 모여 취한 눈으로 까르르 웃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가장 애달픈 아이들이다.


가장 깊은 가슴의 눈물을 숨기기 위해, 늘 똑같은 표정의 선비의 미소가 그려진 뻣뻣한 가면을 결코 벗으려 하지 않는, 세상에서 많이 외로운 아이들이다.


이것이 꼰대라고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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