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신성한 날갯짓"
"인정받고 싶다."
이것은 오늘날의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목소리다.
인정받는 일은 비단 정치인들과 연예인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거의 모두가 다 인정받고 싶기 때문에,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영혼을 끌어모아 코인을 사며, 대현자의 자격처럼 더 나은 지식들을 수집하고, 훈련과 관리를 통해 더 나은 몸을 만들어나간다.
왜 이토록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일까?
지금 이 시대에 주요하게 작동하고 있는 기제가 바로 억압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는 현대에 들어와 촉발된 PC문화뿐만이 아니라,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유교주의가 만들어낸 억압의 기제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 유교주의의 억압은 역설적이게도 가부장에 의해 억압받은 엄마들에게서 더욱 억압적으로 드러난다. 가부장의 구조(대체로 자기 아버지의 율법)를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모성이라는 이름하에 그것이 억압이라는 사실이 은폐된 채, 억압으로 작동한다.
나아가 이 억압의 기제는 '아이를 악으로부터 지키는 좋은 엄마를 꿈꾸는' 도덕적 모성주의의 지지 속에서, 현재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운동권 정치세력들에 의해 '가족주의적 당위의 동지애'의 형식으로 변주되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것은 "닥치고 내 아이!"와 같은 맹목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더욱 강력한 활동력을 갖는다.
통칭하자면, 이러한 현상을 부정적 모성에 의한 억압이라고 부른다. 유교가 만들어낸 도덕적 모성주의는 아주 쉬이 부정적 모성으로 변질된다. 수호의 대의를 걸고 실제로는 억압적 통제를 행사하고 있는 가장 권력적인 모습의 표현이다.
이처럼 억압이 강렬한 상황에서는 그만큼 인정욕 또한 강렬해진다.
아주 단순하다. 너무나 먹고 싶은 초코파이를 먹지 말라고 억압된 이는, 자기가 초코파이를 먹어도 될 자격을 어떻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을까에 모든 관심을 집중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 결과, 억압의 구조 속에서 그 억압을 받아들여 인정욕을 채우고자 하는 타협의 방식이 출현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자기가 정당하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작동한다. 이른바,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을 넘지 않는 '착한 아이'의 형식을 갖추어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예(禮)'는 대표적인 이 형식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정치인들, 연예인들, 그리고 착한 아이 워너비들은, 얼마나 자기가 예의범절을 잘 갖추고 똑바로 된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를 최대한 어필하고자 한다.
마치, 유교적 도덕주의로 훈련된 엄마들이 지켜보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어떻게 하면 그 엄마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을지를 치열하게 궁리하는 아이들의 상태와도 같다.
이러한 방식으로, 억압된 사회 속에서 인정욕이 추구되는 형태는, 억압의 주체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역동을 보이게 된다.
때문에 아무리 엄마들에게 착하고 예쁘게 잘 자란 아이처럼 사랑받으며 인정욕을 채워나가도, 가슴 속에서는 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다.
인정욕은 억압이 만들어낸다. 그런데 인정욕을 채우기 위해 억압의 주체에게 인정을 승인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해 그 억압의 세력을 강화한다면, 그만큼 인정욕 또한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끝나지 않는 재롱잔치와 같다. 현실에서 프린스/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을 하는 엄마들의 요구와, 훈수와, 질책 속에서, 그 모든 요소를 다 만족시킬 만한 초레어 7성 가챠캐릭터가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쳐야 하는 일이다.
더 극적으로 비유하자면, 밑빠진 독에 물을 부으면서, 스스로 그 독을 점점 더 커다랗게 만들기까지 하는 모습이다. 충족이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인정욕이라는 마음이 알리는 의미는 이처럼 엄마로 상징되는 심리역동적 세력이 보기에 더 착하고 예쁜 아이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억압의 현실에 의해 인정욕이라는 마음이 알려지는 그 의미는 바로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정욕은 오로지 억압에서 해방되려는 방향성을 향해 실현될 때만 충족될 수 있다.
억압이라는 현상을 존재론적으로 묘사한다면, 바로 존재를 형식에 가두는 일이다.
흔히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비유된다. 넘치면 자르고, 모자라면 늘린다. 그렇게 형식을 잘 따라, 형식이라는 거푸집이 조형하는 모양새를 잘 갖추게 하는 일이 바로 억압이다.
그래서 억압 속에서 인정받으려는 일은, 언제나 자신의 존재를 잃게 되는 일이다.
인정받으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는 동안, 자신의 존재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유기되며, 소외된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인정욕이 생기게 된다.
인정욕이 정말로 말하고 있는 메시지는 분명 다음과 같다.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을 인정해줘."
그러나 억압 속에서 이것은 결코 인정될 수 없는 것이기에, 인정욕은 도저히 충족될 수 없게 된다.
억압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율법에 있는 그대로'를 추구하기에 일어나는 것인 까닭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정욕이 그 자체로 정직하게 자각되고 개방된다면, 이 인정욕은 필연적으로 율법 밖을 향하게 된다. 엄마의 요람 밖으로, 착하고 예쁜 깨시민들의 사회 밖으로, 형식 밖으로 탈출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밖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변태성이다.
인정욕에 가장 정직하게 움직인 결과는 변태성의 조우다.
이 변태성이라고 하는 것은, 엄마에게서, 그리고 엄마와 같은 사회에서 절대로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존재의 속성이다. 너무나 드러내고 싶지만, 드러내면 곧바로 추방당할 것 같은 자신의 속성이다.
바로 이 변태성이 인정받지 못하고 억압되었기에, 인정욕은 생겨난 것이다.
인정욕은 결국 자신의 변태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다.
개인이 늘 자기가 쌓은 것을 유지하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파괴하고 싶어하는 양가적인 충동은 이 변태성에 대한 인정욕에 목말라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변태성이라는 것은 곧 형식의 파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형식을 파괴하면, 자기가 지금껏 그 형식을 통해 얻은 모든 자원도 같이 없어질 것만 같다. 곳간이라는 형식이 사라지면, 그 안에 저장된 곡식들도 사라지게 될 것 같은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가 그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다만 지키고만 있는 그 곳간을 파괴해서라도, 그 유지의 임무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지고 싶다.
결국 이 유지와 파괴의 양가적인 충동이 알리고 있는 유일한 의미는 자유다.
세간에서 바람직하다고 정해진 형식을 통해 자원을 많이 저장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에 유지하고자 한 것이며, 그렇게 해도 자유로워질 수 없었기에 파괴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변태성의 진짜 이름은 바로 자유다.
변태성의 반대편에 있는 형식이라고 하는 것을, 마치 의관을 갖추어 입고 용모와 언행이 단정한 선비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었기에, 그에 대비되어 변태성이라는 이름이 부정적으로 차용된 것이지, 실제적인 그 내용과 의미는 그저 자유일 뿐이다.
실제적으로 오늘날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면, 세간에서는 변태처럼 본다.
민족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합쳐 적폐를 청산하고 위대한 선배들의 얼을 따라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할 중요한 때인데, 어디 철없이 개인의 자유를 민족의 성스러운 임무보다 우선할 수 있냐는 도덕주의의 시선이 따갑게 날아온다.
개인이 존엄한 투표의 자유를 행사해도, 그것은 그저 역사의식이 부재한 철없는 아이의 삿된 행태가 되어버린다.
자유는 존중받지 못한다.
형식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억압이 지배하는 시대며, 그만큼 인정욕이 들끓어오르는 시대다.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버린 시대.'
인간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인간을 만만하게 본다는 것이다. 만만하게 보니, 인간을 형식 속에 꾸겨 넣으려는 일이 당당하게 자행된다.
종교심리학적으로 경외감이 사라진 현실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 신성한 위상을 잃고 가장 비루하게 몰락한 현실이다. 도덕주의의 율법에 따라 매끈하게 움직이는 외적 작용만 있을 뿐, 실제로는 영혼이 상실된 자동인형들의 유토피아와 같은 현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변태성은 희망이 된다.
변태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대체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경외감은 회복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글로는 차마 묘사할 수 없을 변태성을 방 안에서 드러내고 있는 개인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그때 방문이 열리며 엄마가 들어온다. 과일접시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엄마의 손끝은 한없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 엄마의 눈빛을 바라봐보자.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그 눈동자 속에 비치는 것은 결코 엄마의 자식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크툴루의 자식이다.
엄마에게 늘 익숙한 자식의 자리에, 엄마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로테스크한 에일리언이 대신 그 자리에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엄마의 배에서 낳은 새끼 같지 않은, 어디 우주에서 떨어진 것 같은 새끼가 너무나 낯설게 이 공간에 출현해있다.
이 순간, 엄마가 체험하는 그 느낌이 바로 경외감이다.
변태성은 이 경외감으로 말미암아, 개인이 결코 모성이라는 형식에만 귀착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에서 온 불가해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대로 증명한다.
존재는 우주적이다. 때문에 인간이 만든 그 어떤 형식에도 갇힐 수 없다.
그래서 존재는 신비하다. 불가해한 신비다. 이 불가해한 신비에 대한 자각이 곧 경외감이다.
인간의 자유는 바로 이 인간을 신비로 알아본 경외감에 의해 정말로 자유로서 실현된다.
위대한 실존철학자 베르자예프의 말처럼,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의 본성은 자유다.
존재는 자유다.
존재의 자유고, 존재할 자유다.
변태성은 지금 이렇게 '있는 그대로' 존재할 자유에 대한 모든 것이다.
법도에 맞는 특정한 형식으로 존재해야만 정당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그 모든 억압을 넘어서, 존재 그 자체로 존재 그 자체를 인정받고자 하는 자유의 몸부림이다.
자유를 향한 신성한 날갯짓이다.
허락될 수 없는 것이 허락되는 일, 그래서 이제 허락받기 위한 투쟁을 멈추어도 되는 일, 비로소 적이 없는 곳에서 온전하게 쉴 수 있는 일, 이것은 자유의 일이다. 이 자유의 일은 다음과 같은 경쾌한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나는 변태입니다."
이것은 이러한 의미다.
"나에게 요구되어 왔고, 나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믿었던 그 어떤 나의 형식보다도, 나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더 거대한 존재임을 이제 나는 인정합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이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나는 자유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이 늘 반가운 사실이듯이, 인정된 사실은 가장 반가운 사실이 된다.
나는 자유다.
내가 이미 자유로웠던 것이다.
내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나는 그토록 인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일 아침에도 동쪽 하늘에서 이 기쁨이 솟아오를 것이다.
또 날아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