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
지금 우리 사회는 죽음에 대한 태도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힘들어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죽음에 대해 사람이 취약하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는 죽음이라고 하는 현상 앞에 절대적인 을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적인 죽음 앞에 취약하다는 것과, 죽음에 대한 태도가 취약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오히려 죽음에 대한 태도의 취약성은, 우리가 죽음 앞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에 생겨난다.
죽음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곧 그래서 죽음은 결코 우리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우리가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착각이 죽음 앞에서의 우리의 취약성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취약성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똑바로 못사는 잘못된 존재가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음 앞에서의 우리의 취약성이 은폐됨으로써, 역설적으로 죽음에 대해 과잉된 태도가 출현한다. 그리고 이 과잉된 태도가 그대로 죽음에 대해 취약한 태도를 암시한다. 과잉된 것은 언제나 취약성을 은폐하고자 형성되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취약성을 은폐하려는 목적은 그 취약성의 소재를 과잉되게 우상화시키는 일로 달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우상화된 것은 이제 함부로 감히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말이 억압되고, 대화가 통제된다. 자유가 사라진다. 우상화된 것만이 일방적인 권위가 되어 모든 소통을 단절시킨다.
이를테면 이러하다.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을 네가 뭘 알아?"
결코 틀린 이야기가 아니지만, 이것은 일방성의 폭력이다.
이렇게 역으로 되물을 수도 있다.
"부모 잃은 자식 마음을 네가 뭘 알아?"
얼마든지 가능하다.
"상대 잃은 배우자 마음을 네가 뭘 알아?"
"단짝 잃은 친구 마음을 네가 뭘 알아?"
"반려동물 잃은 반려인 마음을 네가 뭘 알아?"
그러나 그 모든 반문이, 자식 잃은 부모 마음에는 그 어느 것도 비길 데가 없다는 식의 결론에 의해 봉쇄된다면, 여기에는 지금 우상화의 폭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특정한 죽음은 다른 죽음보다 객관적으로 특별하다.'
이러한 대전제가 우리에게 있어 죽음에 대한 태도의 취약성을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기제다.
그 기제의 이름은 바로 '평가'다.
죽음에 대한 태도의 취약성이란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정도를 의미한다.
어떠한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들은 그 죽음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이들이다.
즉, 성장과 진보의 환상을 기준으로 삼아 죽음에 대해 가치평가를 하고 있는 이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을 어려워하게 된다.
한국사회에서 특히나 과열되어 있는 성장과 진보라는 평가의 기제가 죽음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죽음마저도 우열의 등급이 매겨지는 평가의 대상이 된다.
"와, 이 사람은 하버드처럼 가치있게 죽었어."
"에이, 이 사람은 날백수처럼 무가치하게 죽었네."
이러한 평가의 기준에 따라 못나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은 이가 혹시라도 우리 자신과 관계된 이라면, 이 무가치한 죽음의 사건은 또한 우리 자신을 못나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사건이 된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변조를 시작한다.
그 죽음이 마치 거악과 싸우다가 죽은 억울한 영웅 내지 순결한 피해자의 죽음인 것처럼 내러티브를 창조한다. 그러한 음모론적 허구를 통해 어떻게든 그 죽음을 미화하고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작업을 시도한다.
죽음이라고 하는 우리의 개입이 불가능한 사건마저도, 성장과 진보의 서사 속으로 옭아매려고 하는 것이다.
지독한 구속이고, 통제욕이며, 독재 중의 독재다.
이것이 광기다.
세상의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행위가, 나아가 죽음이라고 하는 개인에게 있어 가장 고유하고 사적인 사건조차도 우열의 등급으로 평가하려는 행위가 바로 광기다.
평가의 광기다.
이 평가의 광기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취약성을 은폐하려고 한 끝에 생겨난 취약한 태도의 결과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결국 세상 모든 곳이 평가로만 가득하게 된 광기의 현실이 우리를 정말로 미치게 만든다.
늘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경직되고, 언제라도 비난받을까봐 몸을 사리게 되며,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람인 것 같은 죄책감에 끝없이 시달리게 된다.
살기 싫어진다.
어디에서도 도무지 편히 쉴 곳이 없다.
가장 고유하고 사적인 죽음에조차도 평가라고 하는 집요한 괴물이 성큼성큼 침범해 들어온다.
비명이 터지는 현실이다.
성장과 진보에 근거한 이 평가라는 개념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개념이다.
가치있는 것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성장의 교조화가, 또한 가치있는 것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진보의 이념화가, 바로 평가의 기제가 사람을 사람으로서 죽지 못하게 한다. 즉, 사람을 정말로 죽인다.
사람의 죽음은 어떤 양상으로 일어나든 무가치한 죽음이 아니다.
사람의 죽음은 언제나 그 모든 가치를 넘어서 있는 현상이다. 가치평가를 거부하는 현상이다. 때문에 무가치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의 죽음이 마치 무가치한 죽음처럼 보이게 되는 것은 성장과 진보의 환상에 눈이 먼 이들에 의해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성장과 진보의 기준에 따라 우열의 등급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오만과 착각에 빠진 이들에 의해서다.
그러한 자신들이 어떠한 죽음을 무가치한 죽음으로 평가하고 있기에, 그 죽음이 무가치한 죽음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의 죽음을 무가치한 죽음으로 만든 것은 모종의 사악한 적폐세력이 아니라, 그 죽음을 수치스럽게 평가하는 자기 자신의 시선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해할 수 있다.
하나의 죽음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미화하며 변조를 시도하는 이들, 그들이야말로 그 죽음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이들이다.
죽은 이에게 아름다운 서사를 입히려 하는 이들, 그들이야말로 그 죽은 이를 모독하며 가치평가하고 있는 이들이다.
죽음을 평가한다는 것, 이것은 죽음에 대한 최악의 태도며, 죽은 이에 대한 최후의 폭력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그 어떤 사람의 죽음도 미안함의 이유가 되어선 안되고, 감사함의 이유가 되어선 안된다.
그것은 상거래의 논리다. 즉, 교환가치의 논리다.
어떠한 소재를 교환가치로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평가다.
그 누구의 죽음도 교환가치가 될 수 없다.
그 누구의 죽음도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결코 미안함의 이유로, 또 감사함의 이유로 변조되어선 안된다.
죽음은 결코 평가되어선 안된다.
특히나 오늘날 한국사회의 화두라고 할 수 있는 아이의 죽음은 더욱더 평가되어선 안된다.
아이의 죽음을 통해, 영웅이 만들어져선 안된다.
가장 순수한 것의 죽음을 통해, 가장 망령된 것이 피어나선 안된다.
가장 대체될 수 없는 것이, 그렇게 일개의 교환가치로 추락하여 광기에 봉사해선 안된다.
죽음은 정확하게 대체불가능성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죽음 앞에서의 우리의 취약성이란 곧 대체불가능성이다. 우리가 대체불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직감하기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즉, 우리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하기에, 우리는 죽음 앞에서 취약해지는 것이다.
이 취약성을 받아들이는 만큼, 우리는 사람의 소중함을 다시 기억하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이 대체 어떠한 존재인지를 잊을 수 없게 된다.
죽음에 대한 평가와, 변조와, 미화와, 나아가서는 우상화를 시도하는 일은, 우리에게서 이 사람을 망각하게끔 만든다.
죽음에 대한 평가는 곧 사람에 대한 평가다.
사람은 평가되는 순간, 사람이 아니게 된다.
그저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는 교환가치로 몰락하게 된다.
어떠한 죽음을 보다 가치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시도하는 그 모든 취약성의 과잉된 태도로 말미암아, 역설적으로 그 죽음이 담고 있는 대체불가능성의 의미는 더욱 빠르게 상실된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대체불가능한 것을 감히 잃을 수는 없다.
잃지 않기 위해서는 취해야 한다.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 앞에서의 취약성을, 즉 대체불가능성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태도 또한 취약한 것이 아닌 대체불가능한 것이 된다.
우리는 대체불가능한 것에 대해 그것이 정말로 대체불가능하다는 태도를 취한다.
지금은 사라졌으나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질량만큼의 공간을 우리는 취한다.
우리 안으로 그 공간을 받아들인다.
대체불가능한 크기만큼의 대체불가능한 공간이, 가장 거대한 공간이 우리의 가슴 안에 깊숙히 자리잡는다.
가장 소중하게 자리잡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공간으로 살아간다.
가장 소중한 것이 엄연하게 존재했다는 증거로서 가장 거대하게 부푼 그 공간으로 사는 일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은, 그것이 없어도, 그것의 대체불가능성을 드러내며, 바로 그것으로 사는 것이다.
지금은 없는 것의 자리를 이 가슴 안에 마련함으로써, 지금은 없는 것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이 사랑의 태도 속에서 우리는 알게 된다.
하나의 죽음이 우리에게 반드시 알리는 것, 그 모든 가치를 넘어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전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은 없는 것까지도 가득 사랑할 수 있는 한정없이 따듯한 가슴의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우리로 말미암아, 사랑은 영원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평가될 수 없는 죽음이, 평가될 수 없는 우리의 이 사랑을 활짝 개방한다.
평가될 수 없이 가장 큰 것이다.
가장 커서 있음과 없음의 평가조차도 넘어선 것이다.
그래서 없는데도, 대체 불가능한 일인데도, 대체불가능한 것으로 분명 우리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잃지 않았다.
계속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약속했다.
평가하지 않는 우리의 태도가, 사랑하고 있는 우리의 약속이다.
영원의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