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과잉의 사고사회

"뿌리깊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by 깨닫는마음씨



하나의 사회에서 사건사고가 많아질수록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죄책감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개인과 동일시된 사회적 문법의 기제로 인해, 마치 그 사건사고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생긴 것처럼 경험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사고가 많을수록 우리는 생각이 많아진다. 사건사고의 원인을 분석하고, 또 그에 대한 책임을 반성하기 위해 고민이 깊어진다. 고민만큼 죄책감도 깊어진다.


사고(事故)의 과잉은 사고(思考)의 과잉을 낳고, 이는 죄책감의 과잉을 낳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이것은 사실 역방향으로 더 많이 성립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사고(思考)의 과잉이 사고(事故)의 과잉을 낳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시동하는 출발점은 바로 죄책감을 느끼는 주체다.


이것을 풀어서 한번 잘 이해해볼 수 있다.


우리가 평상시에 느끼는 일반적인 상태를 떠올려보면, 가장 정직하게 관찰하건대, 고민을 위한 고민을 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사고는 곧 고민을 위한 것이다.


가상의 사고(事故)가 나지나 않을까 늘 걱정하며,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사고(思考)를 활발히 함으로써 고민을 더 많이 만들어간다.


마치 고민을 위해서만 사는 것 같은 형국이 된다.


그래서 이렇게 산다는 것 자체가 또 고민이 된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 모든 고민의 원형적 표현이다.


이 표현이 알리는 것은 정확하게 '존재의 죄책감'이다. 근본적으로 자신이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은 죄책감이다. 즉, 존재가 부정된 것처럼 느끼는 죄책감이다.


이러한 죄책감에 빠진 고민의 주역들은 매우 자주 삶을 비장하고 냉엄한 것으로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신들이 존재를 부정하는 죄책감의 차가운 눈으로 삶을 보기에, 삶이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그래서 문제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는 만큼, 모든 것에 죄책감을 투영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뿌리깊은 자책의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이 마치 언제라도 삶이 자신에게 위험한 사건사고를 일으킬 것이라는 착각을 만들어낸 원인이다.


왜 우리는 계속 이러한 정체성으로 살아가는가? 왜 우리는 계속 죄책감을 경험하게 되는가?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타인을 죄인으로 만들려 하고 있기에, 자신 역시도 잘못을 저지른 죄인인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타인을 보는 방식대로, 자신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타인이라는 인간을 부정하기에, 자신이라는 인간이 부정되는 것이다.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은, 양심을 갖고 자기반성을 할 줄 아는 겸허하고 온순한 이들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이들은, 그 자신이 자각하려 하지 않을지라도, 강렬한 의지로 타인을 심판하려는 의도를 깊이 내포한 마녀재판관들이다.


이 마녀재판관들의 사고는 어떻게 하면 인간을 더욱더 죄인으로 만들 수 있을까의 목적을 위해 작동한다.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자기 자신과 타인을 더욱 죄인으로 몰락시키기 위해 끝없이 사고는 과잉된다.


정직하게 한번 이해해볼 수 있다.


우리에게 사고가 과잉될 때, 즉 우리에게 생각이 많을 때를 떠올려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잘못한 인간의 그림이 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 되든, 타인이 되든 간에, 그 사고작용이 향하는 곳에는 정죄되어야 마땅하다고 상정된 인간의 모습이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매일매일 치열하게 사고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확하게 우리 자신이 죄인이 된다. 그리고는 그 죄인의 상태에서 경험되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또 사고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더욱 타인을 죄인을 만들려 하며, 더욱 우리 자신이 죄인이 된다. 죄책감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악순환 속에서 무리하게 벗어나려고 할 때, 바로 사고(事故)가 일어난다.


그래서 사고(事故)가 일어날 것 같은 우리의 예감은 사실 사고(事故)가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희망이기도 하다. 그렇게 무리한 형태를 취해서라도 이 죄책감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크고 간절한 까닭이다.


이 사고(思考)와 사고(事故)의 반복이 낳는 죄책감의 악순환은 다른 누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사고(思考)로 우리 자신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것이며, 사고(事故)로 우리 자신에게 물리적 고통을 가하는 것이다.


이 부단한 채찍질을 멈추는 방법은, 표현 그대로 채찍질을 멈추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은 '존재의 죄책감'은, 타인이 존재하면 안 된다고 정죄하고 있기에 생겨난다. 이것이 죄책감의 모든 것을 시동한다.


타인의 존재를 정죄하는 일을 멈추면, 우리 자신도 편히 존재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이 얼마나 나쁜 존재인지, 그리고 그 나쁜 존재가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 위협을 가할 것인지, 때문에 그 위협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처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우리가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근본적으로 타인은 죄인'이라는 생각을 고집하는 일이다. 즉, 우리 자신만이 순결하다는 생각을 고집하는 일이다.


고민은 고집이다.


고민하는 자는 인간으로서 멋진 모종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 인간인 척하려고 다른 인간을 부정하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한 사회의 사건사고가 그 자체로 죄책감을 유발시키는 소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사고에서 특정한 세력만을 인간으로 규정하려는 고집을 부리고 있기에, 그것이 죄책감의 소재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희극이다.


우리가 아무리 인간을 부정하기 위해 고민한다고, 우리 자신이 더욱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며, 타인이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고민과는 아무 상관없이, 우리는 불가피하게 인간이다. 심지어는 우리 자신이 인간인 것이 싫다 할지라도, 그래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인간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모습을 다 사랑하며 천사표처럼 인자한 미소로 깨달은 사람인 척하라는 결론을 암시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그런 것이 깨달은 이의 모습도 아니다.


우리의 고민과 아무 상관없이 이미 인간인 것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보며 싫어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인간을 다만 인간으로 싫어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싫어하는 그것이 인간이라는 엄연한 사실 속에서 싫어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싦어하는 행위를 통해서도 인간 자체는 긍정된다.


인간이 긍정되니, 인간을 부정한 결과 생겨난 죄책감은 사라진다.


그렇게 인간의 온전함이 회복된다.


죄책감이란 곧 인간의 온전함이 깨진 결과다.


이 온전함의 파괴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사고(事故)다.


어떻게든 인간을 부정하기 위해 불철주야 고민하는 사고(思考)의 과잉이 이 가장 큰 사고(事故)를 낳는다.


사고(思考)사회가 사고(事故)사회를 낳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사고과잉의 사고사회인 셈이다.


이러한 사고과잉의 사고사회에 자리잡은 죄책감의 뿌리는 깊다. 그러한 사회의 시작부터 심어진 묘목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특정한 하나의 사회를 효율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통제의 기제로서 활용되는 핵심이 바로 죄책감이다.


때문에 이러한 사회에서는 늘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게 된다. 그로 인해, 사회의 구성원들이 마치 자신이 잘못한 줄 알고 그 죄책감을 보상하기 위해 더욱더 사회에 종속되게 된다. 자식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장한 사건사고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눕는 엄마 앞에서, 자식이 커다란 죄책감을 느끼며 종속되는 모습과 같다.


그러나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인간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인 것이다.


인간은 사회라는 토양보다 더 뿌리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사회가 만든 그 어떤 죄책감으로도 근본적으로는 결코 훼손될 수 없는 깊이가 인간 존재의 본성이다.


"그래도 나는 인간이다."

"그래도 너는 인간이다."


이 말을 읊조릴 때 느껴지는 바로 그것이 인간의 깊이다. 인간의 본성이며, 바로 인간의 자유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긍정이, 그 자유의 힘으로 우리 자신을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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