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없이 참 좋은 것"
고귀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단순하고, 가장 핵심적으로, 고귀하다는 것은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존하는 가장 큰 것은 바로 환상이다. 그 환상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바로 정신분석적 환상이다.
오늘날 거의 전세계적으로 코로나만큼이나 만연해있는 환상이 있다. 그 환상으로 인해 숨겨진 거악에 대한 무수한 음모론들이 창출된다.
그것은 바로, 평범한 소시민 같지만 실은 어벤져스처럼 숨겨진 초능력을 가진 부모가 천사처럼 바르고 착한 자식을 커다란 위험으로부터 구해내는 내러티브의 환상이다.
이 환상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시절이다.
이와 같은 환상을 활용해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부모 내지 부모의 조력자(어벤져스를 뒤에서 지원하는 닉 퓨리)처럼 위치시킴으로써 정권을 잡고, 사업가들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수호욕을 자극하고 경쟁하게 함으로써 이익을 발생시키며, 연예인들은 좋은 부모 밑에서 잘 자란 아이처럼 스스로를 포장해 인기를 증대시키고, 구루들은 부모가 자식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권위를 확보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환상을 구성하는 두 축, 유능한 부모와 선량한 자식 중 어느 하나의 역할을 맡아야 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종용된다. 역할이 수행되어야 환상이 유지될 수 있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정신분석은 대단히 교묘한 방식으로 이 환상의 유지를 조력하는데, 그것은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를 외부의 대상에게서 내부의 심리적 자아로 이행시키는 기획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정신분석은 외부의 실체적 부모를 추구하지는 않는 것처럼 도식을 구성하는 까닭에, 표면적으로는 마치 개인을 더욱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그 실상은 개인이 자신의 내부에 이상적인 부모의 환상을 만들어 그 환상과 동일시되는 삶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이상적인 부모의 환상을 '자아의 이상(ego ideal)'이라고 부른다. 이상은 환상이다. 자아가 품는 이 환상의 내용은 바로 참된 부모다. 곧, 자아는 참된 부모라고 하는 환상을 자기가 동일시해야 할 목표로 삼아 자기를 부모로서 실현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신분석에서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환상 중에서 가장 큰 환상인 정신분석적 환상의 정체다.
부모라고 하는 환상에 대한 의존을, 부모와 동일시되어 부모를 실현한 자기라고 하는 환상으로 치환함으로써, 그 의존을 더욱 내밀하게 공고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외적인 대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에게만 의존하고 있는 듯한 품새를 취하기에, 흡사 우리에게 정신분석적 환상이 독립적인 개인을 가능하게 한다는 착각을 유발한다.
그러나 전적인 착각이다. 외부에서 내부로, 또 실체적 대상에서 자기로, 그 의존의 대상이 위치한 공간이 바뀌었어도 그것이 의존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나아가 자기의 부모화가 이루어진 결과로, 자기가 여전히 부모라는 환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망각되는 까닭에, 의존은 은폐 속에서 더욱 강렬해진다.
이것이 부모에 대한 의존을 자기화를 통해 극복한 척함으로써, 오히려 부모에 대한 의존을 더욱 심화시키는 정신분석적 환상이다.
현대의 정신분석이 오컬트화됨에 따라 마법주문과 같은 개념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형식을 갖게 되었지만, 정신분석의 결론은 언제나 동일하다.
자기가 참된 부모가 되는 일, 이것만이 정신분석의 유일한 결론이다.
어떠한 수사학적 과정을 거치든 간에 정신분석에서는 이미 정해진 결론이다. '답은 정해졌으니 너는 참된 부모가 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결론이자 대전제를 채택하고 있는 심리상담의 접근들은 정신분석의 계통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정신분석이 아니다. 구분은 단순하다. 참된 부모라고 하는 환상을 추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이처럼 참된 부모라는 환상에서 출발해 그 환상과 동일시되어 환상을 자기의 모습으로 실현하려 하는 일이 정신분석이라고 할 때, 이는 이미 종교다.
"환상이 너를 구원하리라."
이러한 교리를 갖고 있는 종교에 다름아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의 성격이 교조적으로 곧잘 드러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고전적인 신이 죽은 현실 속에서 종교의 기능을 대신하려는 유사종교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정신분석의 구조는 유교와 유사하다. 둘 다 유사종교로서, 참된 부모라고 하는 환상을 구심점으로 삼아 천하통일을 이루려고 한다.
모든 인간의 참된 부모화, 이것이 정신분석과 유교의 유토피아다.
이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지금 전세계적으로 이 참된 부모의 환상이 창궐하고 있는 것이다.
약 80년 전에 우리가 이미 경험했던 현상이기도 하다.
"모든 권력을 은밀하게 독점하고 있고 자기들 뜻대로 세상을 조작하고 있는 저 사악한 유태인들로부터 우리의 선량한 아리안 자식들을 보호해야 해!"
히틀러는 가장 참된 부모가 되고 싶어한 인물이었다. 그의 꿈은 참된 부모로 말미암아 사악한 악마가 축출되고 천사같은 아이들이 안심하며 행복할 수 있는, 참된 부모와 그 자식들의 유토피아였다.
히틀러가 이러한 꿈을 꾸게 된 이유는, 그가 바로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누가 정신분석적 환상을 통해 참된 부모가 되려고 하는가?
아이다.
오직 아이만이 자기에게 잘해줄 참된 부모라는 환상을 꿈꾼다.
그래서 이러한 환상이 펼쳐내는 현실 속에서 가장 참된 부모인 척하고 있는 이는 사실 가장 아이다.
사막에서 가장 환상의 물을 갖고 있는 척하는 이가 가장 목이 마른 이인 이유와 같다.
정의롭고 인자한 아버지처럼 행세하는 정치인들, 자애롭고 신성한 어머니처럼 행세하는 구루들, 자식과 같은 백성들 걱정으로 잠 못이루는 선비들, 부모처럼 존경할 만한 시대의 큰어른들, 아이언맨 같은 부모의 본을 보여주는 SNS 셀렵들, 이들 모두가 바로 이 아이다.
자기에게 부모가 결핍되었다고 느끼기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자기가 제일 부모가 되려고 하는 이들이다.
그렇게 실은 부모가 결핍된 것은 자기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을 부모가 결핍된 자식 같은 대상으로 만들어 자기가 그들에게 부모 행세를 하려고 하는 기만적인 이들이다.
즉, 자기가 부모에게 의존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철저히 숨기며, 남들이 자기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어 자기의 힘을 확보하려는 권력적인 이들이다.
환상은 우상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유는, 우상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됨에 따라 힘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바로 그렇게, 부모의 결핍 속에 두려움을 느끼는 아이가 참된 부모라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이제 그 환상과 동일시된 자기에게 힘이 모이게 함으로써 그 힘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의도가, 이 정신분석적 환상이 작동하는 그 모든 이유다.
정신분석의 분석가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오늘날까지 왜 권력적이라는 비판에 노출되어 있는가? 분석가가 아무리 겸허하고 친절해도 왜 실제의 세션은 거미줄에 옭아매인 듯한 불편감을 자극하는가? 정신분석의 가장 큰 반동자인 실존상담은 왜 정신분석이 정신분석인 한 반드시 권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비판을 하는가?
정신분석의 기원과 그 목적이 권력의 쟁취인 까닭이다.
참된 부모는 권력의 상징이다. 게다가 그 권력은 아이를 수호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미명으로, 맹목적으로 정당화되기에 유리한 조건을 달성한다. 아무리 역기능적으로 드러나도, 가장 돌 맞지 않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권력의 형태다.
자기가 천재라고 생각하는 아이가 이러한 권력의 구조를 좋아한다. 리스크는 최소화하면서 가장 쉽게 권력을 담보할 수 있는 까닭이다.
즉, 지성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진 아이가 곧잘 참된 부모가 되기를 꿈꾼다. 같은 이유로, 지성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진 이가 곧잘 정신분석을 꿈꾼다.
때문에 한국과 같이 지성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화될 수밖에 없는 학벌사회는 정신분석적 환상이 자라나기에 매우 좋은 토양의 조건을 구성한다.
우리는 원래 의존적이기 때문에 의존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환상을 꿈꾸기에 의존적으로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적 환상을 실현해 참된 부모처럼 행세하는 이는, 사람들이 자기가 없으면 제대로 살기 어려운 의존적 존재들이기에, 자기도 불가피하게 참된 부모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이것이 기만이다.
사람들이 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권력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의존적으로 만든 것이다.
여기에 있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헌신욕이 아니라 권력욕이다.
가장 의존적인 아이가 꿈꾸는 것은 권력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가장 의존적인 아이는 자기에게 사람들이 의존하게 함으로써 권력을 쟁취하여 이제 자기는 의존에서 벗어난 고귀한 존재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그를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권력은 그에게만 집중된다.
불공정한 구조다.
정신분석의 내담자가 분석가에게 상담구조의 불공정성을 지적하는 일은 정확한 자각에 기인한 일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오히려 분석가는 내담자를 칭찬하며, 바로 그러한 모습처럼 이제 내담자 자신이 외부의 분석가를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의 분석가로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신분석은 자기에게 반동하는 소재까지도 참된 부모의 환상 속으로 어떻게든 유입시키려는 그 기만적 의도의 노력을 끝없이 경주한다.
부모가 의도적으로 자식과 싸우려는 이유는, 그 싸움 속에서 자식이 부모를 닮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
이 정신분석적 환상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이처럼 갑갑하고 지독한 세상이다.
참된 부모가 인간의 이상이 되어있는 현실의 실체는 홀로코스트의 지옥이다.
참된 부모와 선량한 자식이라는 구조에서 가장 소외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타자다.
이러한 정신분석적 구조에서 타자란, 참된 부모에게 포용되어야 할 또 하나의 가련한 자식이거나, 그 또한 참된 부모로 깨어나야 할 또 하나의 심각한 부모 후보일 뿐이다.
타자란 무엇인가?
'-가(이) 아닌 것'이다.
부모가 아닌 것이고, 자식이 아닌 것이다.
자기 안으로 통합되어야 할, 즉 자기화가 되어야 할 소재가 결코 아닌 것이 바로 타자다.
나아가 타자는 환상이 아닌 것이다.
타자는 실재(reality)다. 현실(reality)이다.
정신분석에서는, 특히 라캉과 같은 이는, 누구나 다 이 실재로 살 수는 없다고 말한다.
실재로 살 수 있는 이는 예수나, 아마도 라캉뿐이다.
즉, 탁월한 분석가로, 이른바 참된 부모로 성장한 이만이 그럴 수 있다.
물론 거짓말이다.
더 많은 이가 실재로 살 수 없다면, 실존철학 및 실존상담 그리고 선불교라는 전통은 성립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며, 그 맥은 이어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신분석이라는 종교전통에서 라캉이라는 선지자의 말씀을 따르는 일은 신도들의 자유이나, 사실이 그 말씀대로인 것은 아니다.
이 정신분석이라는 종교의 말씀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에구, 덜 성장한 사람들이 환상없이 실재로 사는 일은 불가능할텐데 가엾어서 어쩌누. 우리 애기 같은 사람들. 어차피 우리 애기가 환상을 가져야만 살 수 있다면, 이 엄마아빠가 조금 더 안전하고 좋은 환상을 만들어줘야지. 우리 애기, 걱정말고 엄마아빠가 만들어준 환상 속에서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란 뒤에, 나중에 너도 참된 엄마아빠가 되어 힘들어하는 다른 애기들을 위해 좋은 환상을 만들어주려무나."
이것은 전술한 것처럼 선지자 모델을 창조한다. 즉, 스승 모델을 창조한다.
정신분석적 환상은 이처럼 참된 부모와 같은 스승이 되어, 자기는 사실 다 알지만, 아직 성장하지 못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스승의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일을 미덕으로 삼는다.
더 엄밀하게는, 그 미덕을 빌미로 사람들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에게 힘을 약탈해 자기의 권력으로 삼는 스승 모델을 지향한다.
가스라이팅, 그루밍, 키잡, 이것들은 유독 정신분석가들에게서 자주 보고되는 역기능적 현상들이다. 정신분석이 은밀하게 권력을 추구하는 스승 모델을 지향하고 있는 한 생겨나는 필연적인 파생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깨달음의 관점에서 서술하면 이러하다.
"아주 큰 노력을 평생 동안 기울여야 얻는 것이 참된 부모로의 깨달음이며, 깨달은 이는 부모로서 무지한 이들에게 스승의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스스로 스승이 될 수 있을 때까지 인도해주어야 한다."
아주 쉽게, 이것은 많은 노력을 한 자기만이 그 노력의 결과로서 깨달았다고 보는 관점이다. 즉, 피라미드형 수행론의 관점이다.
그리고 선불교는 이 수행론을 기각하는 자리에서 출발하였다.
분석가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자기를 투명하게 만들어서 내담자의 욕망을 비출 거울이 되어준다는 식의 말까지 나오면, 이것은 이미 선불교의 정반대편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몸짓이다.
우리가 선불교라고 이야기하는 전통의 시조인 혜능은, 존재의 투명함이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하다는, 즉 우리의 노력으로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모든 것을 시작하였다.
소위 정신분석과 선불교를 연결하는 많은 관점이, 인도의 힌두교적 구루문화를 두루뭉술하게 선불교에 적용하여 이해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언어 너머의 실재, 진정한 본성, 이런 식의 언어를 유비한다고 정신분석이 선불교와 맥을 함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평생 자기 분석을 이루어가야 하는 정신분석의 방법론과, 그 방법론을 통해 이루는 참된 부모의 내적 실현이라는 정신분석의 목표가, 이미 그 방법론과 목표의 차원에서 선불교의 깨달음과 전혀 다른 것이라는, 오히려 반대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를테면, 선불교에서 말하는 살불살조는 단지 외부의 대상을 해체하고, 그것을 내면화시키는 일이 아니다. 즉, 외부의 실제적 부모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고, 자기 내면에 있는 인간의 이상과도 같은 참된 부모의 환상을 실현하는 일이 아니다.
바로 그러한 내적 이념으로서의 환상을 기각하는 일이 선불교의 일이다.
즉, 깨달음은 내 안에 진정한 것이 있다는 깨달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내 안에 진정한 것이 없다는 깨달음이다.
진정한 것이 없으니 지켜야 할 것이 없다. 진정한 것이 환상이었으니, 신기루와 같은 환상을 지키는 일을 하며 인생을 낭비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인류의 위대한 이상으로서의 참된 부모와 같은 것을 지키며, 또 그러한 참된 부모가 되어 이제는 참된 부모의 자식과도 같은 사람들을 지키며, 그렇게 오직 그 자신만이 홀로 두려워하는 아이이기에 만들어진 환상을 수호해야 할 의미가 전혀 없다.
선불교라면 오히려 더 단순하게 이러한 현실에 응답한다.
참된 부모를 향한 더 거대한 환상을 키워가는 일에 일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아이라고 생각하는군요?"
부모라는 환상을 꿈꾸게 된 그 원인인, 자기가 아이라는 환상에 직접적으로 접촉한다.
그리고 그 접촉으로 인해 알듯 모를듯 멍해진 상태에 더 깊이 접촉한다.
"아이인 자신을 사실은 참 좋아했군요?"
자신이 고귀한 존재인 줄을 몰랐던 아이가, 자기를 결핍된 아이로 착각해 그 환상과 동일시되어 있으면서, 그 속에서 다시 참된 부모라는 환상을 꿈꾼 것이다. 그리고는 이제 자기가 인류의 이상으로 가정되는 참된 부모가 되어, 사람들을 결핍된 아이로 보며 구원하려는 환상을 품게 된 것이다.
자기가 아이라는 환상, 참된 부모라는 환상, 사람들이 결핍된 아이라는 환상, 구원이라는 환상, 오로지 환상만이 가득한 이 구조에 대해, 선불교는 그저 다층적인 환상에 싸여 있던 이 존재가 다만 원래 그러하듯이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릴 뿐이다.
고귀하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라는 의미다.
그 어떤 환상에 의존하지 않아도, 그 모든 환상과 아무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참 좋은 것'이라는 의미다.
실재는 누구에게나 '참 좋은 것'이다.
그것은 언어적 환상을 포기한 이들만이 고행자처럼 발을 들이는 광야가 결코 아니다. 예수나 라캉만이 그 황폐한 공허함을 감내하면서도 더 탁월한 예지를 얻기 위해 가끔 들어갔다 나오는 고통의 장소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실재는 사랑만이 가득하다.
실재를 불교의 공(空)으로 비유한다면 아주 적절한데, 공을 뛰어난 사람들만이 버틸 수 있는 인내의 소재로 이해하는 것은 공을 체험하지 못한 이들의 착각이다. 공, 즉 실재는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인 비극의 소재가 아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이러한 복음성가의 가사는 실재를 은유한다. 실재는 사랑의 소재이지, 비극의 소재가 정말로 아니다.
정신분석의 만행은, 실재를 마치 무상성의 비극을 감내할 수 있는 훌륭한 이들만이 입장할 수 있는 영토처럼 묘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신에, 실재의 반대편에 참된 부모가 관리하는 유토피아를 세우고자 했다는 것이다.
즉, 거짓 낙원의 보급이, 정신분석의 최대의 만행이다.
실재를 비극으로 보는 것은 실재에 대한 두려움이 야기한 것이다. 실재를 두려워하는 것은 우상뿐이다. 우상은 실재로 인해 해체될 것을 언제나 두려워한다.
이와 같이, 정신분석적 환상에 기인한 참된 부모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은 자식의 상실이 아니라, 참된 부모라는 자기우상의 상실이다.
참된 부모가 실재를, 곧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이유는, 현실이 참된 부모를 위협하는 것처럼 경험되기 때문이다. "너 참된 부모가 아니잖아."라며 현실이 자기에게 말을 거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기회다.
실재로부터 우리에게 건네진 이 정직한 말이 우리가 무거운 환상의 무게로부터 해방될 기회다.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참된 부모가 아니다. 우리는 그 어느 환상이 아니다.
우리는 그 어느 순간에서도, 환상없이 참 좋은 것이었을 뿐이다.
그 어느 순간에서도, 우리는 고귀한 존재였을 뿐이다.
우리 자신이 가장 결핍되었다고 착각한 그 순간에서도, 우리가 그러한 우리 자신을 참 좋아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참 좋은 것'으로서의 우리의 면모는 즉각 회복된다.
그리고 정말로 다 알게 된다.
'참 좋은 것'인 우리가 경험한 그 모든 것도 '참 좋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부모가 아니었고, 아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참 좋은 것'이었다.
둘도 없는 것이었다.
둘이 아닌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에게도 나는 '참 좋은 것'이었다.
'참 좋은 것'을 가장 사랑한 이가, 그 자신도 '참 좋은 것'으로서 '참 좋은 것'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현실, 이것이 실재다.
실재는 사랑으로만 가득하다.
환상없이 '참 좋은 것'으로만 가득하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렇게 노래한다.
"가서 사랑하라, 무엇에도 의존하지 말며(Go love without the help of any Thing on Earth)."
그렇게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순간 속에서, 그 모든 영원으로.
사뿐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영원히 사랑한다."
부모도 아이도 아닌, 고귀한 자의 음색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