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큰 뜻"
미디어를 통해 선전되는 시대의 큰어른들의 신화가 있다.
유교적 성향을 지닌 신진권력층이 이 신화를 즐겨 보급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신화화시킨 인물과 자기들의 모습을 동일시해서 대중에게 인식되게 하기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기의 스승을 신격화함으로써 그 제자뻘인 자기 또한 그와 유사한 위상을 쉬이 점하게 될 수 있을 이득을 꿈꾼다는 것이다. 자기를 직접 신격화하면 돌을 맞기에 좋다. 때문에 겸양을 가장하여 자기의 스승을 높이 추대하는 방식이 더욱 안전하며 그 효과 또한 증대한다.
오늘날의 신진권력층은 자기들이 옹립한 이 시대의 큰어른들을 소위 깨달은 이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 평가의 기준은 당연히 유교다.
그래서 시대의 큰어른들의 말씀을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그것은 결국 관계론이 된다. 유교가 관계론인 까닭이다.
유교는 어떻게 해야 관계를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덕목들의 집합이다. 그 관계의 덕목들을 잘 체화할수록, 동물에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하늘의 뜻과 합치한 인간으로서의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을 유교에서는 깨달음이라고 부를 것이다.
즉, 관계론의 마스터를 깨달은 이라고 부를 것이다.
물론 사실과는 전혀 다른 관념 속 이야기다.
깨달음은 절대로 관계론이 아니다.
깨닫는 체험 속에서 가장 명확하게 세포에 알알이 새겨지는 사실은, 관계가 환상이라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그 어떤 관계의 환상보다도 앞서는 견고한 존재의 사실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 사실이다.
때문에 깨달음은 분명 어떠한 담론이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관계론이기보다는 차라리 존재론이다.
실존적 존재론이다.
전통적으로, 실존의 가장 반대편에서 성립되는 개념은 구조다.
관계론은 개인 대신에 이 구조를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개인이라고 하는 개체는 실체성이 없으며, 오직 그 개체들 사이에 펼쳐진 관계만이 실제적인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유교적 관계론 속에서는 개인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자중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전체의 구조를 위해 개인의 욕망은 승화되어야 한다.
개인의 욕망이, 이념으로, 이데올로기로, 대의로 변질되는 이 과정은 승화라고 읽지만 그 실제적인 의미는 환원이다. 거세고, 축소며, 곧 억압이다.
실존이 구조를 거부하는 이유는 구조가 실존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 억압의 폭력이 진리담론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니체가 수없이 비판한 그 폭력의 양상이며, 니체의 후예들인 포스트모던의 사상가들이 함께 입을 모아 비판한 그 폭력의 양상이다.
실존철학은 아예 그 시작부터 끝까지 이러한 구조의 폭력에 대해 개인의 해방을 부르짖음으로써 형성된 운동이다.
유교적 큰어른들이 주장하는 한국형 관계론은 사실 사상사적으로도 대단히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그러한 관계론에서 비판하는 개인이라는 개념은 2차대전 이전의 서구사회를 지배한 근대적 주체의 개념이다. 즉, 계몽주의가 배양한, 자유와 평등의 기저에서 이성적 주체성을 갖고 스스로의 권리와 의무를 자유롭게 실현해나가는 개인의 개념이다.
이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러한 개인의 개념은 제국주의와 홀로코스트의 비극 앞에 이미 막을 내렸다. 실존철학은 이와 같은 개인의 개념에 대한 최고의 해체자였다. 실존철학은 인간을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던져진 실존'으로 다시 묘사해내었다.
그리고 실존철학이 무르익어 선(禪)과 같은 종교적 기획과 상통하게 되었을 때, 마치 우주의 먼지와도 같이 '던져진 실존'이 어떻게 우주에서 가장 귀한 '기적의 존재'로서의 의미를 회복하게 되는지를 거침없이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에서 활용되는 개인의 개념은 이러한 실존철학의 묘사에 빚을 지고 있다. 이미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리잡고 있는 개인의 개념은 실존철학 이전의 근대적 개인의 개념이 아니다. 이성의 힘으로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정복해낼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주체의 개념이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한국형 관계론에서의 개인에 대한 비판은 정확한 헛발질이다. 대충 찬 것도 아니고, 가장 정확하게 빗나가도록 찬 헛발질이다. 때문에 거기에는 빗나가도록 설정된 의도가 있다.
그 의도는 무엇일까?
바로 열등감의 보상이다.
한국형 관계론에서 서구의 근대적 개인의 개념을 비판하는 이유는, 서구를 비판하고 싶기 때문이다. 서구의 개인주의적 욕망을 비판함으로써, 그 서구의 문화에 잠식된 동양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기 때문이다. 동양은 서구와는 다르게 개인보다 더 진정한 관계를 위해 살아가는 신성한 전통을 갖고 있다면서, 서구에게 문화적으로 패배한 듯한 열등감을 보상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문화적 열등감이, 개인 대 관계[구조]라는 이분법을 만들어놓고, 개인의 자리에 서양을, 관계의 자리에 동양을 각각 배치함으로써, 후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담론을 구성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교적 사유가 개입되면 이 모든 것은 또 헛발질이 된다.
동양을 대표하는 깊은 종교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에서는 애초 관계를 부정한다. 관계는 표현 그대로 환상의 것이다. 한국형 관계론에서 개인을 실체가 아닌 것으로 다루며 오히려 관계를 실체적인 것으로 묘사하려고 할 때, 불교는 관계 자체를 실체가 아닌 허구로서 밝혀낸다.
해탈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연기작용으로 이루어진 관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것이 환상인지도 모르고, 관계에 중독되어 그에 집착되어 있는 것이 곧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의 원인이다.
즉, 관계가 고통의 원인이다.
그러니까 서양은 개인이며, 동양은 관계라는 이분법은 이미 불교로 인해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교주의자들은 곧잘 불교를 환원시키곤 한다. 유교의 핵심원리는 통합주의다. 모든 것을 자기의 틀 안에 넣어 자기의 덩치를 부풀릴 수 있는 환원적 부품으로 활용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비판하는 거대담론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제국주의다.
제국주의는 민족주의에서 시작된다.
모든 것을 민족의 틀 안에 넣어 민족의 덩치를 부풀리고자 하는 민족주의의 기획이 제국주의적 실천이 된다.
어떠한 민족이 이러한 기획을 실현하려고 하는가?
열등감을 가진 민족이다. 자기가 몸집이 작아서 약하다는 열등감으로 고뇌하는 민족이다.
그러니 이러한 열등감의 민족주의에 빠진 이들은 결코 통합 내지 통일이라는 개념을 포기할 수 없다.
한국형 관계론의 지지자들이 늘 남북통일을 외치며 우리는 한 민족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거라도 부품으로 모아야 조금이나마 덩치가 커질 수 있는 까닭이다.
한국형 관계론은 분명 이러한 민족주의의 소산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2차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의 상태를 되풀이하고 싶다는 의미다.
근대적 개인의 개념을 비판하며, 역으로 민족은 하나로 뭉쳐야만 영광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을 통해, 민족이라고 하는 추상적 구조체의 세력을 강화시키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게 민족의 제국주의적 확장을 꿈꾸는 것이다.
정말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동시에 대단히 폭력적인 발상이다.
이처럼, 시대의 큰어른들의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하여, 민족이라고 하는 추상적 구조체는 강조되고, 개인이라고 하는 사실적 존재는 억압되는 시대의 폭력 속에 우리는 놓여 있다.
실존철학이 지지하는 현대의 개인의 개념은 바로 몸이다.
억압은 언제나 이 몸에 대한 억압이다.
몸에 대한 억압을 다른 말로 악(惡)이라고 부른다.
선악은 추상적인 도덕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몸을 억압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악이다. 심리학적, 생리학적 악인 셈이다.
억압이라고 하는 악이 담고 있는 가장 쉬운 의도는 다음과 같다.
"너, 죽어."
개인의 몸을 억압한다는 것은, 개인에게 죽으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적인 개인이 죽어서 추상적 관계를 위한, 추상적 구조를 위한, 봉사와 헌신의 모범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악은 이렇게 행사된다.
한국형 관계론은 그 모든 아름답고 낭만적이며 온건한 포장지에도 불구하고, 개인에게 죽으라고 하는 이 악의 의미에 다름아니다.
실존적 존재론에서 묘사하는 개인이라고 하는 몸의 존재는 관계를 앞서 있는 것이다. 몸은 관계의 부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몸이 있어서 관계라고 하는 환상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몸은 무대고, 관계는 연극이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현상은, 연극이 펼쳐지지 않는 무대를 목격하는 것이다. 연극이 펼쳐지지 않아도 온전한, 때문에 그 어떤 연극으로도 손상되지 않는 무대의 경이로운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몸의 존재감이다.
이 몸의 존재감은 진실로 우주만큼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가장 개인으로서 가장 작은 먼지가 될수록, 그 작은 먼지가 우주만큼 거대한 위상으로 알려지는 그 역설의 놀라움이 있다.
즉, 개인은 더욱 개인이 되면 될수록, 스스로가 우주만큼 거대한 존재라는 존재론적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발견하게 된다.
가장 작은 개인은 가장 거대한 존재로 드러난다.
그렇게 개인은 실존적 존재로서의 자기 몸(自身)을 발견함에 따라, 우주의 실존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사실이 된다. 단 하나도 흘려보낼 수 없는 가장 귀한 사실이 된다.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이 도대체 왜 어떻게 존재하는지 너무나 놀랍기 때문에,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이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동적이고 감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이 더없이 소중해진다.
이 자리에 관계란 없다.
자기와 타자로, 늑대와 양으로, 토끼와 거북이로 분리될 수 있는 이분법적 관계란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자기 안으로 무수한 타자들이 통합되어 들어온 가장 거대한 자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는 커다란 자궁 안에서 모든 것이 용해되어 합일됨으로써 갈등없이 평온과 지복이 넘치는 황홀경(ecstasy)의 경지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모두가 자신과 같은 한마음 한뜻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유토피아를 의미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한 자아주의가 아니며, 그러한 제국주의가 아니다.
곧, 깨달음이 알리는 비이원의 현실은 그 어떤 통합주의와도 관계가 없다.
표현 그대로, 존재의 온전함은 관계가 없다.
관계가 없어도 개인이라고 하는 실존적 사실은 온전하다.
연극을 하지 않아도, 배우 역할을 하던 인간은 온전하다.
연극을 잘해야만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연극을 못하면 인간 미만의 것으로 추락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곧, 관계를 잘해야만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관계를 못하면 인간 미만의 것으로 추락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한국형 관계론은 완전한 환상이다.
관계라고 하는 개념에 완전성의 속성을 부여하고, 관계를 궁극적인 것이라고 믿으며, 그것을 숭배하는 환상이다.
특히 깨달음과 관련해서는 한국형 관계론은 가장 환상이다.
관계를 잘하면, 즉 연기를 잘하면 훌륭한 연예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훌륭한 연예인이 깨달은 이는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것은 연예인의 속성을 갖고 있는 이들뿐이다.
한국형 큰어른들이 큰어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연예인의 속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발달은 이러한 현상을 강화시켜준다. 훌륭하기 때문에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알려졌기 때문에 훌륭해진다.
물론 연기력의 훌륭함으로 인해 알려지는 일은 당연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연기력의 훌륭함이 어느새 존재적 차원의 훌륭함으로 탈바꿈되는 효과는 분명 미디어의 작용이다.
그렇다고 이 한국형 큰어른들이 연기를 하며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관계라는 연기를 한다. 관계를 잘하는 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연기를 잘하는 이라는 중립적인 의미다. 그리고 연기를 잘하는 일은 그의 존재적 차원의 위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그 의미다.
곧, 한국형 관계론의 유교적 도식에 따라 아무리 잘 발달한다 해도,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언술되는 인간의 자유를 더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한국형 관계론은 언제나 몸일 수밖에 없는, 즉 개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자유를 더 억압하는 방향성을 갖는다.
한국형 관계론은 인간에게 더 많은 관계의 그물망을 강제로 씌워, 그 속에서 질식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질식사한 이를 책임감이 많은 순교자로 예찬하기까지 한다.
시대착오적인 민족주의의 연극활동을 무리하게 요구받다가 결국 무대에서 죽게 된 배우의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다. 시대의 큰어른들이 곧잘 비판하는, 더러운 자본가의 욕망에 착취되어 죽게 된 노동자의 상황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상황이다.
한국형 관계론도 누군가의 욕망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성한 하늘의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작은 몸에 대해 열등감을 가진 이가 더 큰 관계의 몸을 꿈꾸던 욕망일 뿐이다.
그래서 관계라고 하는 것은 결국 중독의 기제다.
모든 중독은 자신을 망각하기 위함이다. 곧, 몸을 망각하기 위함이다.
관계라고 하는 더 큰 추상적 몸을 만들어 그것을 자기의 몸처럼 삼아 도취되곤 하는 이 현상이 사실은 가장 자아주의적인 것이다. 몸에 대한 열등감이 가득한 자아는 언제나 자기의 몸으로 삼을 군중을 호출한다. 즉, 자아는 포퓰리즘의 이유가 된다. 그리고 포퓰리즘은 연예인적 특성을 가진 이의 성공공식이다.
이것은 마치 엄마의 자궁 속에서 지켜지는 아이의 상태와도 같다.
즉, 한국형 관계론은 결국 모두가 착한 아이의 연기를 유능하게 소화함으로써 착한 아이 그 자체가 되어 저 이상적인 낙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외적인 표현으로 그것은 미래에 펼쳐질 유토피아지만, 그 실제적인 의미는 엄마의 자궁 속이다.
모든 열등감은 몸에 대한 열등감이며, 몸에 대한 열등감은 자기 존재에 대한 열등감이다.
아이들이 이러하다.
유교적 큰어른들의 본질이 실상 이러한 아이와 같다.
고전적인 무협지 같은 말투를 쓰는 애어른이 된다고, 그것이 아이가 아닌 것은 아니다.
애어른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어른을 연기하는 애다.
누가 어른을 연기하는가?
사자는 사자를 연기하지 않는다.
가장 어른이 아닌 이만이 어른을 연기하며 가장 큰어른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가장 몸을 소외하는 이만이 관계를 연기하며 가장 큰 민족의 몸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가장 존재적 열등감이 있는 이만이 깨달은 이를 연기하며 가장 깨달은 이로 보이고 싶어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인자한 미소로 종용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무섭기 때문이다. 혼자만 그 길을 가고 있으면 무서워서 다른 이들도 최대한 많이 자기가 가는 길로 와줬으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이 다시 한 번, 자아주의인 것이다.
이 자아주의에 의해, 자기와 타자가, 늑대와 양이, 토끼와 거북이가, 결코 서로 다른 길로 가도록 놓아두지 않으며, 늘 같은 길에서 얽혀야 하는 통합적 구조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발생한다.
꼭 더불어 같이 가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무섭고, 또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이다. 여차하면 토니 스타크가 아이언맨 수트를 호출하듯이 민족수트를 뒤집어 쓸 수 있는 까닭이다.
무아를, 곧 깨달음을 모르는 이 자아의 길은 이처럼 힘겹다.
무섭고 싶지 않은 자기의 욕망이 만든 길이나, 그 사실을 은폐한 채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대의를 걸고 더 많은 이의 참여를 독려해야 하기에 늘 힘겹다.
우리에게 너무나 힘겹다.
이것이 이처럼, 다른 누군가의 욕망을 위한 길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 또 그 길이 다만 힘겨운 길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이 한국형 관계론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남을 위해 사는 길이 모든 이를 위한 길이 된다."
이것이 한국형 관계론이 보급하고자 하는 가장 큰 환상이다.
사실은 이러하다.
"나를 위해 사는 길이 모든 이를 위한 길이 된다."
깨달은 모든 이는 시공을 넘어 한 목소리로 이와 같이 우리에게 전한다.
그러니 벗어날 수 있다. 아니 벗어나도 괜찮다.
남의 욕망을 채워주는 구조에 갇혀 나를 억압하게만 되는 그 관계론의 현실에서 벗어나도 진실로 괜찮다.
이제 억압받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나로서 존재해도 괜찮다.
그렇게 살라고 던져진 실존이다. 그렇게 알라고 깨달은 실존이다.
실존은 자유다.
유교적 큰어른들 앞에서도 결코 굽혀질 수 없는 인간의 큰 뜻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큰 뜻이다.
우주만한 크기로 우주에 새겨져 있는 가장 큰 뜻이다.
진실로 자유로워져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