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되어볼 기회"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는 주요한 사건들에 대해 드러내는 태도는 다음과 같다.
어떤 부모는 예찬하고 어떤 부모는 비난한다. 어떤 대통령은 예찬하고 어떤 대통령은 비난한다. 어떤 정치인은 예찬하고 어떤 정치인은 비난한다. 어떤 연예인은 예찬하고 어떤 연예인은 비난한다. 어떤 구루는 예찬하고 어떤 구루는 비난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예찬되는 대상은 더욱 빠르고 강력하게 신격화되며, 비난되는 대상은 더욱 빠르고 강력하게 악마화된다. 대상과 대상 사이의 간극은 천국과 지옥의 간극만큼이나 더욱 벌어져 있다. 분열되어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 분열이다.
그러나 이 분열은 사실 신과 악마라는 두 대상 사이의 분열이 아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선과 악의 최종전쟁의 형태를 띤 사건들을 경험하며 그 속에서 우리의 입장을 양심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처럼 촉구되는 성격의 분열이 결코 아니다.
심지어 이것은 두 대상도 아니다.
이 분열은 오직 하나의 대상에 의한 것이다.
바로 부모라는 대상이다. 대통령, 정치인, 연예인, 구루 등은 다 부모라는 상징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 부모라는 대상에 대한 우리의 양가적인 관점 및 태도가 분열을 만들어내는 핵심적 이유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외적인 분열의 사건들을 끊임없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곧, 분열의 사건은 분열된 우리의 자화상을 그대로 비추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이제 선택해야 한다. 가장 깊은 실존철학자 중 한 명인 베르자예프의 말처럼 '노예냐 자유냐'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이 '노예냐 자유냐'는 어떤 부모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결코 아니다. 즉, 도덕적이고 깨어있는 진보적 부모를 선택하게 되면 자유롭게 되고, 비도덕적이고 어리석은 보수적 부모를 선택하게 되면 노예로 종속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부모를 선택하는가, 선택하지 않는가의 선택이 우리에게 긴밀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목숨을 걸고 자식을 지키는 아이언맨처럼 신격화되어 있는 부모의 모습이나, 다른 한 쪽에서는 이기적인 내로남불의 모습으로 악마화되어 있는 부모의 모습이나, 그 둘은 정확하게 동일한 부모의 모습이다.
바로, 과잉된 부모상이다.
이 과잉된 부모상 앞에서 우리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며 분열되는 것이다.
분열은 왜 일어나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앞에서 분열된다.
그렇게 우리는 사실 가장 정직하게는 과잉된 부모를, 곧 부모의 과잉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그 앞에서 분열되는 것이다.
동시에 과잉은 언제나 결핍의 결과다. 결핍된 것만 과잉된다.
때문에 우리의 분열은 더 핵심적으로는, 부모가 결핍된 현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나아가 오늘날 분열의 모습이 폭발적으로 가열차게 드러나는 사건들은, 이 분열이 부모의 결핍 정도가 아니라 명백한 부모의 부재로부터 비롯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즉, 오늘날 분열의 사건들을 분열된 자화상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우리는, 부모의 부재가 정말로 사실이라는 것을 여실히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이제서야 우리는 부모, 스승, 큰어른, 참선비, 사부 등이 원래 부재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 모든 이름이 다 우상을 꿈꾸는 의도가 만든 착각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실존의 지평 위에 서게 되었다.
이제서야 우리는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우상의 지배에서 벗어나 정말로 사람이 되어볼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자유라는 본성을 스스로 확인하는 사람이 바로 나임을 온몸으로 실감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부모의 부재 자체가 우리를 분열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부모라는 이름이 절대적 우상이 되어 있기에, 그 우상이 부재하면 마치 우리가 살 수 없을 것 같은 착각이 우리를 분열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자신을 예속하는 주인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패닉에 빠지는 노예의 착각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이 착각을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해지하는 사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자신의 부모에 대해 또 자신의 자식에 대해 압박을 느끼며 양뱡향으로의 부모의 입장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가 크리슈나무르티에게 자유로워지는 법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 당신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보십시오. 그 순간 당신이 느끼게 될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부모라는 우상과 단절했을 때 자유는 세포의 차원에서부터 알려진다. 우리를 전율하게 한다. 정말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거대한 감동을 안내한다.
부모가 부재하면 우리가 똑바로 살 수 없다는 말은 완벽한 거짓말이다. 거짓말 중의 거짓말이며, 최고이자 최악의 거짓말이다.
그것은 그 우상의 지배력을 통한 이득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인류 최대의 거짓말이다.
곧, 부모는 집단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지배의 논리다. 그래서 부모라는 우상은 언제나 집단주의와 연결된다. 집단주의가 부모를 지지하고, 부모가 집단주의를 강화한다.
그 지지와 강화의 소재가 바로 아이다. 부모가 있어야 아이가 결핍되지 않고 온전할 수 있다는 이념이 부모라는 우상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구성되어 집단주의에 적용된다.
그러나 상담자 위의 상담자라고도 불리는, 심리상담계의 성자(聖者)로서 자주 회자되는 인본주의 심리학의 대가인 칼 로저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가 그 자신을 온전하지 못한 결핍된 존재로 경험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그의 부모 외에는 없습니다. 부모가 없을 때 아이는 가장 건강하고 자유로운 존재로 성장합니다. 스스로 존재의 빛을 냅니다. 모든 아이가 이러합니다."
우리에게 부모가 결핍됨으로써, 우리가 결핍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라는 우상이 결핍될 때, 오히려 우리는 온전해진다.
붓다와 예수가 공통적으로 자유의 길을 말하면서 가장 먼저 사람들에게 안내했던 것은 바로 부모라는 우상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이것이 '노예냐 자유냐'를 선택하는 가장 첫걸음이었던 셈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는 부모라는 우상을 섬기면서 자유롭기를 희구하는 일이다. 심지어는 부모가 유능한 능력과 풍요로운 자원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고 기대하는 일이다. 그것이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에 가장 큰 비극이다.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과잉된 부모상을 드러내는 이들은 사실 자식을 부모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것과 같다. 그 그림이 특정한 문화적 가치에 부합되게 아름다워 보인다고 그것이 노예가 아닌 것은 아니다. 즉, 노예의 주인이 노예를 과잉되게 보호한다고 노예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부모가 부재하면 아이들이 어떻게 사냐고, 부모가 도망가서 아이들이 비극을 맞게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유기하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 또한 과잉된 부모상이다.
부모 역할을 하는 이가, 자신에게 부과된 그 과잉된 부모상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결과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부모 역할을 하는 실제의 부모나 자식이나 모두 똑같이 이 과잉된 부모상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는 의미다. 과잉된 부모상이 실제의 부모와 자식을 모두 노예로 만든다.
반대로, 과잉된 부모상에 따라 행위하지 않는 이는 부모 역할에 있어 유연한 태도를 갖는다. 만약 자식이 어려서 보호가 필요한데 자신에게 설령 그 보호의 능력이 없다면, 그는 사회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채비가 되어 있다.
생존의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은 결코 바보가 아니며, 인간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들을 스스로 건실하게 구축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잉된 부모상을 가진 부모가 인간의 지원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아이를 소외시키는 이유는, 그렇게 외부에서 지원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부모로서 자기가 얼마나 못난 존재인지에 대한 반증이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즉, 지원을 받으면 자식에 대한 모든 것을 자신이 유능하게 책임져야 한다는 과잉된 부모상이 위협받는다. 그래서 그 과잉된 부모상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자신과 아이를 인간의 보호로부터 소외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모라는 우상은, 인간의 아이를 인간에게서 떼어 놓고, 자기에게만 예속되는 노예로 만들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증이 아니라 확증이다.
그렇게 과잉된 부모상의 세력이 활발하면 할수록, 우리는 인간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으로부터 분리되니, 우리는 사람이 될 기회를 상실해간다. 그래서 사람이 너무나 그립다.
'노예냐 자유냐'는 사람이 그립기에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물음이다.
자유롭고 싶다는 것은, 자유를 선택하고자 한다는 것은, 사람이 되기를 선택하고 싶다는 것이다. 사람을 다시 찾고 싶다는 것이다.
한 번만이라도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 시대에 기회가 왔다.
부모라는 우상이 실은 부재한 것이라는 사실이, 분열이라는 징후로 명백하게 알려지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분명히 기회를 얻었다.
사람이 되어볼 기회를, 가장 존귀한 사람인 내가 되어볼 기회를 얻었다.
'노예냐 자유냐'
부모의 노예로 예속된 집단주의일 것인가, 사람의 자유를 누리는 나일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