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력이 강한 아이와 정서력이 높은 어른"
우리는 정신력이 약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을 괴롭히지 않는다.
정신력이 강하다는 것은 고문받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즉, 자기를 괴롭히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자기를 괴롭히는 데 익숙한 이는 반드시 타인도 괴롭히게 된다.
나아가 그 괴롭힘에 대한 인내의 기제를 정신력이라는 이름으로 예찬하기까지 하고 있다면, 타인에 대한 괴롭힘 또한 미덕이 된다. "너의 성장을 위해." "다 널 위한 거야." "이렇게 해야 네가 제대로 사람될 수 있어."라는 표현들로 타인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게 된다.
인내의 전문가들은 본질적으로 고문의 전문가들이다.
버티며 사는 일을 예찬하는 자들은 본질적으로 가학을 즐기는 쾌락주의자들이다.
시대의 큰스승 내지 민족의 큰어른이라고 곧잘 불리는 이들 중에는 이러한 폭력배들이 많다.
겉으로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기에, 또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 너그러운 평상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그 본질이 아주 우아하게 은폐되어 있지만, 이들이 드러내고 있는 마음은 노골적인 분노며 그 분노에 의해 파생되는 폭력이다.
이 위대한 스승처럼 행세하고 있는 분노와 폭력의 군주들이 하고 있는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억압이다.
이들은 자기에게 경험되는 정서가 낯설고 또 부담스러운 것이기에 그것을 억압하려 한다.
그리고는 정서를 잘 다스려서 억압하는 일이 어른의, 깨달은 이의, 훌륭한 인격의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자기정당화를 위해 만들어낸 논리다.
이들에게 정서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미천하고 수준낮은 것이며, 그 대신 추구되어야 할 진정한 것은 바로 지성이다. 고귀한 지성의 힘으로 저급한 정서를 잘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 이들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이다.
즉, 이들이 신봉하는 정신력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정서를 억압할 수 있는 지성의 힘이다.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로는 주지화 경향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지화 경향성은 미발달된 개인이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특성이다.
심리학적 발달의 핵심은 자각이다. 자각이란 현재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수용하며, 이해하는 것이다.
정서라는 개념으로 크게 아우를 수 있는, 느낌, 감각, 감정, 분위기, 촉 등이 바로 자각을 안내하는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즉, 정서가 잘 발달된 이일수록 자각의 정도가 높다.
이 말은, 정서가 잘 발달된 이일수록 개인으로서 잘 발달된 이라는 의미다.
지성의 발달은 AI의 조건이다.
정서의 발달은 인간의 조건이다.
아주 단순하다.
우리가 잘 완숙한 인간으로서의 성인과 아직 미숙한 아동을 구분하는 기준은 지성이 아니라 사실 정서다.
정서가 잘 발달된 이는 정서를 잘 억압함으로써 통제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정서를 잘 표현한다. 정서의 표현이 자유롭다.
자유롭다는 것은 유연하다는 것이다. 또한 유연하다는 것은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서가 잘 발달된 이는 막힘없이 잘 흐른다. 고정된 형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뻣뻣하게 고집하지 않고, 자유로운 자신의 모습을 개방하며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이처럼 정서가 잘 발달된 이, 즉 정서력이 높은 이는 정신력이 약하다. 고집하며 버티지 않는다. 쉽게 구부러진다. 인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고문하지 않는다. 때문에 타인을 고문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서력이 높은 이의 옆에 있으면 우리는 평안한 느낌을 받게 된다. 정서력이 높은 이는 타인을 고문함으로써 그 타인을 자기의 뜻대로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의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정신력이 강한 시대의 큰스승들의 옆에 있으면, 우리는 왠지 모르게 화가 나게 된다. 그 큰스승들의 얼굴은 온화해보일지라도, 우리의 가슴 안에는 자꾸만 답답한 기운이 차오른다. 그런데 큰스승들의 미소를 보면 이 화가 그들에게서 유발되었다는 것을 차마 믿기에 어려운 까닭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화의 소재로 착각하거나, 큰스승들이 비판하는 더러운 세상을 화의 소재로 착각하게 된다.
진실로 착각이다.
이것은 그저 큰스승인 척하는 이들이 자기의 지성적 정신력으로 억압한 화라고 하는 그들의 정서를, 그 앞에 있는 우리가 대신 경험하게 된 것뿐이다. 억압은 자기 안으로만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억압한 것은 반드시 밖으로 나가 타인에게 전이된다.
이는 마치 자기집의 쓰레기를 남의 집 마당에 투기하는 모습과 같다. 시대의 큰스승들, 민족의 큰어른들이라고 하는 많은 이들이 하는 일은 바로 이 쓰레기투기다.
자기에게 소화되지 않는 정서를, 자기는 우아한 척하며 남들에게 떠넘기는 일이다.
이를 더 표면적인 형태로 묘사하자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우리를 괴롭히며 화가 나게 하는 이를, 우리가 우리의 스승으로 삼고 있는 모습과 같다. 그리고는 하나의 허수아비를 세워 그 허수아비에게 스승으로부터 받은 화를 대신 쏟아부으며, 스승을 열렬하게 수호하고자 하는 모습이다.
이처럼 사실은 가장 인간으로 미발달된 이를 가장 발달된 인간으로 착각하며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큰스승들, 민족의 큰어른들이 스승으로 평가되는 주된 이유는, 이들이 유교적 가치를 만족시키고 있는 까닭이다. 바로 이상적인 유교적 인물상인 선비의 특성을 보이는 까닭이다.
1. 감정을 인내하며 지성으로 사건을 처리한다.
2. 예의의 형식을 잘 체화하여 정서적으로 불편한 인간관계에도 능수능란하다.
3. 자신의 감정을 잘 숨김으로써 원하는 일을 성취해낸다.
4. 자신의 합리적 이성으로 목적화한 가치를 이념적으로 추구한다.
5. 감정적인 이들을 자기의 밑으로 보며 그들을 잘 다스리려고 한다.
6. 자신의 지성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 고통을 감수한다.
7. 올바른 지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모든 이가 함께 힘든 길을 걸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8. 충분한 지성적 능력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해 열등감과 죄책감을 갖는다.
9. 공감되지 않지만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공감을 연기한다.
10. 과장된 연극적 정서와 쇼의 표현을 즐긴다.
이러한 선비의 특성들은 그대로 사이코패스의 특성들이다.
지성을 강조하고, 그 지성이 중심이 된 정신력을 강조하는 접근은, 다소간에 사이코패스적 경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이다.
나아가 선비와 사이코패스를 공통짓는 결정적인 핵심은 바로 이들의 심리적 본질이 아동이라는 것이다.
지성적으로 머리만 커버린,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몸만 커버린 아동이다.
그러나 지성적 정신력이 성인의 조건이라고 간주하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기에, 이에 따라 자기들이 어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아동이다.
이와 같은 아동의 특성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기에 생겨나는 화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즉, 화라고 하는 정서를 소외시킴으로써 정서가 미발달된 채, 이러한 아동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려는' 의도만을 남긴다. 그리고 그 의도를 지성의 힘으로 실현하려고 한다. 정신력의 힘으로 완수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백화점에서 갖고 싶은 장난감을 발견한 일반적인 아동은 울고, 호소하고, 떼쓰는 형태로 그의 정서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 정서미발달의 아동은 그러한 정서표현을 억누른다. 그리고는 아랫턱을 꽉 다문 채, 부모의 말을 형식적으로 따르기는 하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그러면서도 자기에게 어떤 것이 필요한지는 말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버티고 있을 뿐이다.
부모가 자기의 욕구를 눈치채서 자기 앞에 자기가 원하는 재화를 갖다 바치기 전까지, 그렇게 부모를 이기고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려는' 정신력의 승부를 펼칠 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부모에게서, 또는 주변인들에게서 몇 번의 성공체험을 이룬 아동은, 이제 이 정신력의 힘을 인생의 공식으로 채택하게 된다.
그러면 누가 자기를 비난하든, 내로남불이든, 그러한 것들은 이 아동에게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아진다. 그저 끝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자기가 이기는 것이다. 자기가 정신력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삶을 살아온 아동이 생물학적인 어른이 되어, 인내의 전문가가 되어, 또 고문의 달인이 되어, 이제 이 시대의 큰스승으로, 민족의 참어른으로 칭송받기에 이른다.
지독한 습성이 유독한 대기가 되어 사회에 가득찬다.
숨이 막히게 된다.
숨이 막혀 화가 나게 된다.
우리는 코로나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며, 부동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전세계적인 경제불황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미발달된 것이 가장 발달된 것처럼 행세하는 사이비의 현실 속에 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정신력을 통해 고집스럽게 버티며 우격다짐으로 자기의 뜻만을 진리처럼 관철시키려는 사이코패스의 현실 속에 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그렇게 정서적 교감이 거의 불가능해진 대기 속에 놓여, 누구도 우리의 마음을 알아봐주지 않기에, 그 마음에 상냥하게 접촉하려 하지 않기에, 그 지독한 소외감 속에서 이 세상에 아무도 우리의 편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어, 이토록 화가 나는 것이다.
자기에게 느껴지는 정서를 자각한다는 것은, 곧 자기의 마음을 자각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자각할 수 있는 이만이, 타인의 마음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정서적으로 잘 발달된 이만이, 타인의 마음을 정말로 이해하고, 그 마음에 접촉할 수 있다.
정서적으로 잘 발달되려면, 정신력이 약해야 한다.
지성적 정신력을 절대적 가치로 놓고 그것만을 숭상하며, 더욱더 지적으로 뛰어나고 잘 버틸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을 가진 모습을 추구하는 일을 그만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그저 미발달된 아동 상태의 지속일 뿐이다.
계속 아동이고자 하는 고집일 뿐이며, 곧 아동의 고집일 뿐이다.
전술한 것처럼, 모든 심리학적 발달론의 핵심기제는 자각이다. 그런데 이 자각은 결국 유한자로서의 자기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자각을 안내하는 정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기계가 아닌, 필멸할 몸을 가진 유한자이기에 경험하게 되는 소재다.
아동은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자각함으로써 성장한다.
즉, 아동은 자신이 필멸할 몸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성장한다.
자신은 AI가 아니다. 지성의 힘으로 불멸과 전능을 꿈꿀 수 있는 환상의 산물이 아니다.
자신이 유한한 만큼 자신은 살아있는 존재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만큼이나 이 모두는 유한한 만큼 살아있는 존재다.
이 유한성의 자각이야말로, 아동이 자기폐색적인 왕좌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러 갈, 그렇게 처음으로 사람이 될 기회를 얻게 되는 순간이다.
공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그때그때의 감정을 나누는 일이 아니다.
공감의 핵심은, 우리가, 바로 사람이라고 하는 이 존재가 반드시 죽게 될 유한자라는 사실에 대한 상호적 이해다.
필멸할 사람의 운명을 보는 자는, 그 사람에게 고통을 안기려 하지 않는다. 고문하지 않는다. 괴롭히지 않는다. 자기의 이득을 얻기 위해 지성적인 획책을 꾀하는 도구로 삼지 않는다.
필멸할 존재에게 버티는 일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삽질이며, 또한 삽질이다.
버티든, 버티지 않든,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
결국 이처럼 우리가 개인으로 발달하게 된다는 것은, 즉 정서적으로 발달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과 타인의 죽음을 존중하게 된다는 의미다.
죽게 될 것을 더 죽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낙타의 등 위에 짐을 더 올리려 하지 않는 것이다.
더 살았으면, 이라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서적 공감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감함으로써, 서로에게 이 바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더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러한 정서적 공감이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가장 큰 긍정이다.
가장 성숙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큰 말이다.
반면, 정신력이 강한 큰스승들은 이렇게 말한다.
"더불어 살아내자. 약해지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듣기만 해도 피곤한 말이다.
우리는 이제 그만 버티고 싶다.
지독히도 고집스러운 미발달아동을 만족시키기 위한 그 유일한 목적으로, 함께 버티는 삶을 이제 그만 하고 싶다.
우리는 이제 부드럽고 싶다. 유연하고 싶다. 그래서 자유롭고 싶다.
정서력은 우리가 얼마나 부드러운 살을 가진 생명인지에 대한 척도다.
정신력은 우리가 얼마나 딱딱한 껍질을 가진 비생명인지에 대한 척도다.
정신력이 약해야 한다. 녹아내려야 한다. 해체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아주 긴 시간 동안 숨겨왔던 속살을 드러내어, 우리가 얼마나 부드럽고 따듯한 존재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이것이 발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발달은 곧 발견이다.
정신력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우리 자신의 존귀한 면모를 문득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문득 자신이 어른임을 발견한다.
큰어른처럼 행세하고 있는 또 다른 아이를 지적으로 모방함으로써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서를 정직하게 자각함으로써 불현듯 어른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정서가 우리를 어른으로 만든다.
정서가 우리를 사람으로 회복시킨다.
정신력이 아니다.
정서력이다.
모든 필멸자를 괴롭히지 않고 이제 쉬게 할 수 있는, 그 온전한 쉼의 현실을 꿈꾸는, 바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