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자격과 돈의 역학관계"
오늘날 스승 컴플렉스는 만연하다. 비단 정치적 현실에서만이 아니다. 유튜브와 개인미디어활동 등을 통해 저마다 다 스승으로 보이기를 꿈꾸는 일들이 이 시대에는 가득 일어나고 있다.
단지 기술적인 역량을 제공하는 전문가로서가 아니다. 사실은 그 기술적인 역량을 획득할 수 있었던 자기의 성공적인 인생경험을 근거로 삼아, 또는 실패했던 인생경험조차도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선 회복의 경험으로서 근거로 삼아, 그러한 자기를 스승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아주 쉽게, "나는 이러한 인생경험을 통해 너희가 존경할 만한 자격을 얻게 되었어."라는 인생경험의 보따리상인들이 대거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 인생경험이 스승의 자격이 될 수 있는 기준으로 채택되는 소재가 바로 돈이다.
아무리 대단한 경험인 것처럼 이야기해도, 그 발화의 주체에게 돈이 없다면 스승의 권위는 확보되지 않는다. 애초 자기의 인생경험을 사람들로 하여금 듣게 만들 계기조차 마련할 수 없다.
인생경험의 보따리상인들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이들의 모든 초점은 사실 이들이 표면적으로 이야기하는 참다운 도덕이나, 새로운 지식, 유용한 기술 등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 그 이면에는 전부 돈에 대한 지향성이 가장 핵심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데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돈은 바로 현대사회에서 힘과의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힘이 있는 주체여야만 사람들은 그 주체에게 자기의 인생을 위탁하며 스승으로 모시려 한다. 자기를 이끌어줄 힘도 없는데, 말만 잘났다고 주장하는 이를 사람들은 스승으로 보지 않는다.
두 번째로, 유교주의의 논리 속에서 돈은 도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유교의 다단계적 피라미드의 체계 속에서는, 가장 도덕적인 이들이 더욱 높은 지위 및 자원을 얻게 되는 일을 당위적인 것으로 상정하며, 때문에 돈이 많다는 것은 역으로 그가 도덕적이라는 사실을 잠정적으로 증거하게 된다. 그리고 분명하게 유교주의에서 도덕은 힘이다. 유교의 모든 담론투쟁은 곧 도덕투쟁이다.
결국 이 두 가지의 이유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힘, 도덕, 돈은 삼위일체가 된다.
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이를 바로 양반이라고 부른다.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하늘의 자식이자, 하늘의 대행자와 같은 위격이다.
곧, 이 힘, 도덕, 돈의 삼위일체의 확보가 바로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따를 스승의 자격이 된다.
그중에서 가장 집착되는 것이 결국 돈이다.
이는 분명 역설적인 상황이다. 도덕을 가장 중요시하는 유교주의의 풍토 속에서 돈에 가장 집착되는 이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는, 도덕 자체만으로는 변별이 어렵기 때문이다.
도덕은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담론이다. 그러나 돈은 실체다. 담론을 넘어 현실로 실현된 것이다.
때문에 도덕은 증명하기 어렵지만, 돈은 증명하기 쉽다. 그리고 유교주의의 구조 속에서 돈을 증명하면 도덕 또한 함께 증명된다고 가정된다. 이 효율좋은 방식을 포기할 수가 없다.
돈은 자신이 스승의 자격을 갖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식이다. 스승을 꿈꾸는 이에게는 무엇보다도 돈의 확보가 가장 시급한 주제다.
시류를 잘 타서 빠른 시기에 돈을 버는 데 성공한 졸부정신의 이들이, 결국에는 본인의 사업보다도 강연활동을 중시하며 사람들에게 스승연을 하게 되는 일은 이러한 기제에 기인한다.
여기에는 물론 커다란 착각이 깔려 있다.
그것은 유교 또한 전제하는, 정신과 물질 사이의 이원론적 우열에 대한 착각이다.
이 착각에 따르면, 정신은 물질보다 우선하며, 때문에 물질은 정신에 복속된다. 그렇기에 정신적으로 높아지면 물질도 그 뒤를 이어 높은 수준으로 따라와야만 한다. 그것이 이 이원론의 숭배자들이 생각하는 우주의 법칙이다. 결국 "더 우월한 정신의 힘으로 물질을 끌어온다."라는 시크릿과 같은 류의 착각이다.
이 착각이 쉽사리 깨지지 않는 이유는 뿌리깊기 때문이다.
대쪽같은 정신력을 강조하며, 그러한 정신의 힘을 가장 위대한 것처럼 선전해온 역사가 뜨겁고 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를 비웃을 일이 아니다. 정신력 하나로 모든 물질적인 현실을 뒤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 기제는 오히려 유교주의의 한국사회에서 더 크게 작용해왔다.
아무리 상대팀의 유려한 패스워크에 계속 농락당해 패배해도, 상대팀을 수비하다가 피가 터지면 단지 물질적인 신체조건만 좋을 뿐 본질적으로는 미개한 상대를 정신력으로 이긴 증거가 되는 이 정신승리의 역사는 지난하다. 아마도 한국축구 대표팀의 선수들은 자폭비행기에 억지로 타야 하는 파일럿의 심정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치킨과 맥주를 시켜놓고 주식이야기와 음담패설을 주고 받다가 캐스터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릴 때만 고개를 TV로 돌리며 전문적인 견해를 어필하는 선비들이 자주 주장하듯이, 정신력만 있으면 결코 똥볼을 차지 않는다. 모든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축구공은 반드시 상대 골문에 꽂힌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정신력은 도덕력이다. 내 한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겠다는 도덕력만 갖추면, 온 우주의 기운이 황금빛 에너지로 원기옥처럼 바로 이 공에 모임으로써 그 모든 물리법칙을 초월하여 상대의 골문을 찢어놓는다. K-골이다. 우리가 또 해냈다.
그렇게 도덕력을 통해 골을 많이 넣어 성공한 축구선수는 그 결과로 돈을 많이 벌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돈을 많이 번 이는 결국 자기의 도덕력을 증명한 셈이 되며, 모두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스승으로서의 입지를 확보하게 된다. 유교주의적 세계관에서는 이와 같이 평가된다.
그래서 호날두 같은 선수는 커다란 지탄의 대상이 된다. 돈을 많이 벌었음에도, 그 행동은 유교주의적 도덕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호날두의 축구력은 도덕의 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얻은 적폐와 같은 것이 된다.
이러한 경우, 메시와 같은 선수는 그 반대급부를 얻게 된다. 도덕적이지 않은 사악한 악이 아무리 축구력을 자랑해도, 도덕력에 의해 얻어진 진정한 축구력은 사악한 축구력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적 경지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는 선비들에 의해 추대된다.
"아무리 실력이 있는 척하면 뭘 하나, 인성이 엉망인데, 쯧쯧. 인성이 따라줘야 그게 진짜 실력이지."
그러나 실력과 인성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나아가 상관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을 인성과 결합시키고자 하는 이 의도가 바로 유교주의의 잔재다.
실력과 인성이라는 이 단어들을, 힘과 도덕이라는 단어들로 바꿔서 이해하면 정확하다. 힘과 도덕이 불가분으로 결합된 것이 바로 진짜인 것이다.
이처럼 힘과 도덕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에, 돈과 도덕도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때문에 진짜 스승은 돈과 도덕을 다 가져야 하는 것이다.
도덕적인 척하는 일은 오히려 쉽다. 돈을 가지는 일이 어렵다. 그래서 진짜 스승으로 보이기를 꿈꾸는 이는 돈을 버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게 된다.
이를테면, 컬트집단들에서는 이러한 일이 자주 발생한다.
특정한 개인을 교주로 모시는 집단에서 그 교주에게 반발하는 이가 생겨났을 때, 그 둘 사이에서의 대화는 대개 다음과 같은 양상을 띤다.
"두고 보십시오. 제가 여기 나가 돈 많이 벌어 성공해서 당신이 틀렸고 제가 깨달았다는 것을 증명할테니."
"해봐라. 어디 니가 돈을 나만큼 벌 수 있나. 오히려 내가 지금보다 더 많이 벌어서 니가 틀렸고 내 깨달음이 맞다는 것을 알려줄테니."
컬트집단에서의 지도자에 대한 반동은 지도자와 반동자가 서로 진짜 스승임을 놓고 겨루는 스승투쟁으로 인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스승투쟁은 사실 돈의 투쟁이다. 돈을 많이 가진 이가 진짜 스승의 권위를 얻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의 모습은 또한 부모와 자식간의 대립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자식이 부모보다 더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함으로써, 부모보다 더 진정한 인생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는 일로 인해, 자식은 뛰쳐나간다.
그렇게 하나의 유교적 왕국을 다스리는 부모에게서 나와, 자신이 더 성대한 유교적 왕국을 건설하려고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승 컴플렉스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스승이 되지 못하게 억압하는 것 같은 가짜 스승에게서 벗어나, 오히려 자기가 진짜 스승이 되려고 하는 이 역동은, 분명하게 유교주의가 만들어낸 것이다.
유교적 세계관이 정립한 이상적인 인간상 자체가, 애초 대다수의 사람들을 미숙한 존재로 보며 하늘의 뜻을 깨친 자신이 그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스승의 모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정당한 스승의 자격을 갖추어야 하며, 결국 도덕을 가르치려는 이가 얻어야 할 자격은 바로 도덕의 체화가 된다.
그리고 도덕이 체화되었다는 그 증거는 유교적 논리에 따라 돈의 양적 여부로 판정된다.
아무리 도덕적인 이야기를 해도 돈이 없다면, 그는 아직 하늘이 밀어주는 이가 아니다. 하늘이 그를 진짜 스승으로 평가한다면, 돈이라고 하는 힘 또한 그에게 쥐어줌으로써 그가 큰 일을 할 수 있게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유교의 무협지적 판타지의 세계관 속에서는, 돈이라는 힘을 갖지 못하면 자신을 늘 부족한 존재로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된다. 돈이 없다는 것은 하늘이 자기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은 마치 그 존재를 정당하게 허락받지 못하는 잘못된 존재가 된다.
결국에는 이러한 존재의 죄책감으로 인해, 한 방향으로는 더욱더 숭고하게 도덕을 부르짖으면서, 다른 한 방향으로는 더욱더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자 하는 양가적인 분열의 역사가 펼쳐진다.
스승 컴플렉스에 사로잡힌 이들이 보이는 내로남불의 모든 이유가 된다.
이 분열은 태생적인 것이다.
정신과 물질로 모든 것을 분열시켜놓고,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위를 주장하고 있는 한, 결코 떨칠 수 없는 구조다.
이 유교주의의 구조로 인해 스승 컴플렉스는 갈수록 심화된다.
진짜 스승의 자격을 갖추려면 돈이 많아야 하는데, 그래서 돈 버는 일에 집착하다 보면 그러한 모습 자체가 "정신은 물질에 대해 우위를 가진다."라고 하는 근본 전제를 부정하는 일이 되는 것만 같다. 때문에 진짜 스승이 되려 할수록 더욱더 자기모순에 시달리게 된다.
이것은 마치 부모에게 반항하며 뛰쳐 나간 아이가, 부모와는 다른 자기의 위력을 보여주려 할수록 오히려 자기의 부모와 정확하게 닮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동일하게, 컬트 집단의 반동자는 결국 자신이 반동한 교주와 똑같은 모습이 된다.
이는 무엇을 시사할까?
스승 컴플렉스가 낳는 것은 결국 유교주의의 자기모순적 복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스승 컴플렉스에 의해 오직 유교주의 자체만이 융성하게 유지된다.
개인은 이처럼 유교라는 구조에 끝없이 착취된다.
그래서 필요한 일은, 유교적 세계관 속에서, 힘, 도덕, 돈을 갖춘 진짜 스승이 되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유교를 관두고, 스승을 관두는 일이다.
자기 인생경험을 소재로 스승의 자격을 확보하려 하거나, 그 인생경험을 돈과 교환해 그 돈으로 다시 스승의 자격을 확보하려는 일은, 정확하게 유교가 만든 스승 컴플렉스에 잠식되어 일어나는 일이다.
때문에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스승 컴플렉스는 하늘이 허락하지 않은 잘못된 존재인 것만 같은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존재의 죄책감이 그리는 궤적이다.
즉, 스승의 자격을 얻기 위한 소재가 되는 그 개인의 인생경험은, 아직 그에게 소화되지 않은 경험인 것이다. 그는 여전히 그 경험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아주 단순하다. 이를테면, 자기가 어렸을 적에 폭력적인 양육을 받았고 그 경험이 아직 소화되지 않은 이가 있다면, 그는 이제 진정한 부모의 자격을 열렬하게 가르치는 스승이 된다. 그렇게 문제로 경험된 어떤 것을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을 취하면, 그 문제로부터 그는 제3자적인 위치로 분리될 수 있으며, 그렇게 문제의 당사자가 아닌 듯한 3인칭의 안전감을 확보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스승 컴플렉스란 결국 자기 마음이 소외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실로 유교다운 현상이다.
인생경험이란 그 경험을 통한 교훈을 얻어 스승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 속에서 알려지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마음에 접촉되지 않으면, 유사한 사건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이 두려운 경험을 했을 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그가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강하게 될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스승이 된다면, 두려운 경험은 또 다른 사건으로 그에게 다시금 반복된다. 끝이 없다. 마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스승이란 이름으로 마음을 무시하고 있다면, 고통은 끝이 없다.
두려운 경험은 스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두려워하던 자신을 이해해줄 가장 상냥한 시선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 순간 두려워할 자유가 있었던 자신의 면모를 개방해줄 가장 정확한 시선을 필요로 할 뿐이다.
모든 마음이 이와 같다.
그 어떤 인간의 마음도 스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금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개인에게 전면화된 시대다. 그 누구나, 나도 자신의 마음이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마음의 시대다.
마음은 인간조건이다.
그런데 선비들의 시대에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하늘에게 선택받은 소수의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전유물이라고 간주되었다. 때문에 선비들에게는 자기들만이 사실 인간이고, 나머지는 근본적으로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당연했다.
동물에게 도덕이 어떻게 통용될 것이며, 하물며 동물에게 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선비들이 여전히 이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갖고, 자신들이 힘과 도덕 그리고 돈을 다 가진 스승이기를 꿈꾸는 것이다.
이처럼 유교주의적 스승의 개념은 정말로 시대착오적인 개념이다.
힘, 도덕, 돈이 인간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시대에서 알려지는 것은 명백하다. 바로 마음이 인간조건이다. 자기 마음만 있으면 인간이다.
바로 여기에서 입장은 반전된다.
힘, 도덕, 돈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힘에 경도된 생각이다. 힘이 있는 존재만이 더 진정한 존재라고 하는 생각이다.
먹이사슬의 논리다.
그래서 유교주의의 계층구조가 피라미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가 바로 동물의 생태계적 구조다.
이에 따라, 마음의 시대의 인간관은 결국 유교주의를 오히려 동물의 논리로 판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스승이라고 하는 것은 동물 중에서 가장 동물적인 것이다.
사실 스승은 알파수컷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유교주의의 논리가 스승이라고 하는 이 알파수컷을 중심으로 모시며 다른 존재는 스승의 먹이로서 섭식되는 일이 지당한 구조를 말한다면, 마음의 시대의 논리는 이 알파수컷을 가장 먼저 기각한다. 그럼으로써 모두가 마음을 따라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세워지는 현실을 개방한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힘이 없고, 도덕적이지 않고, 돈이 없어도, 절대적으로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힘과 도덕과 돈 따위에 결코 눌릴 수 없는 것이 나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력 따위가 아니다.
존재력이다.
그 무엇도 나를 존재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존재력이다. 스승을 따르지 않아도, 스승으로 행세하지 않아도, 나는 존재한다. 내가 존재하는 일을 막을 수 없다.
인생경험을 통해 스승이 되어야만 비로소 잘못된 존재에서 벗어나 정당하게 존재할 수 있게 되는 비루한 현실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교주의의 시대착오적인 판타지 세계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에게는 진실로 스승이 필요없다.
나에게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내 마음이 나를 개인인 인간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까닭이다.
마치 부모가 아이에게 "엄마아빠 말을 듣지 않으면, 너는 무능력해지고, 나쁜 사람이 되며, 돈도 없이 길거리에서 굶어죽게 될 거야."라고 하는 이 저주받은 아이의 죄책감에 지배되는 운명은 그래서 나의 것이 아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스승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 나에게 준다.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마음의 시대다.
이 시대에 만연한 스승 컴플렉스는 그래서 이 마음의 시대를 부정하고 억압하려는 스승 최후의 발버둥과도 같다.
힘과 도덕과 돈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어르고, 구슬리고, 협박함으로써, 인간이 자기 마음을 가진 개인으로서의 나로 서는 일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하는 커다란 동물의 몸부림이다. 인간이 자신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자기가 더는 연명할 수 없음을 아는 그 괴수의 단말마다.
힘없고, 도덕적으로 비겁하게 숨어 다니며, 돈처럼 풍요롭게 축적된 자원을 갖지 못한 작은 포유류가, 결국 티라노사우루스의 단말마를 뒤로 한 채,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 작은 포유류가 인간이 되었다.
마음을 갖게 되었다.
"형이 빙하기때 어떻게 정신력으로 버텨서 성공경험을 이루었는지 인생이야기 좀 들려줄게. 남들은 형이 온혈동물이라 별로 안힘들었을 거라고 하지만, 형에게도 형 나름의 아픔이 있었어. 형이 그 즈음에 도토리코인에 투자를 했는데 말이야."
마음이 있어 이처럼 스승도 생겼다.
스승이란 착각 속에서도 마음은 나를 알리는 나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온전하게 자기의 것이 된 이 세계를 향한 감동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도 모르고 스승의 가르침이라는 가사를 붙여 흥얼거리던 이 곡조가 문득 자신의 귀에 들리게 되었을 때, 그렇게 정말로 일어난 이 모든 사실을 이해했을 때, 이미 스승은 없었다.
내가 있었다.
내가 언제나 이미 허락된 주인공으로 이 시대에도 고요히 미소지으며 서있었다.
나는 감동이었다.
그렇게 스승의 날들을 뒤로 하며, 새로운 시대는 정말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