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즉보리(民心卽菩提)

"잘 사는 길"

by 깨닫는마음씨




선(禪)에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말이 있다. 선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해주는 표현이다.


번뇌는 먼지로 곧잘 비유된다. 더렵혀진 마음이며, 그 더러움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마음이다. 반면, 보리는 괴로움에서 해방된 깨달은 마음이다. 때문에 번뇌를 제거해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점들이 있었다. 그로 인해 더러운 마음을 잘 다스려서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수행론들이 출현하였다. 집청소를 해서 먼지를 다 없애야 가장 좋은 집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논리와 같았다.


그러나 선은 이를 기각한다.


오히려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번뇌와 보리를 곧바로 연결한다. 번뇌와 보리는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번뇌가 없으면 보리도 없다고 말한다.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의 관점이 성숙해졌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현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야가 넓어지면, 그 현상 또한 더욱 넓은 면모로 개방된다.


자기의 시선의 크기가 곧 세계의 존재의 크기가 되는 셈이다.


이를테면, 작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기의 관점으로 지구를 바라보면, 지구는 불쌍한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인간이 지켜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늘 훌쩍거리기만 하는 취약한 속성을 갖게 된다. 그 결과, 인간이 불쌍한 지구를 '지켜줘야' 한다는 주장이 출현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음모론으로 굴절된 망상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본다는 것은 언제나 가장 성숙한 관점이다. 그것은 선(禪)의 정수이기도 하다. 그렇게 성숙한 관점으로 지구를 바라보면 우리는 정말로 알게 된다. 우리가 지구를 지켜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제발 우리를 지켜주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정직한 시선에 의해 본래의 면목을 찾은 지구는 애초 인간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구의 작은 변덕에도 인간은 멸종해버릴 것이다. 우리가 지구를 구원해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 지구가 인간을 구원하고 있던 것이다.


이처럼, 커다란 것을 알아볼 줄 아는 눈을 갖게 된 개미는, 이제 자기가 저 가엾은 하늘을 구원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하지 못한다. 한때는 그렇게 말했던 자신이 부끄러운 까닭이다.


혹자는, 수치심은 종교적 현상이라고도 말한다.


옛날 싸이월드에 썼던 글을 보고 이불킥을 하게 되는 이유는,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의 자신이 거대해졌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순간은 사실 작은 자신에서 거대한 자신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그렇게 거대한 자기의 시선으로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마음은 정말 엄청나게 거대한 것으로 확인된다.


진실로 우주만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우주만한 크기의 스케치북 위에 놓인 0.000001mm 직경의 작은 먼지가 이 모든 것을 망치고 있다며, 우리가 이 더러워진 불쌍한 마음을 구원해야 한다며 애타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것이다. 그 미세먼지 하나를 없애는 일이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목숨을 걸고 적폐를 제거해야 한다는 정의구현을 주장하고 있던 것이다.


때문에 선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혜능선사는, 마음이란 것이 근본적으로 애초 더럽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쓸어야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스케치북에 놓인 먼지는 스케치북을 망치는 소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해 스케치북의 결코 상실될 수 없는 온전함을 알리는 소재다. 나아가 스케치북에 먼지가 놓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그 먼지가 스케치북에 의해 허용된 현상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다면 스케치북은 왜 먼지를 허용하고 있었을까?


먼지를 통해 그림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림으로써 필요를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신나게 달리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질 운명에 처했을 때, 그의 앞에서 빨간 가위표가 그려진 스케치북을 들고자 하는 일은, 그가 이대로 가다가는 죽을 수도 있으니 안전하게 멈추어야 한다는 필요를 알리고자 하는 의도다.


즉, 스케치북은 먼지로 그린 그림을 통해 바로 우리 자신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먼지는 그러한 스케치북의 의도를 전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중요한 소재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먼지가 없어져야 진정한 스케치북이 된다고 하는 생각들은 신속히 포기된다. 오히려 먼지와 스케치북은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이다. 먼지 자체가 이미 인간을 위한 스케치북의 의도 속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스케치북은 먼지에 의하여 더욱 멋지고 유용한 스케치북이 된다.


먼지라고 하는 더러운 마음은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라, 스케치북이라고 하는 본래의 마음의 의도를 가장 잘 실현하고 있는 정당한 형상인 셈이다.


그래서 번뇌즉보리다.


번뇌 속에는 언제나 인간의 필요를 정확하게 알리는 깨달음의 지혜가 담겨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마음은 그 어느 마음도 깨달음을 벗어나지 않고, 바로 이와 같은 깨달음의 의도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민심(民心)을 말할 수 있다.


민심은 마음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시각각 흐르는 마음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마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의 마음은 곧 자기의 마음이다. 전술한 것처럼, 자기의 성숙도만큼 세계는 개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시선의 크기만큼만 세계의 크기는 경험된다. 따라서 세계가 돌아가는 흐름을 어떠한 방식으로 보고 있는가가 곧 자기가 어떠한 마음상태에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준다.


즉, 민심에 대한 태도가 우리 자신의 성숙도를 평가하는 정확한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의 유교주의적 정치인들은 이 민심에 대해 양가적인 태도를 취한다.


자신들의 세력을 지지하는 방향성으로 민심이 움직이면, 이들은 '집단지성의 힘' '민중의 지혜' '민심즉천심' 등의 수식어를 써가며 민심을 신격화한다. 반면, 자신들의 세력에 반동하는 방향성으로 민심이 움직이면, 이들은 '미개한 대중' '붕어, 개구리, 가재' '철없는 아이들' 등의 수식어를 통해 민심을 악마화한다.


그리고 이 신격화와 악마화의 양가적인 태도 속에서 이 유교주의적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핵심적인 대전제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마음은 그 더러움을 청소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다스려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들은 자기가 제일 높은 곳에 앉아 신과 악마조차도 자기 뜻대로 지배할 수 있는 전능한 위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 그러한 꿈에 당위적인 정당성까지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유교주의인 것이다.


유교의 핵심은 상기한 것처럼,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그리고 이처럼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는 의도는, 마음이 무엇인지 그 본래의 면목을 알지 못하기에 생겨나는 의도다. 즉, 작고 미숙한 어린아이들이 자기의 좁은 관점을 통해 마음이라는 것을 보았기에, 결국 마음도 자기의 크기만큼 작은 것처럼 이해됨으로써, 오히려 자기가 저 작은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착각된 것이다.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다.


자기는 천재라고 생각하나 실은 덜 발달된 아이들이, 또한 역으로 말해, 덜 발달된 자기의 모습에 열등감을 느껴 자기가 천재인 척하는 병적 우월감으로 그 열등감을 보상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보이게 되는 공통적인 모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세계를 우습게 여기는 일이다.


자기 뜻대로 세상이 움직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만만하게 여기는 오만한 이들의 모습이다.


따라서 유교주의적 정치인들은 사실 민심을 낮은 층위의 것으로 우습게 여긴다. 자기들의 세력을 지지하는 민심이건, 반동하는 민심이건 간에, 이들에게 있어 민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성가신 아이와 비슷한 것으로 경험된다.


"우쭈쭈."하며 적당히 맞춰주면 자기를 잘 따라 힘이 되어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금방 삐져서 "나, 다른 애랑 놀 거야."라며 가버리기도 하는 대단히 유치한 아이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바로 이 모습이 실은 유교주의적 정치인들 자신의 모습이다.


민심이라고 하는 세계의 마음을 어떠한 모습으로 보는가가, 곧 자기 자신이 어떠한 상태인가를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이러하다.


가장 작은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가 자기 위로 끊임없이 변하며 흘러가는 구름의 형상을 보며 "참 줏대도 없이 변덕스럽네. 나처럼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한 자리에서 묵직하게 의리있는 모습을 보여야지. 이기적으로 참 지만 안다."라고 하는 모습과 같다.


이 우물 안 개구리의 눈에는 이처럼 우물의 경계선만큼의 크기의 하늘만이 비치는 까닭에, 개구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심한 가뭄이 들어 많은 이가 고통받고 있는 저 먼 땅을 향해 커다란 물을 가득 머금고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하늘의 의도가 개구리에게는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개구리는 끝내 하늘을 가르치려고 하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똑바로 사는 것인지를 시대의 큰어른처럼 훈계함으로써, 하늘을 올바른 방향으로 다스리려고 하게 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또한 누가 더 하늘을 잘 다스릴 능력이 있는 개구리인지를 우물 안의 개구리들이 서로 겨루는 모습이 바로 한국의 정치게임의 현실이다.


민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우습게 보아도 너무나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하늘을 우습게 보아도 너무나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다.


개구리들의 왕이 된다고 하늘을 지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유교주의의 정치학은 늘 이것을 꿈꾸어왔다. 개구리들의 왕인 이상적 군주가 민심 위에서 민심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려고 해왔다.


그래서 늘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방법이 틀렸기에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틀린 것이다.


마음을 이해하는 여러 다른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다는 방식 자체가 틀린 것이다.


100층 빌딩의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틀린 이야기인 것과 같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아닌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다.


민심은 통제할 수 없다.


마음은 통제할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사실로 인정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잘 써서 마음이 유교적 올바름을 갖출 수 있도록 또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이끌까를 궁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방향성 자체가 애초 틀린 것이다.


마음은 우리에게 지금 정말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릴 뿐이다.


마음을 통제하려 할수록, 마음이 알려주는 그 신호는 희미해진다.


그에 따라, 우리는 자신의 진실된 필요에 둔감해지며, 결과적으로 무능력해진다.


산속에서 헤매다 탈수증세가 온 이의 귀에 들려오는 물소리를 아무리 통제해봤자, 그 통제의 결과로 얻는 것은 지옥일 뿐이다. 나아가서는 죽음이다. 반면, 물소리를 정직하게 알아듣는 이는 물을 찾아 성공적으로 생존을 담보하게 된다. 그렇게 마음을 통해 자신이 유능해지는 현실을 실현하게 된다.


물소리가 크게 들릴 때는, 물을 너무나 마시고 싶을 때다. 즉, 지금 이 자리에 물이 없을 때다.


이처럼, 민심이 거세게 움직일 때는, 지금 이 자리에 민심의 필요가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없을 때다.


오늘날, 내로남불이라는 목소리가 민심을 통해 가장 크게 들려온다면, 민심은 지금 공정함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 공정함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로 하는 그 공정함이 지금 이 자리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속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자리를 우물처럼 협소하게 만들고 있는 개구리들은, "어, 여기에 공정함 많은데 왜 없다고 해? 줘도 계속 달라네. 참 진짜 징징거리는 미숙한 아이들 같다."라며 자기들이 자기 모습을 투사해서 보는 망상의 현실을 고집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사실을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표현 그대로, 마음은 필요의 문제다.


마음은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쪽에서 필요가 채워질 수 있는 쪽으로 움직인다. 때문에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필요가 채워졌다면,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이 움직였다는 자체가, 필요가 채워지지 않았다는, 곧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소재가 없었다는 정확한 반증이다.


지금 이순간 마음이 알리는 필요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중되고 경외되어야 할 것이다.


마음이 알리는 모든 필요는, 인간을 살리고자 하는 가장 신성한 것으로부터 나온 그 필요다.


인간을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인간의 필요에 응답해 인간을 가장 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유교주의의 논리가 가장 다스려야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실은 인간을 가장 구원하고 있는 것인 셈이다.


그래서 마음을 '없이 계신 신'이라고도 비유한다.


스케치북이 텅 비어 있는 이유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먼지가 그 위에 놓이는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럼으로써 상상 그 이상의 그림을 그려내어 인간에게 간곡히 알리는 일을 통해 인간을 가장 온전하게 살리기 위해서다.


혹여라도 마음이 바로 이러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마음을 작은 것으로 보며 다스리려 하는 작은 관점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의 본래 면목에 대해 다시 기억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말이 번뇌즉보리인 것이다.


이 말을 오늘날의 상황에 맞게 이처럼 옮길 수 있다.


"민심즉보리(民心卽菩提)."


민심이 곧 깨달음이다.


민심은 집단정신의 지성도 아니고, 위대한 민족정신의 정의도 아니며, 그렇다고 한심한 대중의 부질없는 욕망도 아니다. 민심은 그 모든 과잉된 예찬과, 그 모든 과잉된 하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민심은 그저 정확성일 뿐이다.


민심은 지금 우리 자신에게 정말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동안 우리 자신에게 그것이 얼마나 허용되지 않았으며, 그만큼 우리 자신이 그것을 얼마나 필요로 했는지를 그대로 가르쳐준다.


민심이라고 하는 세계의 마음이 그에 상응하는 동일한 것으로서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게 해준다.


우리 자신은, 나는, 분명하게 필요했다.


그것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마음이 알려준 것들이 정말로 나에게 필요했음을 확인하는 순간, 길은 열린다.


마음이 필요를 채우기 위해 움직이고 있던 그 방향성으로 나는 마음과 일치하여 움직이게 된다. 그 일치를 통해 에너지의 낭비없이 가장 신속하게 이동하게 된다.


그렇게 우물 안에서 벗어나 내가 직접 걸으니, 나로 인해 길이 열린다.


내가 걷는 발자취가 그대로 길이 된다.


스케치북 위에 그려지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궤적이 된다.


온전하게 빛나는 먼지다.


이 먼지의 모습이야말로, 표현 그대로 잘 사는 모습이다.


필요를 따라 정확하게 이동하니, 삶에 막힘이 없게 된다. 막힘이 없으니 갈등이 없게 된다. 갈등이 없으니 소진이 없게 된다. 소진이 없으니 포기가 없게 된다. 포기가 없으니 멈춤이 없게 된다.


그래서 멈추지 않고 잘 흘러가게 된다.


늘 필요를 가득 채우는 충만함이 그치지 않고 잘 흘러가게 된다.


잘 살게 된다.


우리가 살고 싶은 바로 그 현실이다.


민심 속에 이 멋진 현실을 향한 깨달음이 있다.


민심즉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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