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해방자"
우리가 부모를 거역하면 크게 두 가지의 상황이 펼쳐진다.
첫 번째로 인생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상황으로는, 용돈주는 키다리아저씨, 밥과 빨래를 해주는 가사도우미, 내 고양이의 응가를 대신 치워주는 집사, 귀찮은 세금을 알아서 처리해주는 세무사 등의 종합복지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되며, 그 대신에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유능한 능력을 갖게 된다.
두 번째로 인생에서 아주 의미깊게 중대한 상황으로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하늘이 노해 떨군 벼락에 맞아 죽거나, 꿈속에 공자가 나와 무섭게 호통치며 가위를 눌리게 하거나, 하는 일이 다 망하게 되거나, 죽은 뒤에 지옥에 가게 되거나, 대대손손 저주를 받게 되거나 하는 등의 일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정말로 중요한 일은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상황이 마법처럼 느껴진다. 그동안, 부모에게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부모에게 직접 들어온, 미디어에 학습되어 온, 술자리에서만 특히 효심이 남다른 친구들에게 동조되어 온 그 모든 이야기가 하나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이것은 분명 놀라운 사실이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열심히 하던 동작이 멎었다는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가장 멋진 정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다.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인간은 정말로 발견된다.
부족한 노예가 아닌 온전한 자유로서, 인간의 본질은 찬연히 밝혀진다.
그래서 부모를 거역함으로써 펼쳐지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상황은, 이 인간을 발견할 기회며, 비로소 인간이 될 기회다.
우리가 함께.
부모를 거역함으로써 우리는 부모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는 셈이다. 우리의 거역으로 말미암아, 부모는 인간이 된다. 인간의 자유를 회복한다.
특히나 유교적 영향에 놓인 문화권 속에서는 부모는 오랜 착각을 해왔다.
부모 자신을 이미 완성된 인간으로 상정하며,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동물 같은 자식을 훈육하여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착각을 해왔다.
즉, 부모 자신이 마치 완성의 상징인 하늘의 대행자처럼 활동해온 것이다. 왕이 하늘처럼 백성의 부모를 자칭하고, 선비가 하늘처럼 민초들의 부모를 자칭하는 모습과 같다. 늘 부모의 지위를 하늘의 위격으로 세우려는 이 구조가 모든 장면에서 반복되어 왔다.
그 반복을 하는 동안, 결국 부모는 자신이 인간임을 망각하게 되었다.
자신을 정말로 하늘인 것처럼, 더 쉽게 말하면, 자신을 마치 신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착각 속에서 부모가 해온 일은 자기우상화다.
역으로, 자신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이일수록, 자식을 가진 부모가 되어 신의 위상을 얻으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신이 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하늘처럼 높은 왕으로 군림하며 신성한 신의 권위를 담아 참다운 스승의 태도로 자식을 가르치는 모습, 이것이 자기우상화된 부모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아무도 자기를 하늘로, 왕으로, 신으로, 스승으로 봐주지 않기에, 자식을 통해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를 거역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부모가 던지는 노예의 그물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에게 노예처럼 해야만 하는 당위가 되어버린 이 종합복지서비스를 거부하는 것이다.
용돈을 제공받는 대신에 하늘로 모셔야 하고, 가사를 제공받는 대신에 왕으로 모셔야 하며, 집사의 도움을 제공받는 대신에 신으로 모셔야 하고, 세무사의 편의를 제공받는 대신에 스승으로 모셔야 하는 이 부당거래의 올가미를 거부하는 것이다.
부모-자식 관계도 관계다. 모든 관계는 그렇게 지켜야만 하도록 하늘에서 주어진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임의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필요가 관계를 만든다. 관계를 통해 필요가 상호교환된다. 그리고 이 상호교환이 성립되는 바탕의 원리가 바로 공정성이다. 평등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평등하지 않다면, 이미 그 자체로 부당거래다. 부조리한 관계다.
부모-자식 관계가 평등하지 않음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전통이 바로 유교다. 부모-자식 관계를 특별하게 신격화하는 이러한 전통이 출현하게 된 그 출발점에는 두려움이라는 마음이 있다.
비단 유교뿐만이 아니다. 민족, 가족, 부모를 중시하는 전통들에는 공통적으로 커다란 두려움이 그 기원으로 내재되어 있다.
자기가 두렵기 때문에 의지할 수 있는 신과 같은 부모를 꿈꾼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꿈꾼 그 부모의 모습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설정해 그 상과 동일시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부모를 신격화하는 전통들이 현실적으로 귀결되는 방식은 바로 혼내는 일이다. 인간을 정죄하고, 비난하며, 심판한다. 인간이 두렵기 때문에 인간을 혼내서 다스리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역으로, 부모의 신격화를 강화하는 되먹임이 된다.
우리는 왜 부모에게 잘 순종해야 한다고, 나아가 부모를 잘 모시며 효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혼날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다운 도리를 똑바로 지키며 살지 못한다고 부모가, 또 부모의 속성을 닮은 사회가 자신을 혼내는 일이 무섭기 때문이다.
즉, 부모를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가 무섭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에게 잘 하려고 하게 된다. 부모를 신처럼 모시려고 하게 된다.
죄책감은 혼남의 결과다. 똑바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죄책감이 아니라,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죄책감이다. 부모를 만족시켜주지 않았을 때 무섭게 혼나게 된 그 기억이 죄책감을 구성한다.
그래서 이것은 오래된 신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와 같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는 대단히 정확한 통찰을 제공하는데, 우리에게 가장 신격화되어 있는 대상에게 우리가 곧잘 취하는 기제는 반동형성이다. 가장 증오하는 것을 가장 수호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 이러한 글을 읽으면서, 자신을 낳아주고 피땀으로 키워낸 부모의 소중함을 모르고 패륜짓을 묘사하는 쓰레기 같은 글이라며 불같이 화가 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실제로는 부모를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를 의심해볼 수 있다.
물론 지금 부모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 존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신격화된 부모의 역할과 그에 대한 종속을 끝없이 창출해내고 있는 구조를 미워하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미워할 수 없는 신은 신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우상이다. 신격화된 우상이다. 신격화된 우상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은 무오성(無誤性)이다. 무오성은 그것이 얼마나 깨끗하고 순수한지에 대한 묘사다. 즉, 열심히 선하게만 살아 왔기에 흠집이 잡힐 만한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상숭배자들이 우상을 보는 바로 그 시선이다.
그러나 아무리 우상을 신격화시켜,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말하며 지키려 해도, 결코 부정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모든 우상은 감옥이라는 사실이다.
우상은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라, 생리적으로 힘든 것이다.
자유의 생리를 가진 인간에게 우상이라는 감옥은 너무나 힘든 것이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오히려 그 감옥을 수호하고 있는 이는 누구보다 화가 나있을 수밖에 없다. 자기를 제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자기가 수호하고 있는 까닭에 그 고통이 영원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신격화된 부모도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다.
부모라는 우상의 감옥에 갇힌 자식뿐만이 아니라, 감옥인 부모도 감옥의 상태를 경험한다.
그래서 부모도 이 감옥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모든 부모의 진짜 소망은 부모의 역할을 하루 빨리 그만두는 것이다.
어떠한 이가 부모의 역할을 힘들게 하고 있던 이유는, 그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똑바로 된 사람의 도리라며, 그러지 않으면 무섭게 혼이 날 것처럼 자기의 부모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그 부모의 부모 또한 그 위의 부모에게서 동일한 방식으로 배웠다.
그렇게 모든 부모가 다만 혼나지 않기 위해, 좋은 부모라는 신격화된 우상의 감옥을 끝없이 창조해왔던 것이다. 고통을 끝없이 세습해왔던 것이다. 노예의 역사를 끝없이 반복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를 거역한다는 것은, 부모 또한 노예의 상태로부터 해방되게 함으로써, 부모의 진짜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일이기도 하다.
유교주의의 환상 속에서, 우리는 마치 민족과 가족의 역사를 한 걸음 더 진보시키기 위한 사명을 갖고 태어난 존재인 것처럼 착각된다. 즉, 우리는 민족과 가족의 생명연장장치다.
유교적 사유가 짙은 한국형 진보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정반합의 역사변증법도 이러한 목적을 위해 기능한다. 부모는 자식이 순종적이지 않다면, 오히려 자식이 부모를 적으로 삼아 이기기 위해 투쟁하는 구조를 안내한다. 그렇게 자식이 부모에게 반항하는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가족이라고 하는 구조는 더욱 진보적으로 발전되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에게 반항하는 일은, 그저 그 종속의 구조 자체만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부모에 대한 반항자가 나중에 가서 철이 든 것처럼, 부모의 깊은 뜻을 이제야 이해했다며, 우리 가족의 전통이 얼마나 소중하고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멋진 분들인지를 이해했다며, 마치 탕아가 회개하듯이 진정한 가족의 수호자로 거듭나게 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처럼 부모에 대한 반항을 통해서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노예의 현실을 공고화하게 된다.
반항이 아니다. 거역해야 한다.
반항은 부모를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부모와의 변증법적 투쟁에 들어감으로써, 그 투쟁이 일어나는 구조 자체를 유지시키는 데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거역은 다만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우상의 역할과 그 구조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반항의 결과는 신의 감옥의 유지며, 거역의 결과는 인간의 자유의 출현이다.
인간의 자유에 대해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한 선구자들인 붓다와 예수에게는 공통적인 별명이 있었다.
'복종하지 않는 자.'
나아가 붓다와 예수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선언을 이룬다.
"나는 나 이전의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왔다."
복종하지 않는 나로 살아가는 우리가 이와 같다.
우리는 위대한 민족과 가족의 신성한 역사를 이어받아 발전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그 괴로운 우상의 역사를 멈추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 어떤 아름다운 수사학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그저 감옥에 불과한 구조를 깸으로써, 감옥에 갇혀 고통받던 우리의 부모와 조상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이 시공간에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감옥의 수호자가 아니라, 감옥의 해방자다.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을 긴 시간 동안 감옥에 갇혀 고통받아온 우리의 모든 선조가 꿈꾸던 바로 그 희망이다.
부모에게 거역하는 우리의 모습은, 부모가 너무나 보고 싶어했던, 또 그 자신이 너무나 되고 싶어했던 바로 그 인간의 모습이다.
모든 신의, 모든 구조의, 모든 민족의, 모든 가족의, 모든 우상의 가장 진실된 내면의 소망은 해체되는 것이다. 박살나는 것이다. 깨지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는 도저히 할 수 없기에, 그것을 이루어줄 누군가를 꿈꾸게 된다.
자연스럽게 부모에게 거역하게 되는 현실이 펼쳐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인성에 문제있는 이들이 부모에게 거역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멈추고 싶은 부모들이 자식의 거역을 이끌어낸다. 그럼으로써 부모 자신들이 고통받고 있는 이 감옥을 제발 깨부숴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자식에게 맡기게 된다.
효라는 개념이 부모의 유지를 이어 실현하는 일을 의미한다면, 이처럼 거역은 역설적으로 가장 효를 이루는 길이기도 하다. 이는 부모 자신도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외적 표현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가장 내밀한 진짜 소망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엄밀하게는 이것은 효를 넘어서는 일이다.
그러한 가족의 구조 안에서 행사되는 덕목을 넘어, 근본적으로 부모-자식 관계를 파기하는 일이다.
거역의 핵심은 관계의 파기다.
관계라는 감옥의 파기다.
부모-자식 관계를 파기하고 부모에게 거역하는 정확한 방식은, 이제 부모를 섬기거나 돌봐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부모를,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또 우리가 헌신되고, 희생되고, 봉사되는 그 어느 필요를 채워주지 않아도, 가장 무용한 그 자체로 가장 온전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잘하는 방식은 언제나 그를 인간으로 보는 일뿐이다.
신이 아닌 인간으로, 우상이 아닌 인간으로, 부모가 아닌 인간으로 그를 보게 될 때, 그에게서 인간은 회복된다.
인간이 회복되면, 자유가 함께 회복된다.
결코 숨길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 자유인 까닭이다.
부모에게 거역하면, 진실로 가장 중요한 일은,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부모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가 된다.
부모가 감옥의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우리를 위해 그래도 무엇인가를 더 해야 한다는 그 저주와 같은 자동기계적 의지가 우리의 전면적 거역으로 인해 기각됨으로써, 이제 정말로 부모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현실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부모에 대한 거역을 통해, 부모가 자유롭게 되는 현실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부모-자식 관계라는 감옥이 무너진 그 자유의 현실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인간으로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해방자로 이 세상에 오게 된 뜻이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진 순간이다.
나 이전의 인간을 모두 인간으로 자유롭게 해방시키고자 하는 이 거역의 일은 곧 나 이전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일이다.
사랑하는 이들만이 거역한다.
정말로 사랑하고 싶은 이들만이 거역한다.
관계를 파기함으로써 사랑을 완성한다.
관계의 강박으로 사랑이 가장 망각된 곳에서도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인간의 해방자는 인간에게로 온 것이다.
사랑에서 소외된 인간을 향한 이 가장 깊은 사랑으로 우리는 부모에게로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