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에서 배우는 평형의 원리"
우리가 힘든 이유는 늘 적을 두고 싸우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의적인 의미다.
우리는 어느 한 입장에 적(籍)을 두고 소속된 뒤, 반대의 입장을 적(敵)으로 두고 그것과 싸운다. 바로 그렇게 자신이 적을 두고 있는 입장을 맹렬하게 수호하며, 자신이 적으로 두고 있는 입장을 가열차게 공격한다.
싸운다는 것은 에너지가 이동한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이동한다는 것은 현재 평형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싸우는 동안 늘 우리는 평형의 상태가 깨어져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늘 불안하다. 안심되지 않는다.
우리를 위협하는 적이 있기 때문에 안심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을 만들어 싸우고 있기 때문에 안심되지 않는 것이다.
안심은 "아, 살 만하다. 이제 괜찮다."라는 느낌이다. 이 느낌은 평형의 상태가 주는 느낌이다. 때문에 안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평형의 상태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평형의 상태를 이루기 위해 흐른다. 이것은 살아있는 몸으로서의 유기체의 지혜다. 생명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것이 조금 어렵다.
인간은 생명이면서 다만 생리(生理)만을 따르지 않고, 생명작용과는 별개로 작동하는 언어작용의 논리(論理) 또한 따르기 때문이다.
생리는 둘이 아니나, 논리는 둘이 된다. 언어의 구조는 상대적인 비교항을 설정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까닭이다.
하나면서 둘인 현실을 인간은 동시에 살아간다. 여기에 인간의 딜레마가 있다. 이 딜레마를 모순의 갈등으로 여길 때, 인간은 둘의 논리를 더욱 추구하며 결국 적을 만들게 된다. 반대로, 이 딜레마를 역설의 조화로 이해할 때, 인간은 하나의 생리를 회복하고자 하게 된다.
바로 삶을 신뢰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그렇게 인간에게 경험되는 삶이라고 하는 매일매일의 사건들이, 둘로 나뉘어 갈등하지 않는 하나의 평형의 상태로 인간을 이끌어줄 것이라는 신뢰를 갖게 된다.
여기에서 삶이라고 하는 것을 '내부현실'과 '외부현실' 사이의 순환적 작용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림으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우리는 외부에서 경험한 사물의 작용을 내부로 투영한다. 이것을 통상적으로 '마음'이라고 부른다. 마음은 곧 우리 안에 펼쳐진 내부현실이다. 우리 안에 구성된, 외부의 세계와 동일한 형태의 모사물이다.
그래서 마음 자체가 곧 가상현실과도 같다. VR기술이 따로 요청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자체가 이미 VR기술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이 내부현실은 언어에 의해 축조되고 확장된다. 언어로 만들어진 꿈의 현실이다.
이 꿈의 현실에서 중시되는 원리는 바로 관계다. 언어 자체가 애초 관계의 파생물이기도 하다. 그렇게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의 자기의 입장을 언어로 구성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인격이다. 심리학적 인격은 오롯한 언어적 구성물에 다름아니다.
우리가 좋은 인격이라고 말하는 것을 분석해보면, 전부 다 관계적 가치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관계를 잘 기능하게 하는 특정한 언어들을 가치로 삼아 실현된 결과물이 바로 인격의 정체다.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본질은 허구다.
그러나 허구가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허구는 아름다움을 위해 기능하는 한 모든 목적을 다한 것이다. 인격은 바로 그 아름다움의 정확한 소재다. VR게임에서 아바타를 아름답게 만들듯이, 우리는 인격이라는 개념으로 이미 그와 동일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내부현실, 마음, 꿈, 관계, 가상, 인간, 인격성은 전부 다 아름다움의 소재다. 그것이 아름답기에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지, 그것이 실재적인 진리이기에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즉,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럭셔리한 소재다. 아름다움을 향하는 이들이 누리고자 펼쳐내는 미(美)의 소재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의 소재의 반대편에 있는 세계, 외부현실, 사물, 사실, 실존, 실재, 자연, 무인격성은 바로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온전함의 소재다. 우리를 받쳐주고 있는 반석과 같이 든든한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저렴한 인격과 언어적 가치를 드러낸다 하더라도, 우리의 존재는 이 안심의 소재에 의해 보전된다.
아주 쉽게, 우리가 언어적으로 규정된 인간의 자격을 벗어난다 할지라도, 우리는 온전하게 존재한다. 누구도 우리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 자체를 막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우리의 한 축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다른 한 축에는 온전함이 있다.
전술한 것처럼 이 두 축을 모순으로 지각할 때는, 아름다움의 논리가 온전함의 생리를 죽이려 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온전하지 못한 존재인 것처럼 경험하게 된다. 늘 죄책감에 싸여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를 주문처럼 암송하는 자동기계가 된다.
그러나 이 두 축을 역설로 이해하면, 우리는 아름다움과 온전함을 동시에 얻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존재가 이미 온전한 데다가, 아름다움으로까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붓다를 나타내는 한자어인 부처 불(佛)이 뜻하는 바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아닌 것'이다. 즉, 붓다로 상징되는 깨달은 이는 아름다움과 온전함의 두 축을 동시에 살아가는 이다.
바로 내부현실과 외부현실을 동시에 살아가는 이다.
그런데 이 두 현실을 동시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 현실 사이에서 평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평형은 양쪽에 동일한 것이 존재하는 상태다. 즉, 내부현실과 외부현실이 동일하게 상응하는 것이 평형이다.
이것을 심리상담의 개념에서는 '일치성'이라고도 부른다.
이 일치성이 파괴된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내로남불이다.
내로남불은 아주 쉽게는 내부현실을 외부현실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하게 가치매김하고 있기에 생겨난다. 즉, 언어 자체가 허구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언어적 가치로 외부의 실재를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할 때 생겨난다.
이를테면, 정의로운 인격과 같은 것이 반드시 내로남불을 야기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이러한 인격을 추구하는 이는 자기의 내부현실은 보다 정의로운 것으로, 세계라는 외부현실은 보다 불의한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내부현실과 외부현실의 불일치는 점점 더 심화된다.
곧, 내부현실에만 적(籍)을 두고, 외부현실을 적(敵)으로 삼아 싸우는 일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기가 만든 허구에 근거해서, 사실을 공박하려는 모습과도 같다. 자기의 내부현실에서는 지구가 평면이기에, 지구가 구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가상이 실재를 이기려 하는 이 경향성은 오늘날 음모론이 득세하고 있는 사회적 현상들로 잘 설명된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1960년대의 플라워 무브먼트와 비견될 만하게,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가상현실을 꿈꾸고 있는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그 당시의 히피들은 적이 없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꿈꾸었던 반면, 오늘날의 가상현실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적을 설정해 그 적과 싸워 이김으로써 성취해내는 영웅의 아름다움을 꿈꾼다.
서브컬쳐계에서의 이세계물의 범람은 사실 이 영웅적 서사로 구성된 메타버스의 추구가 야기한 부수적 현상이다.
오늘날 이세계물에서 묘사되는 전형적인 영웅상은, 평범한 소시민이 신적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무한한 자원과 기술을 지원받게 됨으로써 자신이 속한 세상의 규칙을 전복시키고 오히려 그 규칙 위에서 권능을 행사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영웅상은, 코인이라고 하는 네트워크의 언어가 담지하게 된 가치를 통해 힘을 얻고자 하는 이 시대의 자화상과도 맥을 함께한다.
요는 지금 이 시대에서 언어는 마치 주문과도 같이 더욱 마법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고, 그에 따라 내부현실[가상현실]의 비중 또한 비약적으로 증대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평형의 붕괴는 가속화된다.
외부현실이 적으로 가정되는 만큼, 나아가 무시되는 만큼, 불균형은 심화되며 우리는 더욱더 불안해진다.
이러한 불안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아주 정확한 직감인데, 내부현실의 논리로 외부현실의 생리를 파괴하려 할수록, 그 끝에 남는 것은 아름다운 유토피아가 아니라 전체 현실의 몰락인 까닭이다.
내부현실과 외부현실은 역설적 쌍의 구조를 갖는다. 하나가 패배하면 다른 하나가 승리하는 구조가 아니다. 하나가 몰락하면 같이 몰락하는 구조다.
이를테면, 몸을 떠나 네트워크에 마음을 이식하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식의 망상은 말 그대로의 망상이다. 몸을 상실한 마음은 그 순간 같이 상실된다.
왜냐하면,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 서술하건대 애초 마음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몸의 생명작용이 낳은 부산물이다. 실체는 없지만 작동하는 것처럼 관찰되기에, 그 허구적 소재에 그저 마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그래서 마음의 속성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도 말한다. 실제로는 텅비어 있는 것이지만, 묘하게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양파와도 같다. 하나의 형상을 갖춘 것 같지만, 막상 파헤쳐보면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언어의 속성이며, 언어에 의해 구성되는 구조의 속성이다. 관계의 속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의 허구성을 가진 내부현실로부터 그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것이, 그렇게 외부현실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실존(existence: 밖에 서다)이다. 그래서 실존은 관계의 반대어다.
외부현실을 향한 실존의 결과는 존재감의 충만한 실감이다. 관계가 근본이 아니라 이 존재감이 근본이다. 존재감의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는 관계라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즉, 외부현실이 있기에 내부현실이 그에 의존하여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부현실에 대한 감수성의 회복이다. 그럼으로써 내부현실에만 과도하게 편중되어 있던 무게를 덜고 평형을 찾을 필요가 있다.
선(禪)은 분명하게 이 지점에서 큰 이득을 제공한다.
선이 고요할 선(禪)자를 쓰는 이유는 바로 평형의 원리를 가리키기 위함이다. 평형이 깨진 것은 고요하지 않다. 평형을 이룬 것이 고요하다. 고요해서 안심된다.
선에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단순하다.
우리가 하나의 언어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을 때 '반드시' 그 반대의 가치도 함께 추구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더 많이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더 많은 불의를 세상에서 목격하게 되는 것과 같다. 세상에 불의한 일이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라, 그가 '정의/불의'라는 마음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에 불의가 더 많이 창조된 것이다. 즉, 불의의 창조자는 바로 정의를 추구하는 그 자신이다.
그러나 정의를 추구하는 이는 자신이 불의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의 내부현실에는 불의가 없는 것처럼 경험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자기의 내부현실은 외부현실보다 우월하다고 그는 간주하고 있는 까닭이다.
바로 이 지점이 선이 공략하고자 하는 지점이다.
내부현실에는 불의가 없고 외부현실에만 불의가 있는 것처럼 그가 행세하고 있다면, 선은 그 주체에게 외부현실의 그림과 똑같이 내부현실의 그림을 만들 것을 요청한다. 곧, 불의를 내부현실로 초대하는 것이다. 내부현실을 주관하는 자기 자신이 불의한 자라는 것을 그저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양쪽의 현실의 그림이 같아지면 평형이 이루어진다. 갈등이 멎고, 투쟁이 멈춘다. 그리고 알게 된다.
자기 내부현실을 절대적 진리로 삼아 외부현실을 평가하려 한 그 시선만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불의를 창조한 자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불의가 보이지 않게 된다. 그 모든 것은 다 정의라는 언어적 가치를 추구하던 자신이 펼쳐낸 허구적 연극이었을 뿐이다. 그 연극이 끝난 자리에서는 교류분석가인 에릭 번이 말하듯, 자신도 괜찮고 상대도 괜찮은(I'm OK, You're OK) 하나의 현실만이 남는다.
우리가 그동안 적(籍)을 두었던 것은 우리가 그 아름다움에 반했던 한 편의 판타지소설이다. 그 판타지소설을 진리의 경전으로 삼아 마치 "이 경전을 따르지 않으면 너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듯이 외부현실의 사람들을 적(敵)으로 두고 연극을 강제해온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이 영웅이 되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악역을 강요해온 것이다.
선(禪)은 다만 영웅뿐만이 아니라 그 악역 또한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어떠한 내부현실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외부현실의 정당성도 함께 주장해야 한다. 두 현실을 함께 살려야 한다. 이것을 선의 대법(對法)이라고 한다. 평형을 이루는 원리인 셈이다.
평형을 이룬 결과로 우리는 전술한 것처럼 아름다움과 온전함을 함께 얻게 된다. 아름다운 온전함이라고 해도 좋고, 온전한 아름다움이라고 해도 좋다. 한 단어로, 그것은 바로 자유다.
선의 평형의 원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를테면, 내부현실에서 자신을 마냥 예쁘다고만 생각하는 이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예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 즉 외부현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예쁘다는 내부현실의 논리를 진리로 믿으며, 그는 늘 외부현실의 미천함에 적대감을 갖는다. 그리고는 외부현실에 지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다.
즉, 그는 외부현실에서 보이기에 늘 예뻐 보이려는 의지로 일관된다. 그렇게 자신의 내부현실을 강건하게 유지함으로써, 언젠가는 외부현실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졌어. 네가 제일 예뻐."라는 말을 세상으로부터 듣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현실의 누군가는 그를 예쁘지 않게 볼 수도 있다. 그러한 자유가 지금 폐색되어 있다. 역으로 말하자면, 그는 외부현실의 모두가 자기를 예쁘게 봐야만 한다는 독재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독재자는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독재에 스스로도 억압된다.
그러한 그에게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외부현실에서 누군가가 그를 못나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 가능성을 내부현실로 적극 유입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 난 못났구나."라는 표현이 내부현실에서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는 이제 예쁠 수도 있고, 못날 수도 있는 자유가 개방된다. 양쪽의 현실에서 똑같이 개방된다. 양쪽의 현실이 똑같이 평형을 이룬다.
그리고 그 평형 속에서 이해하게 된다.
아무리 자신이 예쁘게만 보이려고 모든 힘을 다 쓴다 할지라도, 자신을 예쁘게 보는 누군가가 있다면 자신을 못나게 볼 누군가 또한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사실과, 결국 그 모든 평가와 관계없이 자신은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예쁨/못남'이라는 언어의 저주에서 비로소 해방된 것이다.
자유롭게 그가 원하는 옷을 입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그러면서도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아가 정말로 그가 그 자신인 것을 아름답게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실로 아무 것도 아닌 일이다.
자신이 내부현실에서 '예쁨'만을 진리로 삼고 있다면 외부현실에 있는 "아, 못났다."를 끌어오는 것뿐이며, 반대로 자신이 내부현실에서 '못남'만을 진리로 삼고 있다면 외부현실에 있는 "아, 예쁘다."를 끌어오는 것뿐이다. 그렇게 두 현실이 서로 동일한 요소를 갖추어 평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뿐이다.
그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는 창대하다.
우리 자신의 예쁨 및 못남과는 아무 상관없이, 우리는 일단 온전해지고 또한 아름다워진다. 자유로워진다.
이 세상이 살 만한 세상이 된다.
적(籍)이 없으니 적(敵)이 없고, 적적하지가 않게 된다.
존재의 안전감과, 그 안전감 위에서 꿈꾸어내는 희망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그리움이라고 부를 바로 그것이다.
내부현실과 외부현실의 평형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모르는 속에서도 늘 그 현실들 사이를 순행하고 있는 바로 삶에 대한 그리움이다.
삶은 참 좋은 것이었다.
산다는 건, 참 좋았다.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안심하며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