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게 철학하는 방식에 대하여

"아름다운 혼돈"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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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철학하는 방식으로 매우 자주 우리에게 오해되어 온 모습은, 세상의 구조를 작동시키는 핵심적 원리를 파악하고 운용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을 정합적인 설계물로 가정한 뒤, 그러한 세상의 구조를 이루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세상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낳은 오해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지성적 능력을 통해, 정합적 현실에, 논리적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담보하려는 기제가 되어 왔다. 그러니 철학의 몰락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철학의 목적이 현실적으로 가용가능한 힘의 획득에 경도되어 있다면, 철학을 하는 것보다는 자본을 축적하는 일이 더욱 효율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천한 자본주의 대 고귀한 철학 사이의 대립이 아니며, 상기한 방식으로 철학을 해온 이들이 개탄할 만한 비극의 현실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이 알리는 것은, 동일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상이한 수단들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특정한 수단이 다른 수단보다 더 효과적인 위상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뿐이다. 모두가 국수를 먹을 때는 획득될 수 있었던 젓가락의 권위가, 이제 문명의 발전으로 모두가 스테이크를 먹게 됨으로써 나이프의 권위에 밀리게 된 것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이라는 활동의 무용성에 대한 이야기 또한 아니다. 오히려 지성적 능력이 현실적 권력의 근거가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담은 내용이 철학이라는 형식으로 펼쳐졌던 그 오해의 무용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철학이라는 형식이 정말로 일치하여 담아야 할 그 내용에 대한 회복을 촉구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정말로 철학의 내용이 되어야 할 것, 즉 정말로 철학하는 방식이란 무엇일까?


먼저 세상과 사람이 작동하는 구체적인 원리를 이해하는 일, 이것은 더는 철학의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더 효율적인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심리학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을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의 소재로 삼아 세상의 본질을 재구성하려는 일, 그리고 그 재구성의 권위자로서 철학자 자신을 위치지으려는 일, 이것 또한 이미 메타버스의 구성을 꿈꾸는 VR 기술의 기획자들에게 더 적합한 임무로서 확인된지 오래다.


전술한 것처럼 사회에서 운용가능한 현실적 권력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는 어떠할까? 철학이라는 소재를 교환가치로 삼기에는 정말로 더욱 유용한 소재들이 많다. 철학논문을 100편 쓴 이보다, ‘좋아요’를 100개 얻은 유튜브 채널의 주인이 차라리 더 우월한 현실적 권력을 담보한다.


그래도 나는 수준낮은 이들과는 다르게 깨어있는 자로서 철학을 한다, 라고 하는 고결한 정신을 드높이려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모두가 수준낮게 워드프로그램으로 문서작성을 하고 있을 때, 먹을 갈아 한지 위에 담비털로 된 붓을 휘날리는 일은 충분히 자부심을 느끼며 도취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취향을 주장하는 패션의 관점이다. 즉, 형식에 대한 것이지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다.


더욱 쉽게 말해보자.


철학은 힘을 제공해주는가? 철학은 돈을 벌어주는가? 철학은 멋지게 만들어주는가? 철학은 문제를 해결해주는가? 철학은 인생의 답을 알려주는가? 또 이 모든 것은 철학의 내용이 될 수 있는가?


그 모든 답은 아마도 ‘아니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철학인가? 철학은 어떻게 철학일 수 있는가? 그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이 자리에서 통찰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알려진다. 철학은 오직 통찰을 위해서만 활동할 때 철학이다.


통찰(insight; 洞察)의 의미는 ‘꿰뚫어 봄’이다. 안쪽을 보는 것이고, 이면을 보는 것이며, 깊이를 보는 것이다.


거기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숨겨진 합리적 질서가 있었을까? 보편적인 진리의 원천이 있었을까? 마법같은 힘의 소재가 있었을까? 또는 가장 견고한 개인의 중심이 있었을까? 주관성의 신비가 있었을까? 불멸의 영혼이 있었을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정직하게 철학을 해온 이들은 자신이 목격한 것을 고백한다.


여기에는 혼돈만이 있었노라고.


잘 정돈된 구조와 같은 이 모든 것의 안쪽에, 이면에, 가장 깊은 곳에는 혼돈이 있었다. 그러나 혼란(confusion)이 아니다. 혼돈(chaos)이다. 모든 것이 저마다 널뛰고 있었고, 제 방식으로 날뛰고 있었으며,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빠짐없이 전부 눈띄고 있었다. 정직한 이들은 바로 그것을 보았다.


그 혼돈 속에는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정직한 이들은 바로 그것을 꿰뚫어 보았다.


혼돈(chaos)은 바로 온전함(wholeness)이었던 것이다.


아무 것도 제대로 있을 수 없을 것 같던 그 혼돈의 공간은, 모든 것이 그대로 다 있을 수 있던 온전함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통찰은 어떠한 현상이나 사물 내지 사람에게 숨겨진 진리나 정의 따위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은폐된 기만과 협잡 내지 악의 따위를 드러내 공박하는 것이 아니다. 통찰은 우리 눈앞에 있는 바로 그것의 온전성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것 또한 온전했노라고, 본 것을 꿰뚫는 것이다.


철학자가 가장 정직하게 철학하는 방식은 바로 이 목격과 고백의 방식이다. 목격한 혼돈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렇게 목격한 온전성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바로 텅빔에 대한 목격과 고백이다.


모든 것이 혼돈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있다는 것이며, 모든 것이 다 있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다 비워져 있어야 한다. 혼돈은 다 있음이며, 동시에 다 비움이다.


그리고 그 다 비워진 텅빔을 목격하고 고백하는 철학자는 그 텅빔을 보고 꿰뚫는다. 자신과 함께 꿰뚫는다. 꿰뚫어진 일체가 된다.


그래서 그는 결국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고는, 다른 모든 말은 다 거짓말이 되는 까닭이다.


자기가 비워져 모든 것이 다 있게 되는 그 온전함의 혼돈을 그는 사랑이라고 다시 기억한다. 그것에 대한 사랑을 다시 시작한다. 이 사랑의 발견이 철학자의 끝이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모험자의 시작이다.


우리 또한 바로 이 아름다운 혼돈 속에서 살고 있었다. 곧, 사랑 속에서 살고 있었다. 없는 것 같고, 모르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지만, 혼란스러운 그 우리 자신조차도 이미 이 아름다운 혼돈 속에 담겨 있었다. 거대한 비움이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있을 수 있도록 다 허락하고 있었다. 우리 자신이 그 거대한 사랑에게 목격되어 꿰뚫려 있었다.


이것은 내용없음의 내용이다.


철학을 플랫폼이라고 말하면 정확할 것이다. 철학은 내용없음으로서의 내용이다. 자기비움으로서의 내용이다. 철학의 내용없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내용을 갖게 된다. 철학하는 방식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를 비우는 방식이다. 자기를 비워 모든 것의 온전성을 목격하고 고백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즉, 모든 것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철학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다. 혹시라도 철학의 내용을 기술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것만이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사실 사랑이야기다. 세상에 대한, 이 삶에 대한, 그리고 나라고 하는 이 인간에 대한 사랑의 기억들이다.


때문에 정직하게 철학하는 방식이란 곧 정직하게 사랑하는 방식이다.


이 시작도 끝도 없이 가득 펼쳐진 아름다운 혼돈을 나는 진심으로 사랑했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언제나 내 생각의 크기를 훨씬 넘어선 것들이었으나,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은 결코 내 사랑의 크기를 넘어서지는 않는 것들이었음을, 이 모든 것을 향한 내 사랑이 언제나 가장 큰 것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가장 정직하게 돌이키건대,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진실로 아무 것도 없었음을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나라서,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었다.


내가 바로 그 아름다운 혼돈이었다.


철학은 바로 이 나를 발견하고자 활동할 때만 철학이다. 바로 이 나를 통찰하고자 활동할 때만 철학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소외된 이 내가 사랑의 원천이었음을 알리는, 그렇게 사랑없음 속에서의 사랑이, 내용없음으로서의 내용이, 불가능성의 기적적인 가능성이 바로 나임을 알리는 그 활동이, 우리가 아주 긴 시간 동안 희구하며 써내려온 철학이라는 이름의 사랑이야기다.


바로 내가 정직하게 사랑해온 방식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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