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쉬게 하자"
사람들이 거대한 악의 세력에 의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음모론의 목소리를 쉬지 않고 드높이는 양치기 소년은 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사회적 권력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자기네 독수리오형제의 일원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알렉터 군단이 뒤에 숨어서 크크 웃으며 은밀하게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망상의 논리는 대체 왜 지속되는 것일까?
바로 음모론을 선동하는 양치기 소년 자신이 제일 잘난 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소영웅주의의 근간에는 깊은 질투심이 있다.
누구보다도 자기가 제일 똑똑한 천재로 보이고 싶어하는 질투심이 있다.
그래서 양치기 소년은 음모론의 기제를 통해, 사람들을 위협하는 사악한 세력이 있는 가상의 메타버스를 사람들에게 체험시키며,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그 메타버스를 구원할 수 있는 천재적 존재로서 자기를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 한다.
이러한 활동의 실상은 아주 쉽게, 가상의 병을 만들어내고 그에 대한 가상의 약을 제공해주는 독점적 포지션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논리다. 양치기 소년들만큼 겉으로는 부정하지만 실은 이 시장경제의 논리를 긍정하며 온 몸으로 체화해 사는 이들이 달리 없다.
음모론으로 협박해서 가상의 약을 독점적으로 판매하게 된 이 성공적인 결과로 얻어지는 수익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동시에, 양치기 소년이 자기가 천재이기 때문에 그 천재성과 교환하여 정당하게 얻은 보상이라고 말하는 착각의 정도도 그에 비례하게 어마어마하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코인을 추구하는 현실의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 논리는 코인과 동일하다.
허구의 것으로 현실을 지배하려는 논리다.
가상의 내러티브에 의해 코인의 흐름이 요동치듯이, 가상의 음모론에 의해 그 음모론에 빠진 이들의 마음은 요동친다.
그렇게 휘청거릴수록, 더욱더 자신이 빠지게 된 그 가상의 내러티브를 강렬히 맹신하게 된다. 붙잡을 지푸라기가, 곧 그나마 확실해보이는 소재가 그것밖에는 없어 보이는 까닭이다.
이처럼 가상의 음모론은 사람들의 인지부조화를 자극함으로써 더욱 견고하게 숭배된다. 그럴수록 재화는 그 음모론의 보급자에게 더욱 견실하게 축적된다.
그래서 이 양치기 소년들이 사이비고, 사기꾼이며, 공갈쟁이인 것이다.
기적의 물약을 파는 이들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 본질은, 초등학교 때 자기 엄마아빠가 실은 숨겨진 초능력자고, 자기도 그 능력을 이어받았다며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으려 하는 뻥치기 소년이다.
이와 같이, 가상의 음모론은 자기가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게 가장 특별한 존재로 보이고 싶어하는, 늘 강렬한 질투심에 불타는 뻥치기 소년에 의해 생산된다.
질투하는 자아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판타지소설을 창작하는 주체다.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어 자기에게 사람들이 의지하게 될수록 자기가 특별한 권세를 얻는 것만 같기에, 이 질투하는 자아는 음모론의 창작활동을 결코 멈출 수 없게 된다.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이러한 방식으로, 질투하는 자아는 끝없이 두려움만을 만들어내어 사람들을 겁에 질리고 위축되게 하며, 자기만이 그 두려움에 대한 구원자인 것처럼 특별한 입지를 확보한다.
때문에 "아무개가 없는 현실이 두려우십니까?"라는 식의 우상숭배의 언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아무개가 없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아무개가 바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주체다.
약을 발라주고, 돌봐주며, 지켜주는 구원자처럼 행세하고 있는 그 주체가 바로 폭행의 주범이다.
그 주체의 판타지소설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아무도 두려워할 일이 없었다.
오늘날, 소영웅주의에 빠져 마치 자기를 순교하는 구원자처럼 생각하는 정치인들, 선동가들, 연예인들이 바로 이렇게 두려움을 창조해서 보급하는 대표적인 뻥치기 소년들이다.
질투심이 아주 큰 이들이다.
그래서 이들을 보면 거울뉴런의 작용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질투가 격렬히 유발된다. 이들처럼 다른 이들을 누르고 제일 잘난 자가 되고자 하는 역동에 시달리게 된다.
자기가 제일 잘난 존재가 되어 다 갖고자 하는 이 기성세력의 질투심에 공진되어, 젊은이들도 시급하게 제일 잘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경험하게 됨으로써 결국 코인 등에 매진하게 되는 것이다. 기성세력이 이미 질투심을 통해 다 끌어모아 소유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는, 모 아니면 도의 도박성 기제 외에는 도저히 잘나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까닭이다.
그렇게 뻥치기 소년들이 세상을 향해 뿌린 거대한 질투심은,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도 편히 쉴 수 없게끔 만든다.
질투심은 쉬지 못하는 마음이다.
쉬면 자기가 제일 잘난 자가 되지 못할까봐, 결코 쉴 수 없는 마음이다.
이러한 질투심의 속성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질투는 사람들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만한 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를 살리는 현실을 가능하게 하는, 그 정도로 특별한 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질투다.
그래서 질투의 충족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치는 현실이 실현되어야 가능해진다.
즉, 나를 위해 맹목적으로 희생하는 사람들에 의해 내가 살려져야 가능해진다.
때문에 질투는 충족되기 위해서 반드시 사람들을 희생 속에 몰아넣게 된다.
요즘 정치판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아무개다."
"내가 아무개다."
이러한 표현들을 통해, 질투가 가장 많은 이를 사람들이 살리고자 하는 현실이 펼쳐진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신보다 더 중요한, 자신보다 더 자신다운 뻥치기 소년을 살려야 한다는 대의의 깃발이 높게 세워진다.
그래서 질투는 무겁다.
그것은 전쟁터의 무거운 공기다.
질투가 낳는 움직임 속에서는 언제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까닭이다. 목숨을 걸어야 증명되는 까닭이다.
피곤한 일이다.
이것이 피곤한 일이기에, 질투는 필연적으로 화를 부른다.
피곤하다는 것의 본질은 죽을 것 같다는 것이다.
죽을 것 같은데, 아무도 자신을 챙겨주지 않고 배려해주지 않아서 화가 난다.
뻥치기 소년도 바로 이러한 이유로 화가 나있고, 뻥치기 소년을 살리기 위해 활동하는 이들도 동일한 이유로 화가 나있다.
내가 죽을 만큼 힘들 때, 나를 살리는 기운을 충분하게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래서 그 기운이 결핍이 되었기에, 화가 나는 것이다.
즉, 질투라는 마음이 이루고자 하는 그 결과인, 누군가가 나를 살려 '내가 사는' 그 현실이 결코 충족되지 않기에 계속 화가 나는 것이다.
이처럼, 질투심의 원형은 결국 살고 싶다는 마음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질투심은, 제일 잘난 자가 되어야만 내가 살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다.
그 믿음에 따르면, 잘난 자가 되어야, 사람들이 잘난 자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투심은 사실 누구보다 제일 잘난 자가 되고 싶어하지만, 누구보다 제일 사람들을 의존하고 있는 마음이다.
때문에 질투심을 통해서는 결코 잘나질 수도 없다. 잘나게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지평으로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질투심은 그렇게 떠날 수 없다. 사람들이 없으면 자기를 살려줄 소재가 없어지는 까닭이다.
사람들보다 잘나지고 싶으면서도, 사람들에게 맞춰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는 이 분열로 인해, 질투는 결코 충족되지 못하게 된다.
살고 싶다는 마음은 늘 결핍된다.
그러니 늘 두려워지고, 그 두려움만큼 음모론을 만들어내 사람들에게 보급하는 일만을 반복한다. 두려움의 물귀신이 된다.
누군가가 나를 살려 내가 사는, 질투심이 꿈꾸는 소망을 정말로 이루고 싶다면, 가장 먼저 포기되어야 할 것은 잘남이라는 선행조건에 대한 착각이다. 그것은 무용한 조건이다. 제일 잘난 자가 되는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살리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잘남이라는 살림의 조건이 기각되면, 남는 것은 누군가라는 살림의 주체뿐이다.
누군가의 자리에 내가 오면 된다.
내가 나를 살리면 된다.
살린다는 것은 쉬게 한다는 것이다.
죽을 만큼 힘들 때, 내가 쉬어줌으로써 나를 살리는 것이다.
모두가 다 세상에 가득찬 질투심으로 인해 죽을 만큼 힘든 이 때에, 근본적으로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는 이 때에, 나는 나를 특별하게 살릴 필요가 있다.
나만 특별하게 살려지는 그 현실을 이룰 필요가 있다.
더 빨리, 더 특별하게 쉬는 것이다.
가장 쉬는 것이다.
그렇게 가장 나를 살리는 것이다.
질투심이 끝없이 세상을 타오르는 지옥으로 만들고 있을 때,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다.
"그렇게도 간절히 이 우주에서 제일 힘들어하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목숨을 건다고 하니, 그럼 그거 다 해라. 나는 힘든 거 안하고 푹 쉴게."
내가 나를 쉬게 하는 이 선택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때, 공기가 달라진다. 가벼워진다.
내가 나를 쉬게 하는 일이 의미하는 것은 노예의 역사의 종결이다.
노예는 결코 스스로를 쉬게 하지 못한다. 주인의 명과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서만 자신의 쉼이 결정될 뿐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쉬게 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는 비로소 개방되었다.
쉼이라는 것은 자유의 가장 본래적인 형상이며, 가장 실천적인 표현이다.
질투는 원래 자유를 망각한 노예들끼리 하는 것이다. 서로의 쇠사슬을 질투하는 것이다. 제일 잘나게 보이는 쇠사슬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다. 제일 잘난 노예의 증표로서 제일 무거운 쇠사슬을 달게 되면, 그리고 그 무거움 속에서도 자신에게 부과된 노예업무를 잘 수행해내면, 자신이 제일 맛있는 밥을 얻어 먹어 더욱 잘 살 수 있게 될 것이라 여기는 그 믿음이 만드는 것이다.
자유는 이러한 믿음을 갖지 않는다.
곧, 자유는 질투하지 않는다.
그저 쉴 뿐이다.
내가 제일 잘난 자가 되면 누군가가 나를 살려줄 것이라고 망상하지 않으며, 지금 이순간 내가 나를 살릴 뿐이다.
동시에 그렇게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살릴 뿐이다.
내가 나를 쉬게 하듯이, 내 이웃을 쉬게 할 뿐이다.
내 이웃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라는 사실을 함께 알릴 뿐이다.
푹 쉬고, 더 많이 쉬며, 같이 특별하게 살아나는 일, 이것이 바로 자유의 일이다.
내가 나를 쉬게 하는 일의 의미다.
뻥치기 소년의 지옥을 뻥 차고 경쾌하게 살아남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