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의 학대: 엄석대의 군사독재보다 독한 한병태의 구루독재"
이문열 작가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인 이유는 이 작품이 드러내는 예언적 풍모 때문이다.
비단 군사독재 시절에 대한 우화만이 아니다. 이 작품은 바로 지금 이 시대 또한 비추고 있다.
지금 이 시대 또한 독재의 시대다. 독재는 무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그 말 그대로, 펜으로 이루어지는 독재는 더 은밀하며 더 심대하다.
이러한 독재의 형태를 임의적으로 '구루독재'라고 명명해볼 수 있다.
이 구루독재는 이문열 작가의 작품 속에서 엄석대의 모습으로 대변되는 군사독재의 속성과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작품 속 인물로는 엄석대에 대한 대비구도를 이루는 한병태의 모습이 이 구루독재의 속성을 은근하게 암시한다.
한병태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바로 '반성하는 자기성찰의 지식인'이다.
이 '반성하는 자기성찰의 지식인'을 다른 말로 '깨어있는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구루독재란 바로 이러한 지식인이 자행하는 독재를 의미한다.
구루라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구루가 갖는 첫 번째의 함의는, 사람들 위에 서서 사람들을 계몽시키고 정신적 차원의 발달을 촉진하는 스승과 같은 이를 칭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사람들 위에 선다'는 이 구루의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되는 소재가 바로 지식이다. 사람들보다 지식을 많이 쌓았거나, 학벌이 높거나, 지적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이는, 사람들에게 쉽게 구루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즉, 지식인은 통상적으로 구루의 조건을 달성하기에 유용한 입지를 갖는다.
게다가 한국과 같은 유교사회에서는 이 지식인의 구루화가 이루어지는 일을 더욱 수월하게 해주는 선비라는 모델이 이미 자리잡고 있다. 선비는 글공부를 통해 지식적 우위를 확보한 이들이며, 그 지식적 우위를 토대로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이 내재된 이들이다.
이처럼 선비라는 유교적 지식인의 개념 자체가 이미 구루의 조건을 100% 충족시킨다.
나아가 이 유교적 지식인이 '반성하는 자기성찰의 지식인'의 속성까지 띨 경우, 여기에는 도덕적 권위마저도 부여된다. 도덕이 종교를 대체해버린 근대 이후로는 도덕적 권위는 종교적 권위와 동일한 위격을 갖는다. 즉, 도덕적 권위는 절대성과 영원성의 의미를 다소간에 내포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반성하는 자기성찰의 지식인'은 자신의 지식으로 얻은 권위에 대해 절대성과 영원성의 가치까지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반성과 성찰이라는 기제가 그러하다.
반성과 성찰은 지성으로 하는 활동이다.
지식인의 지성이 어떠한 오류를 범했을 때, 그 오류를 수정하는 기제마저도 다시금 지성이다. 지식인이 자신의 오류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행위 자체가 지식인의 권위를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식인의 권위 자체가 결코 훼손되거나 상실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위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아주 쉽게 묘사하자면 이러한 말과 같다.
"내 똑똑함이 혹시 문제를 만든다면, 내 똑똑함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게."
정말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는 이가 자폐적으로 하게 되는 말이다.
문제는 단 하나다.
지성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보고, 지식의 축적이 그 지성의 발현이라고 여기며, 오직 지성만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성절대주의가 바로 그 문제다.
이 지성절대주의가 야기한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학벌사회다.
그리고 이 학벌사회라는 문제를 반성하고 성찰하며, 그에 대한 지성적 해결책을 시도하려는 주체들이 등장함에 따라 구루독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구루독재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일까?
바로 '반성하는 자기성찰의 지식인'의 자리를, 즉 구루의 자리를 자기 자식에게 세습하는 일이다.
이 문제가 신속하게 해결될 것이 아니니, 혹시라도 그 사이에 다른 어리석은 이들이 사회의 지도자인 구루역할이 되어 세상을 더 혼탁하게 만들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 자기를 닮아 '반성하는 자기성찰의 지식인'이 될 만한 자기 자식에게 구루역할을 세습시켜 그 자식이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려는 것이다.
즉, 여기에 내재되어 있는 것은 거대한 선민의식이다.
그 선민의식으로 일그러진 부모의 모습이며, 일그러진 양육의 모습이다.
여기에서 구루의 두 번째 함의가 알려진다. 구루란 곧 선민의식으로 양육하는 부모다.
자기성찰과 반성을 통해 깨어있는 지성인으로서 스스로를 자임하는 부모가 선민의식에 빠져, 실제의 자기 자식과 다른 사람들을 그 선민의식에 입각한 계몽의 방식으로 양육하는 모습, 이것이 바로 구루의 총체적인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즉, 구루는 지성주의와 부모주의의 자기우상화적 결합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병태로 상징되는 구루독재의 실상이다.
독재란 하나의 원리만이 지배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를 관찰해보면, 거의 모든 현상 속에서 획일적인 원리가 발견된다.
그것은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하게 '양육'이다.
"하고 싶은 거 다 해."
"아빠엄마가 어벤져스처럼 끝까지 지켜줄 거야."
"우리 아이를 위협하는 숨겨진 적폐세력이 있어요."
이 모든 말 속에 담긴 것은 분명 과잉된 양육의 의지다.
우리가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방식에서도 이 양육의 기제는 두드러진다.
이를테면, 악동뮤지션 같은 이들을 보며, 마치 다마고치나 포켓몬을 키우듯이, 저 천재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며(그러나 GD병은 걸리지 말고), 건강하게 자기 천재성을 다 발휘하며 자라줬으면 좋겠다, 하는 양육의 마음으로 그들과 관련된 내러티브를 즐긴다.
마치 프린세스 메이커와 같은 게임을 하듯이, 대중의 힘으로 한 아이를 스타로 만들어주는 형식의 오디션 프로그램의 유행 또한 이 양육을 향유하는 방식이다.
그러다가 사회적으로 주목되는 아이의 죽음이라는 현상이 발생하면, 모두는 그 앞에서 마치 자기 자식을 잃은 듯한 죄책감을 경험하며 과도하게 예민해진다.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그 죄책감을 전방위로 투사하여 이 사회가, 아니 이 우주 전체가 마치 아이에 대한 악의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환상의 거악을 창조해내고, 그 거악을 규탄하려 한다. 그러한 마녀사냥의 방식으로 자신의 죄책감을 씻으려 한다.
이 양육이라고 하는 구루독재의 기운은, 과거 군사독재보다 더욱 강렬하고 유독하다.
군사독재는 외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그 폭력성과 압제성으로 인해 쉬이 비판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일이 수월하지만, 이 양육의 구루독재는 겉으로는 대단히 부드럽고, 인간적이며, 친절한 질감을 표방하고 있기에, 그것이 사실은 독재라는 사실이 아주 깊이 은폐된다. 그렇기에 생명력이 더욱 질기다. 독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도 한병태는 질기다. 독하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화자 또한 한병태다. 그의 지성의 힘으로 기획하고, 회유하고, 반성하면서, 다양한 전략들을 통해 생존해낸다.
작품 속에서 엄석대가 한병태를 철저하게 복속시키려 한 이유는, 이처럼 독한 한병태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과거 엄석대와 같은 군사독재세력이 한병태와 같은 학생운동세력을 짓밟으려 한 이유 또한 동일하다. 독한 학생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성하는 자기성찰의 지식인'인 한병태가 자라나, 이제 이 시대에 구루가 되어 양육의 독재를 행사한다. 자기와 같은 한병태들을 양산하고, 구루의 자리를 세습시키려고 한다. 이 세습의 의지는 그 무엇보다 독하다.
우리가 아이를 지켜야 한다고 독하게 목소리를 높일 때, 그 아이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바로 한병태다.
자기와 맞지 않는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환경에 던져진 채 억울하게 엄석대에게 얻어맞으며, 자기의 지적인 천재성을 충분히 펼치지 못하고 날개가 꺾이게 된 아이의 모습을 우리는 지키려 한다. 즉, 이미 똑똑해보이거나, 똑똑해질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아이의 모습을 우리는 지키려 한다.
자동차 후면에 붙어 있는 "미래의 판검사가 타고 있어요."라는 스티커의 의도와 실제적으로 동일한 의도의 일을 우리는 양육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지성절대주의를 신봉하고 있다.
지성절대주의에 빠진 한병태가, 무수한 한병태들을 지성절대주의에 빠지도록 양산하는 일, 이것이 구루독재에서 펼쳐지는 양육의 모습이다. 전술한 것처럼, 일그러진 부모의 모습이며, 일그러진 양육의 모습이다.
바로 일그러진 구루의 모습이다.
반성과 성찰을 통해 지성의 가치를 일견 부정하는 척하나 실은 더 공고화시키는 지성절대주의는 선민의식이 되고, 그 선민의식은 모든 것을 똑똑한 자기의 권위로 똑같이 만들려 하는 일그러진 양육의 독재를 낳는다.
제국주의의 폭력은 이처럼 그것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오히려 더욱 효과적으로 되살아난다. 이렇게 독할 수가 없다.
아주 실제적으로도 이해해볼 수 있다.
우리를 가장 화나게 하는 부모의 모습은 무엇일까?
바로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죄책감을 형성한 뒤, 그 죄책감에 바탕을 두고 우리에게 활동하는 부모다.
이러한 부모만큼, 우리를 숨막히게 하고, 옥죄이며, 마치 공포영화처럼 기능하는 독한 부모의 모습이 달리 없다. 바로 독재하는 부모상이다.
시대적으로도 유의미하게, 이러한 독재적 부모상은 오늘날 586세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한병태는 분명하게 586세대의 자화상이다.
586세대는 시대 앞에 진중하게 반성하고 성찰하는 모양새를 취한 끝에, 그 모양새를 통해 결국 모든 자원을 확보하여 성공적으로 살게 된 세대다. 이들에게 있어 '반성하는 자기성찰의 지식인'의 모습으로 남들에게 보이는 일은 곧 최고의 생존기법이며 최상의 처세술이다.
그리고 이 생존의 원리가 독재를 행사하고 있으니, 다른 방식의 생존은 용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독재가 펼쳐지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두가 한병태가 되어야만 한다. 모두가 한병태와 동일한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그렇게 어른 한병태가 아이 한병태를 지켜야 한다고, 아이 한병태는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끝까지 한병태와 함께하겠다고 하는 동일한 목소리만 모든 장면에서 반복되고 있다.
망가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일그러진 음성처럼, 또는 낡은 비디오테이프가 반복재생될 때마다 우물 속에서 꾸물꾸물 기어나오는 사다꼬의 일그러진 몸짓처럼, 모든 것이 일그러지고, 그 일그러짐이 오히려 정상성이 되어 버렸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제 더는 엄석대를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병태에 대한 이야기다.
영웅상으로서의 한병태의 가장 현실적인 이름은 바로 '양육과잉의 부모'다. 그것이 지성절대주의의 구루며, 독재하는 부모상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곧 '우리들의 일그러진 부모'다.
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부모' 즉 구루는, 자기가 진정한 부모가 되어 불쌍한 아이와 같은 모두를 구원하겠다는 소망을 갖는다.
그렇게 토끼도 불쌍한 내 새끼, 거북이도 불쌍한 내 새끼, 하며 이 구루가 정말로 하고 있는 일은, 토끼와 거북이보다, 즉 자기가 자식처럼 보고 있는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일이다.
이것은 유교가 내포하는 집요한 권력욕이 교묘하게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는 황희의 너털웃음은 인간이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권력욕이다. 자기가 모든 것을 자기 아래의 것처럼 승인해줌으로써, 그 모든 것에 대한 권력을 담지하는 방식이다.
한병태의 구루독재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 근간에 자리잡은 핵심기제는 분명하게 유교다. 애초에 양육과잉이라는 것이 유교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자기의 지성으로 모든 것을 틀어쥐고 똑바로 양육하지 못해 안달난 이가 공자다.
사욕없이 우직한 바보와 같은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짓는 소박한 웃음에 속아, 우리의 말이 맞다고 하는 그 친절한 맞장구에 속아, 우리는 권력을 이러한 구루독재의 주체에게 헌납하곤 한다. 구루를 우리의 부모처럼 모시며, 그 독재를 정당화하게 된다.
유교가 인간에게 있어 최악인 하나의 이유는, 유교는 자연법칙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무시하기에 자연스럽지 않다. 유교는 일그러져 있다. 특히 부모-자식 관계를 묘사하는 데 있어 가장 일그러져 있다.
자연은 말한다.
자식이 언제나 부모보다 높다고.
자연스러운 이해 속에서, 부모는 자식을 똑바로 된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는 위대한 스승과 같은 입장이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다. 언제나 한계에 봉착한 부모가 자신이 갈 수 없었던 그 다음을 자식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것이다.
즉, 더 확장된 예지와 선구적 도전의 상징으로서의 스승과 같은 입장은 오히려 자식에게 속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법칙을 무시한 채, 부모가 자기를 스승처럼 착각하여, 실제로는 자식이 스승이라는 것을 몰라보며 도리어 지배적인 독재를 행사하려 하는 것이 바로 꼰대질이다.
구루의 과잉양육이 바로 꼰대질이다.
구루는 여러 차원에서 유교가 만든 통합적 꼰대다.
구루독재가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꼰대의 문제 때문이다.
이 이해는 중요하다.
꼰대는 학대를 낳는다.
정말로 중요한 이해다.
이러한 예를 들어볼 수 있다.
지동설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있는 자식에게 천동설을 열띠게 강변하며, 그 자식을 잠도 안재우고 회초리로 쳐가며 "에미는 떡을 썰테니 너는 천동설에 따른 우주의 운항도를 그려보거라."라고 하고 있는 부모의 모습이 있다.
이것은 학대다.
유교는 적어도 부모-자식 관계에 있어서는 이 인간학대를 정당화하는 접근이며, 인간학대에 근거하여서만이 작동하는 접근이다.
유교적 메시지를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보급된 그 모든 위인전을 또한 떠올려볼 수 있다.
그 모든 위인전의 이야기는 실상 심리학적으로는 아동착취와 학대의 기록들이다.
그런데 이것의 잔혹한 점은, 이 아동착취와 학대의 주체들은 자기들이 정말로 아이를 위해 좋은 것을 하고 있다는 한치의 의심없는 믿음 속에서, 그 믿음이 낳은 인자한 미소 속에서, 바로 그러한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너에게 좋은 것이라며, 웃으며 칼로 찌르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
광기다.
망상과 착각으로 눈이 가려져,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벌어지는 일그러짐의 광기다.
유교가 이처럼 사람들을 일그러지게 한다.
일그러진 부모를 만들고, 일그러진 양육을 만들며, 일그러진 구루를 만든다.
이러한 유교의 자연스럽지 못한 일그러짐에 입각한 구루독재의 현실에서 가장 일그러진 부분은 더욱 놀랍다.
그것은 바로 유교가, 반성과 성찰의 지식인이, 과잉양육의 부모가, 한병태의 구루독재가, 바로 장사꾼이라는 것이다.
그 장사의 소재는 죄책감이다.
유교는 죄책감장사를 한다.
사농공상이라는 자기들이 만든 임의적인 기준 속에서, 스스로는 피라미드의 가장 높은 위치를 자임하면서도,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사람들의 취약성을 공략해 이익을 창출해내는 방식으로 가장 비겁하게 장사하는 일이다.
물론 이 죄책감장사는 비단 유교만의 일은 아니다. 많은 종교에서는 이 죄책감장사를 한다.
그러나 부모-자식 관계에 대해, 또 양육이라는 기제에 대해, 죄책감을 소재로 삼아 사람을 정신적으로 옭아매어 효과적인 이득을 취하는 접근으로서는 유교는 분명 독보적이다.
즉, 부모-자식 관계에서 학대라는 이름의, 부모가 얻는 이득과 자식이 얻는 고통이 발생하게 하는 데 있어 유교는 핵심적으로 기능한다.
우리가 미디어에서 보도되는 아동학대의 현실을 접하면서, 그 부모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을 물을 때 이에 활용되는 기준이 바로 유교다. 그런데 그 유교적 기준 자체가 사실은 아동학대를 낳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망각된다.
전술한 예와 동일하다. 지성이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계속 지성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의도와 같다.
우리가 정직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구루독재의 시대에 아이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모종의 숨겨진 악이나, 추상적인 적폐세력이 아니다. 바로 부모 자신이 아이를 가장 위협한다. 자신이 똑똑하고 올바른 부모라는 유교적 선민의식에 빠져, 과잉양육의 태도로 아이에게 구루로서 기능하며, 그것이 꼰대질이라는 사실이 은폐되도록 자상하고 친절하게 꼰대질을 하고 있는 부모 자신이 바로 아이를 가장 위협하는 세력이다.
즉, 어른 한병태가 아이 한병태를 가장 학대하는 세력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부모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아이를 만들어낸다.
일그러짐은 왜 발생하는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일그러짐이다.
자연스러움을 거부하고, 자연법칙을 부정하고, 작위적인 도덕과 지성의 기준에 따라 유교적 덕목을 고집하려고 할 때, 일그러짐의 발생은 필연이다.
우리가 지금 '반성하는 자기성찰의 지식인'을 자임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일그러져 있는 것이다.
'반성하는 자기성찰'이라는 일견 아름다워 보이는 용어를 그 본질적 의미에 따라 다시 묘사하면 바로 '자폐'다.
구루독재는 이 자폐의 일이다.
양육이라는 형식으로, 마치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본질은 지성절대주의가 낳은 반성과 성찰이라는 기제에 갇힌 자폐다.
자폐는 소통되지 않는 것이다.
소통되지 않을 때, 즉 소통하려 하지 않을 때, 우리가 하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관심끌기다.
관심은 소통에 대한 몰락재다. 대체재도 아니다.
자폐는 언제나 관심을 유도한다. 더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관심을 갖도록, 언론을 활용하고, 정보를 조작하며,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한다.
성공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고 있다고, 그 주체가 소통을 잘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다. 독재국가에서 독재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인구수가 증가한다고, 그것이 독재자가 독재를 포기하고 소통을 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닌 까닭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자폐의 상태를, 구루독재의 현실을 종결할 수 있을까?
먼저 우리가 지금 학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반성하고 성찰하는 지식인처럼 행위하고 있을 때, 그것이 지금 학대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자리잡은 유교적 꼰대가 우리 자신을 학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똑똑하고 올바른 부모처럼 굴고 있을 때, 우리는 학대하고 또 학대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우리 자신을 가엾게 여겨야 한다.
남의 자식의 억울함이나 남의 부모의 부당함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그 학대의 주체이자 학대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더는 남의 자식을 위해서나 남의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 말을 해야 한다. 표현을 해야 한다.
이것이 정말로 독재였다며, 내가 내 자신에 대한 독재자였다며, 그렇게 독재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알림으로써 누구보다 우리 자신이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너무나도 역설적으로, 자폐란 사실 자각이 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다. 자각이 없어서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반성과 성찰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에 대해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한다 해도 그것이 자각은 아니다.
자각은 자기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사실에 대한 지각이다.
중력에 눌리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자각이 아니라, 바로 중력을 느끼는 것이 자각이다.
우리가 경험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바로 자각할 때, 자폐의 상태는 해지되며, 소통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사실만을 말하니, 사실만이 들려오고, 정말로 깊게 핵심적으로 이해받는 느낌이 차오른다.
동시에 그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매진하던 음모론의 창조와 선동이 멈추고, 처음으로 내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면,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어진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이, 나의 자식도 남의 자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모인 나도 부모인 남도 아니며, 다만 내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이해하게 된다.
피상적으로 서로 상처를 핥아주며 아름다운 동행의 말들로 서로 최면을 거는 일의 공허함 속에서, 처음으로 의미있게 빛나는 것이 발견된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게 빛나는 것이 있다.
제일 불쌍한 것을 알아본 눈물만큼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것이 있다.
이것만을 위해 살아야지, 내 삶은 이것만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알게 된다.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학대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엄석대도 한병태도 뒤로 한 채, 책을 덮고, 모니터를 끄고, 촛불을 내린다.
삶은 버텨야 할 것이 아니다.
함께 버텨야 할 것은 더욱더 아니다.
삶은 일그러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을 대하는 태도인 지성과, 양육과, 반성과, 성찰이 일그러져 있었을 뿐이다.
삶은 언제나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실을, 그리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장 정직하게 알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삶은 독재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